저는 안 부자 나라
저도 여행의 로망은 유럽이었죠. 아름답고, 깨끗하고, 예의와 품격이 있으며 전통과 낭만까지 갖춘 나라들이 유럽에 있으니까요.
유럽과 첫 인연은 어학연수였어요. 런던에서 9개월 간 영어 공부를 했죠.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데, 집들은 다 롯데월드고, 공원은 천연 잔디 촘촘히 깔린 동화의 세상이더군요. 이게 선진국이구나. 우리나라는 국가 대표나 돼야 천연 잔디 구장을 이용할 수 있는데(20년 전에요), 런던은 어디나 천연 잔디인 거예요. 정장에 샘소나이트 백팩을 짊어지고 자전거로 출근하는 남자들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더군요. 영혼이라도 팔아서 영국에서 살고 싶다. 빡빡한 우리나라 말고, 여유와 우아함으로 무장한 유럽에서 살아보고 싶다. 이탈리아는 이탈리아대로, 프랑스는 프랑스대로, 스페인은 스페인대로 기가 막히게 아름답더군요. 특히 모나코 공국은 부티의 끝판왕이었어요. 상어의 이빨처럼 가지런한 요트들, 비싼 물가, 더 고급스럽고, 더 잘 생긴 사람들. 걷기만 하는데도, 주눅이 들더라고요.
2017년에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잠시 머물렀어요. 아주 예쁜 도시예요. 콜마르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 배경이 된 곳이죠. 스트라스부르에서 가까워요. 유럽에서 예쁜 도시를 찾는다면, 스트라스부르 추천합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스위스로 한 번 넘어가 보기로 했어요. 기차로 1시간 20분 거리니까요. 스위스로 넘어가자마자 스타벅스에 들어갔어요. 갑자기 가격이 1.5배가 되는 거예요. 스위스 물가가 비싼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죠. 못 마시고 나왔어요. 그래 봤자 몇천 원 차이인데도 정이 뚝 떨어지는 거예요. 그 아름답다던 알프스도 안 궁금해질 정도로요. 나는 그 누구보다 물가에 예민한 사람이구나. 아무리 예뻐도, 비싸면 마음의 문이 닫혀 버려요.
동남아시아를 싼 맛에 가는 사람들 많죠. 저는 동남아시아가 우리나라와 가까워서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만약 유럽과 동남아시아 위치가 바뀌었더라도, 저는 어떻게든 동남아시아를 택했을 거예요. 특히 베트남과 태국은 저에겐 보물 같은 나라예요. 이런 나라들이 많은 줄 알았어요. 아니더라고요. 아무 곳이나 불쑥 들어가서 한 끼를 해결해도 천 원, 이천 원이이에요. 맛이라도 없든가요. 진한 육수에 얼큰한 쌀국수가, 달달한 볶음 국수가, 고기까지 들어간 볶음밥이 이 가격이에요. 천 원에 마시는 길거리 커피는 또 얼마나 양이 많은지 몰라요. 설탕, 연유를 아낌없이 퍼부어요. 그래도 좀 건강을 챙겨야지. 그 귀한 열대 과일이 널렸어요. 이천 원에 한 보따리 사서 밤새 먹을 수 있어요. 아직도 방콕 터미널 21 5층 푸드 코트의 충격이 잊히지를 않아요. 어엿한 백화점 건물에 있는 초대형 푸드 코트의 전 메뉴가 천 원에서 이천 원 사이예요. 이렇게 고급스러운데, 이토록 저렴할 수도 있다니. 지상 낙원이 여기로구나. 천국에 가려고 굳이 죽을 필요가 없겠더군요.
잘 사는 나라에 가면, 다들 시선 고정. 눈길 절대 안 줘요. 이탈리아에서는 모든 여자가 사랑받기는 하지만요. 전 여자가 아니니까요. 동남아시아에서는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거의 연예인이 돼요. 괜히 웃고, 괜히 뭔가 더 신경 써 줘요. 그중에 사기꾼이 왜 없겠어요? 아홉 명 친절하고, 한 명 사기를 쳤으면 구십 점 줘야죠. 베트남은 예전에 비해서 바가지가 많이 줄었더라고요. 돈에 눈먼 악귀들만 사는 나라인 줄 알았더니요. 위생이요? 날아다니는 파리 정도는 신경도 안 쓰여요. 그렇다고 동남아시아 길거리 음식이 다 더러운 건 아니에요. 환경이 안 좋은 것뿐이죠. 운이 좋았는지 몰라도, 그 많은 쌀국수를 먹으면서 머리카락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요.
혼잡하고, 웅장한 맛은 없지만 백 미터만 걸으면 쌀국수, 백 미터만 걸으면 시장, 백 미터만 걸으면 꼬치에, 소시지인 나라가 좋아요. 이런 나라로는 태국, 베트남, 대만이 있죠. 우즈베키스탄과 파키스탄도 아주아주 맛있는 나라예요. 가벼운 산책이지만,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나라들이 좋아요. 주머니가 가벼운 저 같은 사람에게도요.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다면, 취향도 바뀌겠죠. 그때는 스위스 가야죠. 스타벅스 메뉴를 종류별로 시켜서 반 잔씩만 마셔야죠. 한때 영국에서 그렇게 살고 싶었던 남자는 이제 없습니다. 코로나로 모든 여행자들을 은혜롭게 거둬주고 있는 태국 정부가 갑자기 쫓아내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죠. 머물면서 아 좋다, 이런 감정이 계속 들기 쉽지 않은데, 지금 제가 그러고 있어요. 맞는 나라인 거죠. 저녁엔 뭐 먹을까요? 예산 천오백 원으로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열 곳도 넘어요. 여기가 천국 맞다니까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쓰고 싶을 때도 쓰고, 쓰기 싫을 때도 씁니다. 내 안의 욕망은 천하무적이 아니다. 내 자유를 팔고, 집중을 얻는 과정을 신비롭게 바라봐요. 그런 시간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