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소리 모으기 7. 인류의 꿈, 영생
다른 이와 대화를 하다 보면 나를 당황하게 하는 질문들이 있다. 대답하기가 어려워서가 아닌, 대답하면 피곤해지기 때문에 답하기 싫은 질문이 그 중 하나이다. 나에겐 다음의 질문이 특히 그러하다
“너는 꿈같은 거 있어?”
있다마다. 이 ‘꿈’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에겐 장래희망일 수도 있고, 달성하고 싶은 목표일 수도 있고, 평생 이루고자 하는 소원일 수도 있다.
무슨 의미가 되었든 간에 나는 오랫동안 하나의 꿈을 품어왔다.
영원히 사는 것이 바로 그 꿈이다.
영원히 사는 것.
이건 아마 우주에서 가장 오래된 소원일 것이다. 이 지구에 생물이라는 것이 탄생한 이래, 모든 생명체는 생존과 번식이라는 원초적 목표를 위해 살아왔다. 그 생명의 형태와는 상관없이 모두에게 공통된 사항이었다. 그리고 이들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더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는 것이다.
여기엔 그 어떠한 예외도 없다. 모든 생명은 필연적으로 죽는다. 마치 어떤 거대한 힘이 작용하는 것과도 같은 이 현상은 생명뿐만이 아닌, 그 생명이 살아가는 행성에도 적용되는 법칙이다.
과학은 우리의 지구도 몇십억 년 후면 죽게 된다고 추측하고 있다. 태양이 내부의 수소를 모두 소진하게 되면 적색거성으로 성장, 지구는 적색거성에 흡수되며 사라지게 될 것이다. 설사 태양의 재앙이 피해 간다고 해도 먼 미래에는 우주 자체가 소멸할 가능성도 매우 높다. 어찌됐든 이 지구도 죽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언젠가 반드시 죽게 된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비단 인간뿐만이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내가 이 당연한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죽음’이라는 개념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때도 주변에서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TV에선 ‘n명 사망’과 같은 뉴스를 매일 접했고, 실제로 장례식에 참여한 경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정규 교육과정에서도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려준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내가 죽음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열역학에 대한 교양과학도서를 읽으면서였다. 물론 그거 하나 읽는다고 해서 열역학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나는 지금도 열역학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열역학 법칙이 가리키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이 우주의 모든 것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내가 급격한 변화를 겪은 것은 아니다.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다거나, 마음가짐이 달라졌다거나, 세상을 보는 시각이 변했다는 등 인생에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것을 알고 나서도 어느 정도는 무덤덤했다. 마치 호주의 수도가 시드니가 아닌 캔버라라는 것을 알았을 때처럼, 그저 ‘그렇구나~’하는 감상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은 내 마음속엔 깊숙한 쐐기를 남겼다. 단 하나의 의문이 계속해서 내 신경을 건드리곤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이 질문에 사로잡혀 버렸다.
‘인간은 왜 죽어야 하는 거지?’
지금에선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 당시의 내겐 모든 것이 죽는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시의 내가 무덤덤했던 것도 죽음이 필연적이라는 개념이 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그랬던 것도 같다.
그 후로 죽음은 나를 괴롭히는 가장 큰 문제로 자리 잡았다. 그것도 어느 대학교를 가느냐, 무슨 과목의 점수를 올리느냐, 학과는 무엇으로 정하느냐가 인생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했던 고등학생 시기에 말이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누군가 죽는다는 것은 당연히 슬픈 일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에겐 애통함보다도 무력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떠올랐다. 나도 저렇게 죽을 수도 있겠지.
아마 그때부터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 것 같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 나는 그 정도가 조금은 심했던 것 같다. 내가 남들보다 유독 더 죽음에 공포를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내 소원을 말할 때였다.
“너는 꿈 같은 거 있어?”
이 질문에 나는 항상 이렇게 대답한다. 영원히 살고 싶다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내가 참 이상하다는 듯이 반응하곤 했다. 왜 영원히 살고 싶냐는 질문부터, 그렇게 살면 지겨울 것 같다, 나는 짧고 굵게 살고 싶다, 다른 사람들은 어떡하냐는 등, 내 소원에 대한 다양한 평가들을 마주해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죽는 게 너무나도 싫은 것을. 죽지 않기 위해선 영원히 사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 소원은 영원히 사는 것이다.
나도 언젠간 내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스스로 물어보곤 했다. 모든 생물의 본능이니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답은 딱히 내게 납득될만한 답이 되지 못했다. 이를 알기 위해 나는 우선 죽음이란 무엇인지부터 명확히 하고 넘어가야만 했다.
