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플렉스 들여다보기

헛소리 모으기 10. 내가 싫어하는 나

by 모두다

자기소개를 한다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타인에게 나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하면, 과연 어느 범위까지 이야기할지를 정하기가 참 곤란하다. 최근엔 TMI(Too Much Information)라는 용어가 유행할 만큼, 사람들은 자신이 관심 없어 하는 것은 듣고 싶어하진 않으니까.

이 범위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과연 내가 타인에게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는지도 고려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스스로 그런 요소가 별로 없다는 사실도 깨닫기도 한다. 결국에는 내가 싫어하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우울해진다.

자신을 사랑하라고들 말하지만, 나에겐 불가능한 과제처럼도 느껴진다. 내가 생각하기엔 나는 너무나도 단점이 많은 인간이니까.

나는 매우 많은 콤플렉스를 지닌 사람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는 콤플렉스는 꽤 넓은 범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통상적으로 특정 대상에 대해 개인이 느끼는 감정과 반응을 일컫는 단어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중학교까지만 교육과정을 거친 어느 성공한 사업가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람이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자신보다 자산이 없는 직장인들과 만났다. 그러면서 공공연한 자리에서 이렇게 떠드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대학 졸업해봤자 다 쓸모없다니까? 일머리랑 공부머리 따로 있다고, 돈 벌려면 나처럼 사업을 해야돼요! 졸업증이 뭐 밥 먹여주나?”

이 말을 꺼낸 본인을 포함, 대화를 듣는 모든 이들은 알고 있다. 그 사업가가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그 말에 선뜻 동의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다들 겉으론 “지당한 말씀이십니다.”라고 넘기지만, 속으론 이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이 인간 학력 콤플렉스 있구만.’


natalie-parham-LCn1zhTHU-g-unsplash.jpg Copyright 2019. Natalie Parham


청자들이 콤플렉스의 존재를 알아챈 것은 단순히 그 발언 자체에 문제의식을 느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상황에서 그런 말을 꺼냈느냐이다. 굳이 명문대 졸업생들 앞에서 학력을 부정하려 든다는 것에서 콤플렉스를 감지하게 된 것이다.

정말 학력에 대해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이 명문대생이라는 정보에 대해 별다른 감정이 발현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당연하게도 학력에 대해 발화할 이유도 사라진다.

사업가는 학력이라는 것에 대해 특정 감정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에 대한 반응이 외부로 표출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콤플렉스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콤플렉스는 단순히 어떤 감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복잡한 심리 작용을 통틀어 말하는 단어이다. 그러기에 ‘복잡하다’는 뜻의 Complex라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콤플렉스’라고 이름 붙여진 것들은 상당히 많다. 워낙 범용성이 높은 단어라 그런지, 위키백과¹에 등재된 목록만 해도 꽤 길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일렉트라 콤플렉스, 나폴레옹 콤플렉스, 신데렐라 콤플렉스, 피터팬 콤플렉스 등등. 참으로 많기도 하다.

그만큼 우리 인간은 다양한 것에 대해 콤플렉스를 느끼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 명문화 한 흔적이 아닐까 싶다.

아마 아무런 콤플렉스도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자라나면서 다양한 것을 접하고 자신과 세상을 견주어 보곤 하니까. 아무런 콤플렉스가 없는 사람은 갓 세상에 나온 신생아가 유일할 것이다.

앞서 밝혔듯이 나 역시 많은 콤플렉스를 지닌 사람이다. 내가 지닌 콤플렉스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신체와 관계에 대한 콤플렉스가 그것이다. 다른 부가적인 자잘한 콤플렉스도 존재하지만, 이 두 녀석은 항상 나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곤 한다.


anh-tuan-to-npF36GPLYm0-unsplash.jpg Copyright 2021. Anh Tuan To

신체 콤플렉스는 외모 콤플렉스에 가까운 종류의 것이다.

일단 나는 가 작다. 내 신장은 170cm의 키로 대한민국 남성 평균에 못 미치는 수치이다.

그래서인지 키 평균치가 오르고 있다는 기사를 접할 때마다 마음이 뜨끔해 지곤 한다. 그것이 통계에 기반을 둔 객관적인 정보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더라도, 정보를 접한 순간 심적으로 불편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도리다.

내가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다면 그러한 기사를 접하더라도 특정한 심리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저 ‘아, 그렇구나.’하고 넘기고 다른 기사를 찾아보겠지. 이러한 반응만 보아도 내가 콤플렉스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신발을 살 때도 밑창이 얇은 신발은 함부로 고르기 어렵다. 남들에겐 조금이라도 키가 커 보이고 싶으니까.


