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소리 모으기 6. 우리의 습관들 - 3
인간은 동물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명제에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을 다른 동물과는 분리하여 생각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이 지닐 수 없는, 논리와 이성이라는 지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에서 말이다.
이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내가 지금 메쉬 소재의 편안한 의자에 앉아 키보드를 이용해 전자 기록매체에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것도, 인간의 지능으로 만든 현대 문물 덕분이니까. 동물과는 차별되는 이 요소로 인해 우리는 문명과 사회라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종종 우리를 착각 속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인간은 전적으로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착각으로 말이다.
논리와 이성은 분명 중요한 요소이다. 이것이 없다면 언어와 수학, 과학, 그 외에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것들이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의 문명이 논리와 이성을 기반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영향 덕분일지 현대사회에서 논리와 이성이 지니는 위상은 어마어마하다.
많은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자식에게 논리력을 키워주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갖가지 학습지와 놀이교육, 학원과 전문 상담 등 어려서부터 논리력을 단련시켜주는 것이 한 사람의 인생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교육 업계의 마케팅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이 ‘논리’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하나의 특성을 넘어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시되어야 하는 덕목처럼도 여겨진다.
우리의 일상 역시 이 논리와 이성이라는 것에 매우 높은 비중을 할당한다. 마치 무언가를 천칭에 두고 잰다면, 반대편에 무엇을 올려놓더라도 논리를 올려둔 쪽으로 기우는 것처럼. 논리가 마치 모든 것을 압도한다는 듯한 느낌이다.
우리는 사소한 논쟁을 할 때에도 ‘논리’를 매우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논리적으로~’, ‘논리가 없다.’라는 말이 지니는 파괴력은 핵무기와도 비견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 논리라는 것만 있으면 무엇이든 정당화되고 완전무결한 것처럼도 느껴진다.
나는 이 현상을 보며 종종 논리와 이성이 추앙받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곤 했다. 과거의 인간이 신(God, 神)을 모든 것의 척도로 삼았다면, 오늘날의 인간은 논리를 모든 것의 척도로 삼는다는 감상까지 받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비논리적인 것은 천대받고 악덕으로 취급받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논리가 모든 것을 정당화시켜주듯, 감정적이라는 말은 매우 부정적인 단어가 되어버렸다. 오늘날 우리가 감정적인 판단은 무조건 지양하는 습관을 지니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인간은 논리와 이성만으로 행동하는 동물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가 도외시하는 감정과 감성에 더 이끌리곤 한다. 우리는 의사결정을 내릴 때 논리보다는 감정에 더 큰 지배를 받는다. 더 나아가 감정에 의한 의사결정이 더 유리한 결과를 낳는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인간의 뇌에는 복내측 전전두피질(ventromedial prefrontal cortex)이라는 영역이 있다. 해당 영역은 우리의 뇌에서 감정과 공감과 같은, ‘논리’와는 조금 거리가 먼 듯이 느껴지는 기능을 관장한다. 이 영역이 손상된 환자들은 충동적이고 반사회적인 행동을 저지르는 등 도덕적 판단력이 결여되는 특징도 보인다. 그리고 자신에게 유리하고 불리한 결과를 판단하지 못해 의사결정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도 환자들이 보이는 특징 중 하나이다. 그들은 지금 당장의 이익을 선택하지, 미래에 돌려받을 이익은 고려하지 않는 판단을 내리곤 한다.¹
뇌과학에선 이 현상의 이유로 해당 영역의 손상이 미래에 대한 인지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본다. 언뜻 생각해봐선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미래를 고려하기 위해선 매우 고등한 지적 능력이 필요하지 않은가? 이에 필요한 것은 논리적 능력이며 감정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이는 외부요인을 고려하지 못한 생각이다. 감정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공감과 도덕성은, 사회환경에서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자신의 행동이 외부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다시 자신에게 어떠한 변수로 작용할지 계산하는 데에는, ‘감정’이 더 큰 역할을 하는 셈이다. 실제 실험에서 사람들은 먼 미래에 일어날 결과를 예측할 때 이 복내측 전전두피질을 활성화시켜 의사결정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리의 논리를 담당해주는 뇌 스스로도 인간에게 감정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인간은 이 상호작용에 특히나 특화된 생물이기도 하다. 1000년도 넘은 역사를 지닌 바둑과 체스, 장기와 같은 마인드 스포츠는 이러한 계산을 요구하는 대표적인 게임이다. 몇 수 앞의 상대방의 수를 예측하고 그에 맞춰 전략을 짜야 승리할 수 있는 게임에선 한 번의 의사결정이 매우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순간의 직관과 멘탈 유지는 게임 플레이어에게 있어 없어선 안 될 요소이다. 이러한 게임들이 각 문화권마다 발달하여 하나의 직업으로 발전한 것도 이를 입증해주는 바이기도 하다.