오늘날 통용되는 죽음의 정의는 생명체의 생명 활동이 영구히 정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구히’라는 단어이다. 영구적이라는 것은 곧 불변하며 비가역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즉 한번 죽음을 맞이한 생명체는 두 번 다시 그 생명 활동을 재개할 수 없다. 머나먼 과거부터 인류가 부활을 기적이라고 표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생명 활동이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의 정의가 있겠지만, 나는 이를 의식 또는 생체 기능의 작동으로 정의하고 싶다. 일상 속에서 24시간 동안 나는 언제나 생명 활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 생명 활동을 통해 나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하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내게 감정을 선사해준다.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다양하다. 어떤 것은 긍정적인 감정이라 평가받기도 하고, 어떤 것은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목록을 일일이 적진 않겠지만, 나도 지금껏 살아오며 이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갖가지 감정들을 느껴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것이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나는 내가 감정을 느끼는 그 순간들이 강렬하면서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를 통해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감정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기에 나는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상태를 선호하지 않는다. 죽음은 모든 인간을 이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도 절대로 되돌아갈 수 없이, 영구히 말이다.
물론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거나, 영혼이 존재하여 죽은 후엔 영혼 상태로 남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와 반대로 죽음 뒤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내가 바로 이러한 사람이다.
물론 아직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았기에 섣부른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나도 ‘죽은 후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진 않는다. (나는 불가지론자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관찰된 사실에 따르면 죽음 후엔 영원한 무(無)만이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죽은 후의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내가 수십 년간 쌓아온 모든 생각과 기억과 감정도 영원히 이 세계에서 사라지고 만다. 나는 이것보다 더 끔찍한 일을 상상해 낼 수 없다. 내 지난 인생의 모든 것이 고작 죽음이라는 것에 소멸하고 만다니,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리고 이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이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죽음을 절대 피해 갈 수 없다는 운명이 너무나도 공포스럽다. 나는 이 세상에 이보다도 더 잔인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가끔 농담으로 귀신이 실존하면 좋겠다고 말하곤 한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럴 때마다 몸서리친다. 하지만 나는 귀신은 어느 정도 운이 좋은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죽은 이후에도 의식을 유지하면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니, 이만한 축복이 또 있을까?
한번은 영화 속에 죽은 이후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는 영혼들이 나온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영화를 보며 나는 내심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그래도 죽은 후 소멸하는 것보다는 낫겠는데?’라고 저울질을 하기도 했다.
물론 고통이라는 것은 실제로 겪어보기 전까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특수성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나는 그 정도로 귀신과 영혼의 존재를 선망하고 있다. 정말로 귀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죽음에 대한 나의 공포심도 어느 정도는 줄어들지 않을까?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면, 나는 내 꿈을 솔직하게 밝히는 것이 사회적으론 꽤나 바람직하진 않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처음엔 나도 이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영원히 살고 싶다는 게 뭐 그렇게 특별한 소망인가? 영생을 바라는 것은 인류 사상 가장 오래된 소원이지 않은가?
가장 오래된 문학은 무엇일까?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조사에 따지면,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길가메시 서사시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밝혀졌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오늘날 이라크가 자리한 지역에 존재했었던 우르크(Uruk)라는 도시의 왕인 길가메시(Gilgamesh)에 대한 설화로, 약 기원전 2000년~1200년경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영웅서사시와 같은 이 이야기는 후반부엔 영생을 찾아 나서는 길가메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친구의 죽음을 보고 슬픔과 공포를 느낀 길가메시는 죽음을 이겨낼 방법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위대한 왕이었던 길가메시도 결국 죽음은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이야기가 끝나게 된다.
이 길가메시를 시작으로 영생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나타났다. 불로의 약이라며 수은을 섭취했다고 알려진 중국의 시황제(嘉靖帝)와 가정제(始皇帝), 신의 은총으로 영생을 얻은 그리스신화 속의 티토노스(Τιθωνός), 신에게 영생을 선사해주는 사과를 가진 북유럽신화의 이둔(Iðunn), 힌두 경전 속 생명의 물약으로 나오는 암리타(अمृت), 연금술의 전설과도 같은 현자의 돌(Philosopher's stone), 일본 설화에서 젊어지는 물을 관장하는 츠쿠요미(月読命) 등, 인류는 영생을 추구하며 죽음을 멀리하고자 했다.
이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쿠마에 무녀에 관한 전승이다.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쿠마에(Cumae)에서 아폴론 신은 모시는 무녀에 관한 이야기로, 이 무녀는 아폴론 신의 사랑을 받아 딱 하나의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한 줌의 모래를 손에 쥐며, “이만큼의 생명을 내게 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못해도 몇천 년의 수명을 보장받은 것이다.