혹자는 말한다. 사람들은 남에게 별 관심이 없다고. 그러니 너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라고. 참 좋은 말씀이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마음 아니겠는가? 나도 그렇게 살면 참으로 편하겠지만, 아예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아직은 어려운 실정이다.

키라는 정량적 요소의 콤플렉스와 함께, 나에겐 정성적인 요소의 신체 콤플렉스도 있다.

어려서부터 나는 얼굴에 여드름이 많이 돋아나곤 했다. 그때마다 무턱대고 함부로 손을 댄 덕분에 아직까지도 얼굴 곳곳엔 불그스름한 흉터가 존재한다. 거울을 볼 때마다 얼굴의 다른 부위보다 흉터 부위에 먼저 눈길이 가곤 한다.

그런 흉터 관리에 좋다는 온갖 화장품을 시도해보고 피부과도 찾아가봤지만, 모든 흉터가 말끔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직도 얼굴에 남은 흉터, 그리고 새로 돋아나는 여드름을 볼 때마다 짜증이 나곤 한다.

사진을 찍을 때도 이러한 흉터가 드러나면 어쩔지를 걱정하며, 오늘날의 사진 보정기술에 감사하게 되는 건 덤이다.


이와 더불어 거울을 볼 때 내가 눈여겨보는 곳이 한 곳 더 있다. 밖에선 함부로 볼 수 없는 나름 은밀한 부위이기도 한 이마가 그 장소다.

요즘 들어 머리를 감고 나면 욕실 바닥엔 무수히 많은 머리카락이 깔려있는 걸 발견하곤 한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날이 갈수록 빠지는 머리카락 개수가 많아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일일이 세어보진 않았지만,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머리카락이 빠져나간다.

매일 그런 광경을 접하다 보니 나도 내 머리카락이 어디서 이렇게 많이 빠져나가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앞머리를 들어 이마를 보니 일자에 가까웠던 머리 라인에 조금의 둔각이 형성되어 있었다. 작은 거울을 들고 와 정수리도 비춰보니, 거기엔 새하얀 두피가 눈에 띌 정도로 큰 영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도 내가 탈모의 문턱에 발을 거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탈모약을 먹는다든가, 모발이식을 한다든가 하는 소식을 들을 땐 다른 세계 이야기만 같았다. 나에게도 그것을 수행해야 할 순간이 찾아오고 만 것이다.

다행히 피부과에선 아직 심각한 수준은 아니기에 초기 관리만 하면 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한 통에 3만 원씩 하는 약을 매달 처방받게 되었다. 그렇게 약을 먹기 시작한 것이 약 2년이 되어간다. 다른 사람들은 주거비, 통신비, 보험비 등의 고정지출만 고려할 때, 나는 굳이 먹지 않아도 건강에 지장이 없는 의료비까지도 지출하게 되었다.

거기에 더불어 집에서 거울을 볼 때마다 이마의 머리 라인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양 끝이 더 파이지는 않았는지, 눈썹과의 간격이 멀어지진 않았는지, 약의 효과로 새로 돋아난 머리카락은 없는지 등을 확인하느라 거울 앞에서 시간을 쓰곤 한다.

탈모가 생기고 나선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갈 때면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 정수리가 비어 보이진 않을까를 걱정하며 움직이게 된다. 사실 내가 그것을 걱정하든 말든 내 정수리에 남아있는 머리카락 개수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콤플렉스라는 녀석은 자꾸만 내 마음을 콕콕 찌르곤 한다. 참으로 성가시다.


신체 콤플렉스는 특히나 더욱 성가신 종류라고 생각한다. 그 신체라는 것은 언제나 내 자아와 함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완전한 무의식의 영역으로 떠나는 수면의 순간을 제외하곤, 항상 내 신체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좋든 싫든, 어쨌든 내가 수십 년을 이용해 온 내 몸을 떨쳐내는 방법은 없으니까.

대신 신체 콤플렉스는 내게 강한 감정의 요동을 주진 않는 편이다. 누군가 대놓고 내 신체 특성을 모욕하지 않는 한 그저 신경 쓰이는 정도의 콤플렉스다.

적당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한여름의 모기와도 같은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짜증 나고 성가신 존재지만 그것으로 인해 엄청난 상처를 입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내게 진정으로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반대급부의 존재다. 겉으론 드러나지 않는, 나만 알 수 있는 나의 내면에 대한 콤플렉스가 그것이다. 내가 콤플렉스를 지닌 대상은 나라는 인간이 지닌 좁은 관계성에 대한 것이다.


austin-mabe-i7x84It0L-Y-unsplash.jpg Copyright 2017. Austin Mabe

나는 인간관계에 서툴다.

친구도 적고 친구를 사귀는 법도 잘 모른다. 사회생활과 집단생활은 내가 어려워하는 일 중 하나다. 인맥이라는 것은 거의 전무하다시피하다.

