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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미 Nov 22. 2020

헌혈 할 수 있는 특권

다시 그런 기회가 내게 주어진다면 좋겠다

며칠 전 남편과 함께 아침 산책을 하던 길에 만난 지인에게서 그레이스 할머니가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헌혈이 필요한 상황이어서 그날 지인 두 명이 헌혈을 하기 위해 병원으로 갔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필요하다면 우리도 헌혈을 하자고 이야기했다.

아침 산책을 마치고 곧바로 그레이스 할머니를 돌보고 있는 남편분에게 연락을 드렸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그레이스 할머니가 많이 아프시다고요?"

"네.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당뇨에 고혈압에 지금 피까지 부족하다고 하네요. 그래도 오늘 두 명이 헌혈을 해주러 요."

"네. 다행이네요. 할아버지. 그래도 혹시나 헌혈이 더 필요하시면 저희 부르세요. 언제든지요."

"고마워요."

그렇게 통화를 마쳤다.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그레이스 할머니가 입원해 있는 곳은 우리가 사는 곳에서 3시간이나 걸리는 병원이었다. 쉽게 찾아갈 수도 없었고 또 찾아간다고 해도 중환자실이어서 할머니를 만날 수도 없었다.

그날 오후 다시 할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늘 헌혈하러 간 사람 중 한 명이 빈혈이어서 헌혈을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흔쾌히 다음 날 헌혈을 하러 가겠다고 했다.  


다음날 새벽 6시가 넘어서 남편과 나 그리고 인도 친구 두 명과 함께 헌혈을 하기 위해 병원으로 출발했다.

9시가 넘어 도착한 병원. 코로나 때문에 설문지를 작성하고 손등에 매직으로 확인 표시를 받고서야 병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남편이 제일 먼저 헌혈을 위해서 설문지를 작성했고 다음으로 내가 헌혈을 하기 위해 간호사를 만났다. 몸무게를 체크하고 설문지를 써내려 가는데 간호사가 내게 말했다. "마지막 생리 기간이 언제지요?"

"아.. 이번 주요."

그러자 그 간호사는 웃으며 내게 말했다.

"죄송해요. 지금은 헌혈을 하지 못하세요."

몸무게도 충분하다며 내가 그레이스 할머니를 위해 꼭 헌혈하겠다고 남편에게 큰소리를 쳤었는데 아쉽게도 나는 헌혈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헌혈을 하지 못할 상황을 대비해 함께 왔던 인도 친구 중 한 명이 나 대신 헌혈을 했다.

남편이 헌혈을 한참 하고 있을 때 그레이스 할머니의 남편이 도착했다. 병원에 잘 곳이 없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친척집에서 지내며 하루에 한 번 할머니를 면회하러 온다고 했다.

"너무 고마워요. 사실 아는 사람들에게 헌혈을 해달라고 이야기했는데 다들 꺼려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연락을 했어요."

"아니에요. 저희가 도울 수 있으니 감사하죠. 헌혈이 더 필요하시면 또 이야기해주세요. 저희와 같이 지내는 친구들도 많이 있어서 언제든지 도울 수 있어요."

나는 비록 헌혈을 하지는 못했지만 남편을 대신해 우리의 마음을 표현했다.

아픈 아내를 간호하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많이 피곤해 보였다. 그리고 간절해 보였다.


우리가 헌혈을 하러 가기로 결정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큰아이 성민이가 내게 말했다.

"엄마. 헌혈하는 거 안 무서워요?"

"무섭긴. 그레이스 할머니를 도울 수 있다는 게 감사하잖아. 엄마는 몇 년 전에 조혈모 세포 기증하는 것도 하려고 마음먹었었는 걸."

"그게 뭐예요?"

"엄마 아빠가 대학교 다닐 때 같이 조혈모 기증을 하겠다고 약속을 했었거든. 근데 몇 년 전에 연락이 온 거야. 엄마랑 피 성분이 같은 백혈병 환자가 있다고 도와줄 수 있냐고. 그래서 돕겠다고 했지. 그런데 엄마가 인도에 있어서 시간이 잘 맞지 않아서 그쪽에서 포기를 하셨어."

"엄마는 기증해달라는 연락이 왔을 때 안 무서웠어요?"

"왜 안 무서워. 사실 무서웠지. 그래도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일이니까 돕고 싶었던 거지."

그러자 성민이가 말했다.

"엄마. 그럼 그때 엄마가 비행기 값을 내고서라도 한국 가서  도왔어야죠."

"그러니까. 그런데 그때 상황이 곧바로 갈 수는 없었어."


성민이의 이야기를 듣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아이들도 어렸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혼자 한국에 갔다 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비행기 값의 부담도 있었다. 하던 일들도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한국을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조혈모 세포 기증을 위해 상담해 주시는 분과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날짜를 조정했고 결국 환자 측에서 다른 기증자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나는 혹시 찾지 못하시면 연락을 다시 달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후로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


조혈모 세포 기증을 서약한다고 해도 내 피와 맞는 환자를 찾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다고 했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한국에 있었다면 곧바로 도울 수 있었을 텐데 하면서 아쉬워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날 성민이의 이야기를 듣는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일이었는데 내 어려운 상황들을 모두 포기하고 한국으로 갔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그런 씁쓸한 후회가 들었다.

이 글을 쓰면서 조혈모 세포 기증에 대해 다시 찾아보았다. 기증을 할 수 있는 나이가 40세 까지라고 나와 있었다. 물론 건강할 경우 50세까지 기증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긴 했지만 정확히 나와 있는 나이는 건강한 40세 까지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내년 초 만 39세가 된다. 제한 나이에 가까이 간다는 것이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그래서 혹시라도 내게 다시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성민이 말대로 모든 걸 뒤로하고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가서라도 돕고 싶다. 혹시 내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말이다.


누군가를 돕는 일도 내게 주어진 특별한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회를 놓치고 나면 다시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았다.

내게 피아노를 배우러 오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리코더를 배우려고 오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도움을 구하러 오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매년 겨울 이곳을 찾는 집시들을 만나는 일도,

모든 일들이 내게 주어진 특별한 기회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서 그 기회를 잡는 것, 그것뿐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오늘 하루 내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진심으로 도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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