하지만 무녀가 깜빡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만큼의 젊음은 요구하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무녀는 수없이 많은 세월 동안 살아갈 수 있었지만, 날이 갈수록 늙어가는 몸은 점차 쪼그라들었다. 항아리 속에 살아간 무녀는 최후에는 자신의 목소리만을 이 세계에 남기게 되었다. 미국의 시인 T.S 엘리엇(T.S. Eliot, 1888~ 1965)이 ‘황무지’(The Waste land)에 쓴 '한 줌 먼지만큼의 공포를 보여주마.’(I will show you fear in a handful of dust)라는 구절은 이 무녀가 느낀 공포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젊음 없는 영생은 저주다. 쿠마에 무녀의 이야기는 이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그처럼 우리의 선조는 자신의 노화에 대해서도 공포를 느껴왔다. 이 공포의 기저에는 나이를 먹으며 변화하는 신체를 통한 체감도 있겠지만, 점차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실감도 존재할 것이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인류는 과거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이 공포를 느끼는 죽음에 대비하기 위하여, 각 문화권은 고유의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을 발전시켜왔다. 많은 설화와 신화, 심지어 종교까지 모두 죽은 후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에 관해 나름의 철학을 갖고 공동체원과 공유하고자 했다. 이는 불가해한 죽음의 영역을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가 표상된 것과도 같이 보인다.
이처럼 인간은 오랜 기간동안 죽음을 두려워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영원히 살고 싶다는 나의 소원은 딱히 유별난 것도 아닌 셈이다. 이것은 인류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한 최초의 순간 이후,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소원이다.
그렇다면 영생이라는 나의 꿈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꿈이 너무 허황된 것이라서, 아니면 그들의 질문에 부합하지 않은 답변이라서, 혹은 내 대답이 죽음이 두렵다는 그들의 잠재의식을 일깨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영생은 너무 거창한 꿈이기도 하다. 몇억 년이란 지구의 역사 동안도 진정한 영생을 이룬 생명체가 나타나지 못했는데, 어떻게 일개 인간인 내가 이뤄낼 수 있겠는가?
최근에는 기술 발전을 통해 영생을 추구하는 이들도 나타나고 있다. 특이점주의자(Singularitarians)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가까운 미래에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는 기술발전으로 인간 수명이 대폭 늘어나는 순간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사람마다 예측치에는 차이가 있지만, 대략 2050년을 전후로 그 순간이 오리라는 것이 주류 의견이라고 한다.
나도 하루빨리 그런 순간이 왔으면 좋겠다만, 그 전에 내가 살아가는 사회에 위기가 먼저 찾아올 것 같다는 내 불안감이 이 기대감을 상회하고 있다. 그리고 사고사와 병사에 대한 불안 역시 내가 낙관적인 예측을 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붙잡는 존재다.
정말로 지니와 만나 소원을 빌 수 있는 순간에 대비하기 위해(그럴 일은 절대 없으리라는 것은 알면서도.), 나는 가끔 내가 바라는 불로불사란 무엇이고 어떻게 소원을 빌어야 할지를 상상하곤 한다. 소원은 신중히 빌라는 오랜 격언이 있듯이, 잘못된 소원을 빌었다간 쿠마에 무녀처럼 죽지도 못해 살아가는 신세가 되어버릴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순간을 기다리기보단, 지금 당장에 내 소원을 이룰 현실적인 방법을 실행해야 할지도 모른다. 건강 관리? 자산 저축? 기술 공부? 많은 것이 있겠다만 내 생각엔 가장 쉬운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지금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 날 한국인의 기대수명이 80년이라고 계산했을 때,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불과 4,204만 8천 분 밖에 되지 않는다. 1분이라는 게 일상에서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 지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짧은 시간이다.
그리고 이 시간은 절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내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만 간다. 우리는 매 순간 이 시간을 소비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실시간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운명을, 생명체로 태어난 이상은 감내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인간은 이 흘러가는 시간에 충실해야만 한다. 우리가 무얼 하든 시간은 낭비되는 자원이다. 무엇이 되든 간에 그 순간을 충실하게 보내는 것. 물론 이것으로 영생을 누릴 수는 없다. 하지만 죽음은 그나마 늦출 수 있을 것이다.
Memento Mori.
라틴어 격언으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굳이 죽음을 기억하라고 되뇌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대 로마인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도.
결국에는 죽는다면, 대체 우리가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로마인들은 그것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죽음의 존재를 계속해서 상기시켜 주었다.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당신은 언젠가 죽는 존재다. 그러니 지금을 소중히 여겨라. 절대로 돌아오지 못할 지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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