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는다는 슬픔

헛소리 모으기 9. 시간과 함께 변하다

by 모두다

2024년의 절반이 벌써 지나가 버렸다. 보신각 종소리를 듣느라 자정에도 자지 않고 기다리던 게 불과 두 달 전 일만도 같다. 그땐 밖이 몹시 추워 꽁꽁 싸매고 외출했어야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벗고 다녀도 모자랄 판이다.

대체 언제 이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갔지?

새해 첫날 세운 올해의 목표는 아직도 달성된 것이 없다. 진전도 매우 더디다. 그럼에도 올해는 벌써 반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 반이 지나가면 나는 또 다시 한 살을 먹고 또 다른 새해목표를 세우고 있을 것이다.

너무 빨리 흘러가는 시간은 언제나 아쉽다. 특히 요즘 들어서는 그런 감정이 과거보다도 더 거대해진 듯한 느낌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시간감각이 더 예민해지는 것도 같다.

어릴 땐 소풍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듯 빨리 내일이 오기를 바랐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일이 오는 것이 한편으론 두렵기도 하다.




가끔은 내가 차고 있는 시계의 시침이 날이 갈수록 더 빨리 도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것을 뇌로는 알지만, 심적으론 채 10시간도 되지 않는 것 같다. 창밖을 보니 바깥도 벌써 깜깜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 몸은 매일 3300억 개의 세포가 소멸하고 생성된다고 한다.¹ 물리적인 의미에서도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는 다르다. 그리고 텔로미어라고 불리는 염기서열이 점점 짧아지며 ‘노화’라는 것이 찾아오게 된다. 이 노화의 종착지엔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존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매일 늙어간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체감이 나를 두렵게 만든다.



늙음을 알다


matt-bennett-78hTqvjYMS4-unsplash.jpg Copyright 2017. Matt Bennett

사람은 늙는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인류의 역사상 그러지 않은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실은 자아라는 게 형성되고 언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어린아이의 시기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특히 대한민국의 경우 특유의 문화로 인해 ‘나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생의 어린 시기부터 형성된다. 나만 하더라도 갓 말을 때자마자 존댓말과 높임말에 대해 교육받았으니 말이다. 새해가 되면 떡국을 먹음으로써 자신의 나이가 변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게 일종의 관례로도 자리 잡았다.

그런 어린 시절의 나는 이상하게도 늙는 것에 대한 이상한 선망 같은 것을 품고 있었다. 빨리 한 살 더 먹고 싶고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정규 교육과정에서 상위 기관으로 진학하거나, 같은 기관에서 ‘선배’라는 위치에 서게 되면 왠지 모르게 뿌듯함까지도 느껴졌다. 그 위치에 서기 위해 내가 한 거라곤 삶을 유지하는 것밖에 없음에도 말이다.

그때의 나는 “지금이 좋을 때”라는 어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참나, 매일 학교에서 배우고도 싶지 않은 공부나 하고 밤까지 학원에 다니며, 시험 성적 앞에선 벌벌 떠는 삶이 뭐가 좋다고? 어리다는 소리 듣는 거에 일종의 억하심정까지도 느껴지는 시기였다.

하지만 이제와선 그들이 말했던 ‘좋을 때’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다. 나도 가끔 어린 학생들을 보면서 ‘좋을 때’라고 생각하곤 하니까. 어릴 때 내가 싫어하던 행동을 지금 와선 내가 직접 하고 있는 꼴이라니.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나는 어릴 때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나이 먹는 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온 신경이 나이 먹는 것에 쏠리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기론 이렇게 변화하게 된 순간은 아마 20대 중반부터였을 것이다.

때는 내가 한창 군 전역을 한 직후였다. 나는 남들보다 조금 늦게 입대를 했다. 대학교 1학년 과정을 마치고 입대하는 것이 통상적이었는데, 나는 3학년 1학기까지 재학하고 입대를 했으니 말이다. 연수로만 따져도 다른 이들에 비해 약 2년 정도 늦은 셈이다.

그러다보니 전역 역시 다른 사람들보다 늦어지게 되었다. 전역하고 나니 내 나이는 벌써 20대 중반이 되어있었다. 내가 나이를 더욱 신경 쓰게 된 건 단순히 이 숫자가 늘어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군대라는 하나의 통과의례를 치렀다는 것이 나의 신경을 곤두세워주었다. 인생에 있어 큰 짐을 하나 덜긴 했지만, 어찌 생각해보면 두 번 다신 돌아갈 수 없는 시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때부턴 더 이상 내가 ‘젊음’에 속하지 못한다고 생각되었다. 흔히들 ‘군대 갔다 오면 아저씨’라고 하던데, 실제로 갔다 와 보니 아저씨라고 불려도 부족하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대학교를 졸업할 준비도 해야만 했으니, 내가 늙어간다는 걸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초, 중,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참 이상했다. 물론 그때도 졸업이 아쉽기는 했으나 다가올 새로운 학교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뜬 기분이 더 우선되었다.