그와 동시에 우리 인간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자 하는 데 부단히 노력해왔다. 철학, 신학, 정치학, 경제학, 법학, 사회학, 경영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가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들이지 않은가? 복잡한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반응을 예측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 과거부터 존재해 온 데에는 분명 무언가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히 논리와 이성만으로 움직이는 생물이 아니다.
이를 알기 위해선 실증적인 사료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어쩌면 머나먼 과거 문명시대에서부터 일지도 모른다. 문명과 사회라는 것도 논리를 기반으로 쌓아 올려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논리를 최우선으로 여기게 된 것에는 어느 정도의 시대상이 반영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합리주의와 계몽주의가 꽃피고 시민사회가 출현하며 산업혁명으로 사회가 눈부시게 발전한 시기, 그때의 인류는 논리와 이성이 피워낸 불빛에 눈이 뜨였을 것이다. 근대(Modern)가 태동한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근대에 들어서며 인류가 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변화가 생겼다. 몇 세기 동안 이어져 왔던 신학적 논리에서 벗어나, 철저한 계산에 따른 자연법칙의 논리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의 한 극에서 반대편 극까지, 개발하고 정복하고 이성의 빛으로 밝혀내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이자 ‘운명’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도 재정의를 해야만 했다.
‘현재의 인류는 과거의 무지몽매하고 비논리적이며 미신적인 인간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이다.’
이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 정체성을 기반으로 제국주의는 합리화되었다.
‘논리적이며 이성적인 우리는 그러지 못한 집단보다 우수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 우리의 지배는 무지한 이들을 더 나은 길로 이끌어준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다.’
이러한 주장으로 식민지의 존재가 인정되는 것을 넘어 오히려 장려되던 시기였다. 그들에겐 이 시대가 멋진 신세계였다.
그렇게 근대성은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철저한 논리와 이성을 기반으로 한 근대성은 좋은 것으로 여겨졌다. 근대화를 거친 모든 사회에서 논리와 이성은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다. 가히 근대 이전 신의 그것과 비견될 정도로 말이다. 깊이 뿌리 박힌 이러한 사상은 근대에서 출발한 현대까지도 내려왔을 것이다.
인간이 감정적인 동물이라는 것도 알겠다. 논리를 중요시하는 풍조가 사회적 영향이 있다는 것도 알겠다. 그렇다면 이게 뭐가 문제지? 우리가 그러하지 않은 동물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사고하면 안 된다는 것인가?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논리적이 되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당한 말씀이다. 우리가 논리를 추구하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그것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반지성주의에 더 가까울 테니까. 진짜 문제는 논리의 영역을 구분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논리적이지 않은 영역에도 논리를 요구하고는 한다. 대표적인 것이 감정의 영역이다.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을 자신에게 이해시켜 줄 것을 요구한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기쁨과 슬픔, 그 외 각가지 감정들을 우리는 매일 느끼며 살아간다. 이 감정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떠올려보자. 나 같은 경우는 빵을 좋아한다. 그리고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걸 왜 좋아해?”
음… 참 난감하다. 빵의 냄새, 부드러운 식감, 혀에 감도는 맛, 포만감 등. 내가 빵을 좋아하는 요소에 대해선 어느 정도 설명할 순 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이유, 즉 ‘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나로선 말문이 막힌 채 끙끙대다가 너털웃음과 함께 “그냥 맛있어.”라고 대답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이처럼 어느 한 개인의 감정은 논리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를 원한다. 그것도 자신이 아닌 타인의 것을 말이다. “왜 좋아?”, “왜 싫어?”, “왜 웃어?”, “왜 울어?” 등, 우리는 일상 속에서 “왜”라는 단어를 수도 없이 사용한다.
