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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의역사 Apr 14. 2021

아웅산이 왜 미얀마의 국부(國父)일까?

미얀마 쿠데타의 본질, 1시간 만에 이해하기 #10

이 브런치북을 발행하기 앞서, 2021년 미얀마 쿠데타로 유명을 달리한 분들께 애도를 표합니다.

이 글은, 미얀마 사태를 보다 본질적으로, 그러나 어렵지 않게 보자는 취지로 만든 콘텐츠입니다.




미얀마 국민의 '진정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멀리서나마 응원합니다.









잠깐! 모두의역사가 미얀마 군부 쿠데타를 옹호한다?




(페북에 이런 댓글이 몇몇 달리더라고요...)

절대 그렇게 않아요. 민주주의 체제에서, 공권력이 무고한 시민을 학살하는 행위는 명백한 잘못입니다. 군부가 2020년 총선 패배에 승복하고, 4년 뒤 백성의 마음을 사는 방법을 구상했으면 어땠을까요? 어쨌든, 군부는 총칼을 이용해 시민 위에 군림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맛 본 미얀마 백성이 전처럼 가만히 순응하고 있지 않죠. 대한민국에서 전두환이 무력으로 시민을 진압했던 역사와 평판을 보더라도, 이 쿠데타의 장기적 승패는 예측할 수 있습니다.





전두환을 끌어내린, 87년 민주항쟁










전편 : 미얀마 쿠데타의 씨앗을 심은 나라는? #9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가 국부(國父)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 사건'이 뭔가요?





현재 군부에 의해 갇혀있는 아웅산 수치. 그녀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의 국부로 칭송받고 있는데요. 그가 국부가 될 수 있던 이유는 크게 두가지가 있어요.


   1. 전설적 독립운동가 : 미얀마는 영국과 일본의 식민지배를 혹독하게 받았어요. 그 과정에서 두 제국주의 세력 아래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전개했죠.

그는 '버마독립의용군'의 수장으로서, 영국과 일본 제국주의의 협력을 필요에 따라 이끌어 냈어요. 그리고 이 의용군 내 민족대표 30인은 버마족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훗날 미얀마의 주류 권력이 돼요.





버마독립의용군, 30인의 지사(맨앞 가운데 모자들고가 아웅산)






    2.  아웅산이 버마족을 비롯해, 모든 민족의 '국부'가 될 수 있던 2번째 이유





이것이 바로 이번 편의 주제인데요.





아웅산은 절대다수 버마족과 소수 민족과의 대통합을 이뤄냈어요.

미얀마의 1천 년 역사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버마족vs소수민족'의 분쟁이었어요. 영국이 미얀마를 식민 통치하던 방식도 민족끼리 싸움붙이는 것이었어요. 소수 민족을 우대해서, 버마족이 차별대우를 받도록 한 거죠. 우리가 친일파에게 당했던 1920년대 '민족 분열 정책'과 유사했어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웅산은 영국과 일본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민족간 감정의 골을 극적으로 메워내요. 바로 팡롱 협정(1947.2)을 통해서 였어요.




팡롱협정(1947) 당시, 맨아랫줄 오른쪽 두번째가 아웅산


팡롱 협정문(1947)




얼마나 극적이었길래, 미얀마의 국부로 칭송받아?

사실 영국이 미얀마에서 순순히 물러난 건 아니었어요.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끝에 일본에게서 미얀마를 다시 빼앗은 뒤, 아웅산을 미얀마의 대표가 아닌, 버마족 대표로만 인정해요. 소수민족을 아웅산 통제권 밖에 둬서 따로 독립시키려는 흑심이었어요. 끝까지 이간질을 한 거에요. 특히 개신교 비율이 많은 카렌족을 영연방의 한 주로 편입시키려 했어요(카렌국). 홍콩을 100년 간 지배했던 것 처럼 말이죠.





카렌족





그래서, 아웅산은 영국의 이간질에 어떻게 대응해?

아웅산은 '버마연방공화국'으로 응수해요. 오늘날 미얀마의 탄생이죠. 다시말해, 미얀마는 독립군(군부)의 수장이었던 아웅산이 통합해 세운 나라입니다. 그렇게 맺어진 조약이 아까 말했던 바로 팡롱협정(1947.2)이에요.






팡롱협정(1947.2) 내용인 즉슨,

우리 함께 연방제 국가를 만들자.

혹시라도 연방제 국가가 맘에 안들면 10년 후(1958)에 이를 지속할 건지 재논의 하자. 탈퇴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도 줄게!"




그래서 미얀마가 다민족 국가가 된거구나. 그런데 왜 아직도 싸워?

비극은 팡롱협정이 성사된 뒤에 일어나요. 민족 간 통합을 이뤄낸 지 5개월이 지나서(1947.7), 아웅산은 의문의 암살을 당해요. 영국 식민지 시절의 총리 측근이 그에게 총격을 가했어요. 영국 배후설이 있긴 하지만, 문서로 밝혀진 바는 없어요. 이 때문에, 소수민족은 10년 후에 연방 탈퇴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지 못해요. 그렇게 '버마연방공화국'은 1948년 탄생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1965년,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지 4년 후였죠.




미얀마는 쿠데타가 이번이 처음인가 봐요?

미얀마는 1947년 건국 후 총 3번의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2021년 일어난 게 3번째에요. 역사에 남을 쿠데타는 사실 첫번째가 가장 컸어요(1965). 바로, 아웅산과 피를 나눈 버마 독립군 동지이자, 아웅산 수치와는 정치적 숙적이었던 인물, 네윈이 일으켰어요.







버마독립의용군, 30인의 지사




역사는 참 운명의 장난 같아요.




네윈은 일본 제국에 의해 아웅산과 함께 성장했고, 말년에는 그의 딸 아웅산 수치에 의해 권력에서 끌려내려오게 되요.






그런데, 그의 군사 쿠데타에는 나름 명분이 있었어요...






위 포스팅은 [1시간 만에 이해하는, 미얀마 쿠데타의 본질] (가제) 브런치북으로 발행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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