하지만 대학교를 졸업하자 아쉬움과 함께 우울감도 몰려왔다. 분명 내가 봐왔던 대학교 졸업식은 하하 호호 웃으며 학사모와 꽃다발을 던지는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지는 행사였는데 말이다. 실제로 졸업식에 참가하니 부정적인 감정들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 후 회사에 들어가니 나는 다시 막내가 되었다. 30~40대가 주가 된 사내 환경에서 나같은 초년생은 젊은 축에 속했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나를 보면 “좋을 때다.”라는 말을 하고는 했다. 이제는 나도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선 나보다도 더 좋을 때를 즐기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로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신분이었던 대학생들부터, 미성년자로 분류되는 청소년과 어린이들까지. 나보다도 더 젊은 그들이 너무나도 부러웠고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슨 대가를 치러서든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javier-allegue-barros-C7B-ExXpOIE-unsplash.jpg Copyright 2018. Javier Allegue Barros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의 교육과정은 총합 16년이다. 각자의 차이는 있겠지만 직장인이 퇴직하기까지의 근속기간은 약 30~40년.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은데 지나간 날들을 되돌아보게 되다니. 내가 해야 할 건 지금까지의 삶을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 아닌가?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게 되지 않았다.

나는 아는 것과 그것을 납득하는 것은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제아무리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도, 그것이 납득되지 않는다면 그 논리에 따르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의 경우도 그러하다. 늙었다는 소리를 입에 담기엔 20대 후반밖에 되지 않는 나이란 것을 알지만, 나는 내가 아직은 젊다는 실감이 없다. 앞으로 살 날이 더 많다는 것을 알지만, 자꾸 이미 지나간 시간만 바라보게 된다.


steven-lelham-atSaEOeE8Nk-unsplash.jpg Copyright 2017. Steven Lelham


최근들어 내가 자신의 노화에 더 신경 쓰게 된 데에는 하나의 계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내 신체가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 것이다. 특히 최근 들어 운동을 하다 보면 그 변화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가장 직접적으로 느끼는 것은 심폐지구력의 변화였다. 이전에는 달리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몇백 미터쯤은 달리고 나서도 금방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호흡을 회복하는 데 더 오래 걸리게 되었고 심신으로 느끼는 피로감도 더해졌다. 그러다 보니 달리기 전에 괜스레 겁을 먹게도 되었다. 달린 후 내 폐가 느낄 고통과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듯한 그 기분을 미리 예상할 수 있으니까.

심폐지구력과 함께 내 신체의 회복도 한층 더뎌졌다. 어디를 다쳐도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나면 증상이 가셨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몇 날 며칠을 조심해야 겨우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다 염증의 발생주기도 잦아졌고 이전부터 달고 살던 요통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져만 갔다. 스스로도 몸이 낡아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가장 슬픈 것은 나 스스로가 이것을 자각한다는 사실이다. 시와 때를 막론하고 매일을 함께하는 나의 신체이지 않은가? 아무리 눈을 돌리고 싶어도 눈 돌릴 곳조차도 없는 것이 나의 몸이다.

남들은 한창이라고 말하는 나이인 20대지만, 그 나이에 벌써 노화를 느낀다면 앞으론 얼마나 더 많은 노화를 경험하게 될진 굳이 말할 것도 없다.


요즘은 근력, 지구력과 함깨 오감의 영역에서도 노화를 느끼고 있다.

옛날부터 시력이 좋은 내 두 눈은 나름의 자랑거리였다. 어릴 때부터 시력 측정을 하면 2.0을 기록하던 나였지만 지금은 1.0을 겨우 넘는 정도가 되었다. 그나마도 컨디션이 좋은 날에나 그러지, 피곤할 때면 조금만 멀리 있는 것도 잘 보이지 않는다.

청력 역시 그러하다. 예전과 똑같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어도 예전과 같은 음량으로 듣기 어렵게 되었다. 분명 이 음량으로만 들어도 귓속을 가득 채우는 음향을 즐길 수 있었는데, 왜 지금은 작게만 들리는 걸까? 그렇다고 음량을 키우자니 청력이 더 악화될 것 같아 그럴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음량을 키우는 행위가 스스로 청력이 악화됐다는 걸 인정하는 꼴 같기도 하고.

얼마 전 사람은 어릴수록 맛에 더 민감하다는 기사를 봤다.² 기사에 따르면 어린아이들이 쓴맛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만큼 맛과 향을 잘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며 미각수용체가 줄어들게 돼 예전보다 쓴맛을 덜 느끼게 된다. 나도 쓴 것은 질색하고 단 것에 환장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쓴 맛을 어느 정도는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녹차의 씁쓸한 맛을 좋아하게 됐으며, 이전엔 입에도 대기 싫어했던 커피의 쓴맛도 이제는 어느 정도는 견딜 수 있다.