최근 내가 가장 많은 “왜”를 들은 것은 어느 한 판다에 관한 이슈였다. 그 판다의 이름은 푸바오, 에버랜드 동물원에서 사육된 한 마리의 판다였다. 이 판다는 지난 4월 3일 대한민국을 떠나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이 일련의 사건에서 사람들은 많은 감정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이 감정을 자신들에게 이해시켜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나로선 이 광경이 여러모로 인상 깊었다. 일단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감정을 보여준다는 것에 놀랐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감정에 논리를 개입시키려 하는 것에 더 놀랐다. 타인의 감정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감정을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어떻게 모든 사람의 감정이 똑같을 수 있겠는가? 나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커피의 쓴맛을 좋아하지 않고 카페인에도 민감해 잘 마시지 못한다. 다른 누군가는 커피를 좋아한다. 그들은 커피의 쓴맛을 좋아하고 카페인 반응을 선호할 것이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커피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가서 “그걸 왜 좋아해? 커피 마시는 게 이해 안 돼.” 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아마 이러는 내가 더 이해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들에겐 나를 이해시켜야 할 의무가 없다.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커피애호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다. 내가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물리현상은 굳건히 실존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마치 그러한 것처럼 행동하곤 한다. 그들에겐 타인의 감정을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큰 문제인 모양이다.
이러한 행태는 오늘날의 정보화 사회에서 더 자주 접하곤 한다. 유행과 트렌드가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떠오른 지금, 매일같이 새로운 유행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그리고 매번 그런 유행에 대한 반응도 뒤따라온다. 어떤 이는 그 유행에 기꺼이 참여하지만 어떤 이는 그러지 않는다. 심지어 그 유행에 매우 거세게 반발하기도 한다.
“이런 게 왜 유행인지 모르겠다.”
어딜 가나 쉽게 볼 수 있는 이 짧은 문장이 단순한 불평으로 들리진 않는다. 단순한 몰이해를 넘어 적개심으로까지 이어지는 모습은 논리적이라기보단 감정적인 반응에 가까워 보인다. 그 유행이 자신의 삶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이라도 미치는 것일까?
무언가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우린 두 가지의 선택지를 가질 수 있다. 첫째, 그것을 이해하지 않은 채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 둘째,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내가 보기엔 위의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은 이 두 선택지를 모두 거부하는 것 같다. 누군가 이해시켜주려고 설명을 해도 그들은 그것을 또 다른 언쟁의 여지로 삼아버리곤 하니까.
이들이 저지르는 실수는 자신이 논리적 사고를 기반으로 그러한 행동을 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정말로 논리적 사고를 지녔다면 타인에게 자신을 납득시키라고 큰소리를 칠 이유도 없다. 애초에 선호라는 것은 감정적 반응에 불과한데, 그것을 논리로 납득하려고 하는 태도부터 비논리적이기도 하다. 이분법으로 나눠본다면 이는 논리보다 감정적인 반응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감정과 논리를 쉽게 혼동하곤 한다. 감정에 의한 반응을 자신은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도달한 반응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농담이 왜 재밌는 건지 설명하는 것만큼 재미없는 행동은 없다.
왜 인간은 이런 오류를 쉽게 저지르는 것일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나는 논리를 추앙하는 우리의 습성도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매우 수치스럽고 나쁜 것으로 여기곤 한다.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감정을 숨기고 이성적, 논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풍조는 감정에 대한 우리의 인식 자체에도 어느 정도는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자신이 기쁘다면 그저 기쁜 것이다. 슬프다면 슬픈 것이고 화난다면 화가 났을 뿐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우리는 이러한 자신의 감정에 갖가지 이유와 변명을 늘어놓곤 한다. 프로그래밍 된 기계처럼 자신의 감정도 어떤 인과에 의해 도출된 결과라는 것을 굳이 설명하려 든다. 정직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 풍조와 달리, 우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다.
나는 모든 것을 감정적으로 대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분명히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는 것도 우리에겐 필요하다. 논리와 이성이 우리 사회를 만들었듯이, 인간에게 논리와 이성은 없어선 안 될 요소다.
하지만 굳이 감정 자체를 부정적으로 여기고, 나와 타인에게 만사에 논리적일 것을 요구하고, 감정과 논리라는 서로 다른 영역을 혼동할 필요도 없다. 인간이, 그리고 스스로가 논리적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각주
¹. Boes AD et al., "Behavioral effects of congenital ventromedial prefrontal cortex malformation", BioMed Central Ltd,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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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2016. Dmitry Ratush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