주말에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건 내게 1년에 몇 번 없을 특별한 이벤트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인간의 대표적인 특성으로 꼽는다면, 어쩌면 나는 인간 실격일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나는 누군가와 친분을 쌓는다는 게 어려웠다. 초등학교 시절부터도 그랬던 것 같다. 학생들은 교실에서 하루의 몇 시간을 타인과 함께 해야만 한다. 강제로라도 인간관계를 형성해주는 이 시스템은 자연스럽게 친구를 만들도록 도와주는 효과도 있다. 많은 학생들에겐 이 시기가 가족관계보다 교우관계 제1 순위가 되는 시기이기도 할 것이다.

나 역시 학업을 통해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관계는 어디까지나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유지되었다. 오후가 되어 하교 종이 울리고 집에 도착하게 되면 더 이상 내게 친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 다시 학교에 가야만 다시 친구가 존재했다.

내가 사귄 친구는 대부분이 그 정도의 친구였다. 학교라는 울타리가 없는 한 만들 수도, 유지할 수도 없는 관계였다. 직장인에게 있어 근무시간이 공적인 영역이고 퇴근 후는 개인적 영역이듯, 학생에게도 교육시간은 공적인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친분은 공적인 영역에서의 친분에 불과했다. 개인적 영역까지도 한껏 침범하게 내어줄 수 있는 친구는 없었다.


물론 친구가 적은 게 무슨 큰 결점이 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딱히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는다고도 생각한다.

내가 나의 이러한 특성에 콤플렉스를 느끼는 건 단순히 내가 인간관계에 서툴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은 아니다. 이 서툰 인간관계로 인해 ‘평범함’의 궤도에서 벗어났다고 느끼는 것에 콤플렉스가 작용한다.

나는 여행 가는 것을 좋아한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것을 느끼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내겐 같이 여행을 가자고 제안할 만큼 친한 친구가 없기에 매번 가족여행, 패키지 여행, 그리고 나 홀로 여행만 떠날 뿐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대학교에서 연구를 위해 떠난 여행과, 전역 후 가족과 갔던 제주도 여행을 제외하곤 항상 혼자만의 여행을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혼자 가는 여행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자유로운 여행이 가능하고 언제나 마음대로 계획을 수정할 수 있다는 점에선 참으로 편하다. 하지만 그 여행 기간 동안 느끼는 감정을 공유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오늘날엔 소셜 미디어를 통해 경험을 나눌 수 있게 되었지만, 실시간으로 누군가와 함께하며 공유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직장을 다닐 땐 휴가철만 되면 이번 휴가 때 무얼 할거냐는 주제가 항상 나왔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디로 여행을 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면 누구와 같이 가느냐는 질문이 항상 뒤따라왔다.

솔직하게 혼자 갈 예정이라고 밝히는 것이 당시의 나에게는 꽤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괜히 있지도 않은 친구와 함께 간다고 둘러대곤 했다. 당연히 휴가를 갔다 온 후 보여주는 사진에 내가 찍힌 사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밖에도 나는 ‘혼자’라는 수식어가 붙은 행동도 서슴지 않고 하고는 한다. 혼영, 혼밥, 혼술 등, 대한민국 사회에선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이 ‘평범함’에 속하는 행동들도 나는 혼자 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럴 때마다 속으론 ‘혼자 밥먹고 혼자 영화 보는 게 뭐 어때서?’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행동하지만, 다른 사람에겐 괜히 친구랑 같이했다며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sherise-van-dyk-i2U4kgnOzX0-unsplash.jpg Copyright 2021. Sherise Van Dyk

불필요한 거짓말을 할 때마다 나는 항상 혼자 상처를 받는다. 애초에 친구가 있었다면 이런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냥 거짓말하지 말고 솔직하게 혼자 갔다 왔다고 말하면 곤란할 일도 아닐 텐데... 이런 류의 자책과 함께 스스로 한심하다고 느끼게 된다.

이 상처는 단순히 그 순간에만 내게 고통을 줄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내상까지 남겨버린다.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온종일 자책이 뒤따르며 우울한 기분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인간관계에 서투른 내 잘못이라는 생각에 나라는 인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극단까지 치닫기도 한다.

나도 이 모든 게 나 혼자의 궁상맞은 자기연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내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제어할 순 없다. 인간의 심리란 어쩜 이리도 성가신 걸까.



콤플렉스를 다루는 법


위에 말한 것들이 내 콤플렉스의 전부는 아니다. 자질구레한 것들도 많지만 우울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할 것 같다.

아무튼 이처럼 나는 나 스스로를 경멸하기도 하며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인생을 사는 인간이다. 그러다 보니 이 콤플렉스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하곤 했다.