견딜 수 있게 된다는 것도 노화의 한가지 특징일지 모른다. 내 촉각도 예전보다 한층 둔해졌다고 느껴지는 요즘이다. 난 옛날부터 뜨거운 건 질색하는 사람이었다. 겨울철에도 찬물만 찾고 씻을 때도 미지근한 물로 씻는 걸 선호했다. 뭔가 뜨거운 물체를 손으로 잡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뜨거운 차도 잘 마시게 되었고 온탕과 사우나에 들어가서 긴 시간 동안 견딜 수 있게 되었다. 뜨거운 것도 이 악물고 조금은 오래 쥐고 있을 수 있다. 누군가는 참을성이 늘었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이 변화를 통해 내 촉각이 둔해졌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ilya-shishikhin--K7yvsDvj2g-unsplash.jpg Copyright 2020. Ilya Shishikhin


매일 오감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나로선 이 변화를 체감할 수 밖에 없었다. 몸으로 느낀다는 점에서 ‘체감’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적절한 어휘다.

한편으론 이 체감이라는 것이 조금은 잔혹하다고도 느껴진다. 체감이라는 것은 부정의 여지조차 남겨주지 않으니까. 내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도 체감하게 된 순간부터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해의 영역을 넘어 납득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나는 내가 늙고 있다는 것을 납득할 수밖에 없다. 내 뇌도, 내 마음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납득하기 싫음에도 나는 무력하게 납득될 수밖에 없기에, 나는 슬퍼진다.



늙기 싫다는 감정


내가 생각하기엔 노화에 슬픔을 느끼는 것은 나만 느끼는 감정이 아닌 것 같다. 최근 들어 늙는다는 것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사회 풍조가 어느 정도 퍼져있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조어까지 사용하며 노골적으로 늙음과 젊음을 구분하고자 하는 광경을 보며, 어느 정도는 악의마저도 느껴졌다.


11000_1.jpg Copyright 2017. 이철원


틀딱’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 있는가? 정확히는 ‘틀니딱딱’의 준말이다. 어원은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부터 나왔다. 커뮤니티 이용자 사이에서 같은 커뮤니티를 이용하는 연장자를 대상으로 ‘틀니 딱딱거리며 말하는 노인들’이라 폄하한 것이 그 기원이다. 참으로 모욕적인 단어가 아닐 수 없다.

단어가 지닌 강렬한 어감과 직관적인 의미, 자신이 느낀 노년층에 부정적인 감정을 축약할 수 있다는 점 덕분인지 ‘틀딱’이라는 단어는 금세 유행하게 되었다.

2024년 7월 기준, ‘틀딱’을 구글에 검색하자 총 810만 개의 검색결과가 도출된다. 생겨난 지 10년도 되지 않은 단어임을 고려해보면 꽤나 많이 쓰인 모양이다.

틀딱이란 단어는 인터넷 전반에 걸쳐 다양한 곳에서 사용되는 것을 넘어, 오프라인의 실생활에서도 자주 쓰이는 실정이다. 그 뿌리와는 달리 특정 집단의 특정 목적을 위한 단어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그 의미도 본래와는 조금 달라졌다. 과거에는 실제로 틀니를 사용하는 특정 연령층을 노린 단어였다면, 지금은 그 범위가 확대되어 중장년층 이하를 대상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는 20~30대의 청년층조차도 ‘틀딱’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빈번하다. 90년대 전후의 옛날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트렌드와 유행을 모르는 등, ‘최신’과 거리가 먼 언행을 보일 경우 틀딱스럽다는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물론 나도 이러한 단어의 용례가 진지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아직 그럴 나이도 아닌데 왜 이리 늙은이처럼 행동하느냐는 일종의 농담에 가깝다고 해석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용례 자체가 일종의 구획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뿐일까? ‘틀딱’이라고 하는 늙음을 대표하는 대상을 지정, 자신과 구분을 짓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타자화의 효과는 강력하다. 자신이 설정한 타자는 자신이 결코 되고자 하지 않는 대상이다. 타자화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타자처럼 되는 것을 지양하게 만들어준다.

‘틀딱’의 빈번한 사용도 그러하다. ‘틀딱’이란 단어의 사용은 자신이 설정한 '틀딱스러움'을 지양하게 만든다. 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틀딱처럼 되는 것이다. 이런 단어의 유행은 어찌 보면 늙지 않고 영원히 젊게 살고 싶어하는 의지의 표상처럼도 보인다.

