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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노 Jan 31. 2021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면서 살아도 돼

아무튼 하루키


스무 살 나는 어른의 삶과는 영원히 상관없을 것처럼 살았다. 내키는 대로 수업에 들어가고 매일 술을 마시면서도 지구 주위를 도는 달처럼 학교 주변을 맴돌았다. 시간은 넘치고 흘렀다. 지루하고 지루했다.



여름 내내 나와 쥐는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25미터 풀을 가득 채울 정도의 맥주를 퍼마셨고, 제이스 바의 바닥에 5센티미터는 쌓일 만큼의 땅콩 껍질을 버렸다. 그때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정도로 지루한 여름이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무라카미 하루키)



그날은 건수가 없었나 보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앉아 창 밖을 봤다. 봄날 오후 햇살이 따갑다는 생각을 하는데 내 옆자리로 낯익은 얼굴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 오뱅이었다. 오뱅은 과동기의 친구였다. “집 가?” 자연스럽게 반말을 했다. 빠른 생일도 아니면서 학교에 일찍 들어와 우리보다 두 살 어리다는 동기의 말을 떠올리는데 그가 말했다. “한강 갈래?”


공기가 어떤 질감으로 얼굴에 닿으면 어떨까 생각한 적이 있다. 바람은 존재하는 느낌이 있는데 공기는 느낌도 없이 존재한다는 게 이상했다. 그날 한강변을 걸으며 나는 몽글몽글한 공기를 느꼈다. 젤리 느낌의 공기는 오뱅과 내가 지나는 거리에 길을 내주며 뽀글뽀글 소리를 냈다. 우리 사이에 무언가 피어오르는 소리였을까. 해가 지 강 건너 번개표 빌딩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나란히 앉아 있다가 오뱅은 내게 살짝 입을 맞췄다. 나는 민망한 마음에 키스하는 법 좀 배워오라고 말했다. 오뱅은 웃기만 했다.


달달한 연애를 하면서도 '이렇게 살아가면 되나? 존재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와 '개뿔!'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그때마다 하루키는 텅 빈 마음에 부채질을 했다. '어 그래. 계속 그렇게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면서 살아도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사연이 아니라 분위기로만 존재했는데 그게 꽤 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피아트 600이 박살 나도 '자동차는 다시 돈 주고 사면되지만 행운은 돈 주고도 못 사는 거야'라든지 '책 같은 건 스파게티를 삶는 동안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한 손에 들고 읽는 거야' 같은 말을 끄덕거리며 읽었다.


2년간의 연애가 끝나고 휴학을 하고 가끔 오뱅을 생각하며 울었다. 그땐 울고 있는 내 모습을 누군가 보고 있을 때 지을 법한 표정으로 울었다. 그리고 담백하게 살아가려 했다. 쥐와 양과 우물과 미도리와 봄날의 곰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내 안에 무언가 변한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여전히 흘러넘쳤고 산뜻하지 못하게도 외로웠다.






작년 말 긴 우울을 끝내 준 건 다시 하루키였다. 정확히는 '아무튼 하루키'라는 하루키를 좋아하는 작가가 쓴 에세이였다. 그 책을 읽고 오랜만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꺼냈다.



만약 당신이 진정한 예술이나 문학을 원한다면 그리스 사람이 쓴 책을 읽으면 된다. 참다운 예술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노예 제도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예가 밭을 갈고 식사를 준비하고 배를 젓는 동안, 시민은 지중해의 태양 아래서 시작에 전념하고 수학과 씨름했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모두가 잠든 새벽 세 시에 부엌의 냉장고를 뒤지는 사람은 이 정도의 글밖에는 쓸 수 없다. 그게 바로 나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무라카미 하루키)



시간이 흘러넘치는 시기를 지나 시간을 쪼개 쓰는 삶으로 건너왔다. 가끔은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멍해진다. 가만히 앉아서 투명 인간이 바람을 일으키며 내 옆을 지나가는 느낌을 떠올려본다. 몽글몽글 피어나던 젤리 공기의 질감도 상상해 본다. 잘 되질 않는다. 회사와 육아에 지쳐 새벽 세 시에 냉장고를 뒤지는 나는 이 정도의 일기밖에 쓸 수가 없다. 노예가 내 밭을 갈아준다면 달라질까?



결국 글을 쓴다는 건 자기 요양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요양을 위한 사소한 시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무라카미 하루키)



여전히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좋다. 나도 산뜻한 인간이면 좋으련만. 하루키 주인공을 흉내 내는 정도로 사소하게 요양을 시도하면서 살아간다. 이런 사소함 모 어디로 가나. 그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산뜻하게 서 있지 않을까? "나를 쥐라고 불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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