갖은 심리학 서적과 기사, 블로그 글, 명언들은 우리가 콤플렉스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려주곤 한다. 많은 이들이 제시하는 해결법은 이를 극복하는 것이다. 누구나 노력을 통해 콤플렉스를 이겨내고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더욱 노력해서 채워라. 노력으로도 불가능하다면 다른 장점을 극대화해 보완해라.’ 정말 이상적인 해결방법이다.

세상만사도 이렇게 해결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제가 발생하면 노력을 통해 해결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 저 너머로 밀어둔다. 편리한 방식이지만, 안타깝게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도 세상이다.


콤플렉스를 극복한다는 것 역시 나에게는 하나의 이상처럼 보인다. 누구나 도달하기를 소망하지만 누구도 도달할 수 없기에 이상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소망 역시 이룰 수 없는 이상과도 같다.

콤플렉스는 단순히 자신이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만을 칭하는 것이 아니다. 복합적인 감정과 행동, 사고의 총체를 말하는 것이다. 콤플렉스를 이겨내기 위해 행동하는 것 자체도 콤플렉스의 일종인 셈이다.

콤플렉스를 완전히 이겨냈다고 해서, 콤플렉스가 된 대상에 대해 그 사람이 아무런 감정도 지니지 않게 될까? 사람들은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으면 코끼리를 생각하게 된다.

가령 가난한 어린 시절을 지내고 성인이 된 후 부자가 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가 죽는 그 날까지 부유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 자체가 그 사람에게서 영원히 사라질 순 없다. 제 아무리 그 시절이 싫다고 할지라도 그 과거 자체를 도려내 어딘가에 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가 지닌 ‘빈곤이 싫고 부유한 것이 좋다.’라는 생각 자체도 콤플렉스의 산물이다.


brock-wegner-h0mKpP_DvWE-unsplash.jpg Copyright 2021. Brock Wegner


내겐 콤플렉스를 이겨낸다는 것 자체가 허상과도 같이 보인다. 자신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상태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그 대상에 대한 관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콤플렉스란 그 관념마저도 통칭하는 것이니까. 더 이상은 그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일은 없겠지만 콤플렉스는 계속해서 남게 될 것이다.

어찌보면 우리는 콤플렉스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콤플렉스라는 존재와 그로 인해 느끼는 감정을 완전히 동일시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을 불순물로 여기기 때문에, 이 불순물이 사라져야만 자신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콤플렉스를 없애겠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관념 자체를 없애야 가능하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 그것은 불가능한 일과도 같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어떠한 환경과 상태에 놓이게 되더라도 콤플렉스를 지닐 수밖에 없는 존재다. 사람에게 있어 콤플렉스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콤플렉스는 그 자체가 자아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싫더라도 매 순간 마주하고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

때문에 콤플렉스를 떨쳐내고 격리시킨다는 발상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콤플렉스를 극복해서 없애기보단 그것에 직면하고 이해해야만 한다. 왜 나는 이것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가? 왜 나는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인가? 왜 나는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인가? 우리는 이를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콤플렉스 자체를 나쁜 것으로 몰아세우는 데 바쁘다.

인간은 언제나 다양한 감정에 직면하게 된다.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다. 누구나 기쁜 것을 좋아하지만, 영영 슬픔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감정과 함께해야만 한다. 슬픔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끼며 밀어내려 노력하더라도, 그것은 이뤄질 수 없는 이상이다.

나도 예전에는 내 감정을 도려내려 했었다. 내가 싫어하는 나 자신을 이렇게 상세하게 기술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항상 그러한 나의 모습을 어딘가 구석에 몰래 처박아두고 영영 잊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물론 아직도 나는 내가 지닌 콤플렉스에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 아마 그러한 나 자신마저 사랑하는 것은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부정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jeffrey-grospe-xYluF5vCsHY-unsplash.jpg Copyright 2021. Jeffrey Grospe




그러기에 나도 내 콤플렉스와 직면하기로 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글이다. 쓰기 전에는 콤플렉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우울해지고는 했다. 하지만 이 글을 끝마쳐가는 지금은 약간 감상이 달라졌다. 물론 내 콤플렉스들이 사랑스러워 졌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콤플렉스를 이겨낸 것도 아니다. 아직도 내 못난 부분들이 성가시니까.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그것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된 느낌이 든다. 머리 속에 난잡하게 떠돌아 다니던 개념들이, 글로 정리해보니 명확히 드러나는 것 같다. 무언가를 마주한다는 것이 이런 것과도 같다는 막연한 생각도 든다.

물론 이 콤플렉스들을 마주하는 것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은 조금이나마 홀가분하다.




각주

¹. https://en.wikipedia.org/wiki/Complex_(psych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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