이런 해석이 너무 과장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한 단어만 가지고 이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수십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웰빙(웰빙은 단어부터가 참 노골적이다. Well-Being은 직역하면 ‘좋은 존재가 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그 반대인 나쁜 존재는 무엇일까?)의 유행, 안티에이징으로 대표되는 코스메틱 산업, 들어보지도 못한 온갖 이름의 영양제와 매일같이 나오는 새로운 식이요법과 운동들, 나날이 커져만 가는 의료산업 규모 등.

우리 사회는 이미 ‘더 젊고 건강한 삶’을 이상향으로 삼고 있다. ‘틀딱’이라는 단어는 육체적 늙음을 거부하는 사회에, 심리적 늙음에 대한 거부감도 더했을 뿐이다.

늙고 싶지 않다.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러하다.


_methode_times_prod_web_bin_1cc787b0-bcd3-11ed-b039-425ba6c60d6d.jpg Bryan Johnson, 1977~


최근에는 자기 몸을 대상으로 회춘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 사람마저 나타났다. 그 실험자의 이름은 브라이언 존슨(Bryan Johnson, 1977~). 미국의 기업가이다. 전자상거래 기업인 Braintree와 신경기술 전문 회사인 Kernel의 CEO로, 올해 47세인 그의 자산은 약 4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³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억만장자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억만장자의 나라인 미국에서도 그의 인지도는 그 어떤 부자들에 밀리지 않을 정도이다. 그가 많은 자산을 투자하는 프로젝트의 존재 덕분이다. 프로젝트 청사진(Project Blueprint)이라 명명된 이 프로젝트는 쉽게 말해 젊어지는 것을 목표로 하는 프로젝트이다. 그는 막대한 돈을 들여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고용,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젊어지는 방법을 실험, 적용하고 있다.

그는 엄격한 식단과 운동은 기본, 계획표를 기반으로 한 생활과 온갖 종류의 영양제 섭취를 매일같이 수행하고 있다. 의학적 접근도 수반하여 주기적인 검진으로 프로젝트의 진전도를 확인하는 것도 빼먹지 않는다.

작년에는 혈장 수혈을 통한 신체변화를 알아보기 위해 직접 친아들의 혈장을 자기 몸에 수혈한 것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연간 약 200만 달러를 이 프로젝트에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같은 일반인이 보기엔 한 부자의 괴팍한 기행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섭취하는 영양제의 종류와 식이요법 등에 대한 정보가 인터넷에 떠도는 것을 보았을 땐, 그를 따라 해 조금이라도 더 젊어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아주 없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나도 내심 여유만 있다면 직접 내 몸에도 실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었으니까.


connor-wang-JJTTTCa2qFo-unsplash.jpg Copyright 2018. Connor Wang


이처럼 우리는 늙는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당당하게 이 사실을 공표하고 다니진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늙어도 괜찮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늙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 등의 노화를 변호하는 말들을 더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문장이 난립한다는 사실이 많은 이들의 노화에 대한 두려움 입증해주는 것은 조금 역설적이다. 노화를 거부하는 문장이 없는 것에는 노화에 대한 우리의 본능이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도 싶다.

우리가 좋든 싫든 우리는 늙을 수밖에 없다. 노화를 비난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불편한 사실을 다시 상기시키게 만든다. 분노의 감정은 즉각적이고 그 파장도 거대하니까.

우리는 그 사실에 눈을 돌리고 싶기 때문에 더더욱 노화를 언급하는 게 금기시되는 것이 아닐까? 동시에 그러한 비난은 같은 공동체원에 대한 공격으로도 받아들여진다. 이 금기를 깨고 싶지 않기에 우리는 노화에 대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도 같다. 물론 난 심리학자가 아니기에 내 말이 옳다고 단언하진 않겠다.

하지만 서두에도 밝혔듯이, 나는 내가 늙는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낀다.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독자가 보기엔 이러한 내 감정이 청승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글에서마저 내 감정을 숨기고 싶진 않다. 다른 이들이 그러하듯 나는 더는 늙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내 감정이 무색하게도 지금 이 순간마저 내 몸은 늙어가고 있다. 참으로 슬픈 운명이다.




올해의 여름은 평상시보다 조금 이르다고 한다. 어쩌면 끝나는 때도 과거와는 다를 수 있다. 나 역시 매년 지나가는 계절을 보며 작년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곤 한다. 계절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을 만큼 나도 많은 세월을 지내왔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게 남은 미래에는 더 많은 변화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를 알고 있음에도 이를 피할 수가 없다. 대처할 수도 없다. 저 멀리 거대한 운명이 서서히 박차를 가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기에 나는 오늘도 슬픔을 느낀다.



각주

¹. Ron Milo, Ron Sender, "The distribution of cellular turnover in the human body", Nature Medicine, January 2021

². https://h21.hani.co.kr/arti/culture/science/52332

³. https://fortune.com/2023/12/21/bryan-johnson-human-guinea-pig-unproven-tests-reprogram-human-genes-follistatin-roatan-island-hondur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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