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시작할 가장 좋은 나이
어렸을 적 마흔이라는 뭔가 고독하고 쓸쓸한 단어로 다가왔다.
텔레비전에서 가을 낙엽 떨어지는 길을 긴 바바리코트 입고 걸어가는 중년 남성의 모습을 본 적이 있어서일까. 인생을 깊이 생각하는 나이였기에 내게는 멀기만 한 단어였다.
스무 살에서 서른 살로 넘어갈 때도 기분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서른 살에서 마흔으로 넘어갈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꽤 오랜 시간 머물렀다.
마흔을 맞는 첫 해에는 나는 빠른 82년 생이라 이야기하며 친구들보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났고 둘째 해에는 국제적인 나이 법으로 계산해야 한다고 하면서 만 나이로 계산하곤 했다. 그리고 지금은? 지금은 나이를 거의 계산하지 않는다.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나이와 상관없이 살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조깅을 하는데 모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의사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이를 잊고 살아가는 사람은 오히려 천천히 늙는다고. 그러니 내가 나이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잘하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40대가 된다는 것은 인생의 중반에 들어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40대를 처음 들어서는 내게는 거부감이 더 컸다. 정말 40대가 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있었다. 바로 나의 글 벗과의 만남이었다.
선생님은 작년에 온라인 독서 모임에서 만난 분이었다. 70세가 넘으신 선생님은 하얀 머리에 차분하고 우아한 말투로 온라인 독서 모임에 모인 젊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온라인 모임이라는 것이 잠깐 서로의 얼굴을 볼 뿐이지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는 분위기인데도 선생님과 나는 짧지만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렇게 두 번의 독서 모임을 함께 하고 간간이 개인적으로 서로의 소식을 나누던 중 올해 한국 갔을 때는 직접 만날 기회를 만들었다.
아주 작은 식당에서 집 밥 같은 점심을 먹고 가까이 카페에 앉았다.
나는 인도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이야기했고 선생님은 요즘 어떤 취미를 가지고 사시는지 이야기했다. 인문학 강의를 들으시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서예를 배우는 선생님의 일상이 너무 멋지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해옥 씨는 나이가 어떻게 돼요?"
나는 쑥스러운 듯 답했다.
"만으로 41세예요."
그러자 선생님은 나를 보며 환희 웃으며 이야기했다.
"너무 좋을 때네요. 사십 대는 이제 제대로 자리를 잡고 진자 일할 나이잖아요. 뭐든지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나이기도 하고요."
나는 선생님의 이야기에 조금 당황했다.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나이라니. 가장 좋을 때라니. 내 젊음은 다 사라지고 이제 불혹의 나이인데. 나는 말했다.
"정말요? 저는 마흔이 되었다는 것이 너무 슬펐어요. 뭔가 후퇴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뭔가를 새로 시작할 수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때 선생님은 내게 말했다.
"지금이 가장 좋은 때에요. 젊었을 때 철이 없이 경험하던 일들을 이제는 안정적인 마음으로 제대로 시도할 수 있는 시기니까요. 늦지 않았어요. 두려워하지 말고 시작해 봐요.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기가 바로 지금이에요."
나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녀의 얼굴을 한참 쳐다봤다. 삶의 많은 것을 경험하고 지나온 선생님의 말과 표정을 보면서 그녀의 말은 믿어도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였다. 마흔이라는 나이가 우울과 고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후회와 고민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꿈꿀 수 있는 나이라는 것을.
지난 7월 8월에는 업무차 미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날은 인도를 가끔 방문하셨던 지인 목사님 댁을 찾아갔었다. 80이 훌쩍 넘으신 목사님은 지금도 집과 밭을 다니며 바쁘게 일하고 계셨다. 맛있는 콩국수를 먹던 저녁 시간. 80이 넘은 목사님은 우리와 함께 간 이제 70이 넘은 장로님에게 물으셨다. "자네는 꿈이 무엇인가?"
그 순간 질문을 받은 장로님도 함께 앉아 있던 우리 부부 모두 웃고 말았다. 장로님은 말했다.
"아이고. 70이 넘은 제가 무슨 꿈이 있겠어요. 그저 건강히 잘 지내고 해야 할 일들을 잘할 수 있으면 되죠."
하지만 목사님은 말했다.
"아니야. 꿈이 있어야 돼. 나는 이런 꿈을 가지고 있어." 하면서 본인이 꿈꾸는 것을 나누었다.
그곳에 앉아 있던 우리 모두의 웃음은 감동으로 바뀌었다. 꿈꾸는 80대라니.
맞는 말이었다.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지금 나는 반도 오지 않은 아주 젊고 미래가 창창한 40대인 것이다.
어렸을 때의 도전과 열정은 조금 식었을지라도 진득하게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철든 어른이 된 것이다.
인도의 뜨거운 태양볕 아래 오래 살아서 그런지 얼굴에 큼직한 기미들이 많이 올라왔다. 몸무게는 내 일생 최고 점을 찍고 있다. 예전의 애 띄고 깨끗한 피부는 찾아보기 힘들어 셀피 찍는 것은 가장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고 사진도 앱을 사용하지 않고는 찍고 싶지 않을 때가 많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점에 서 있다는 것을 안다.
이어폰을 끼고 내 삶에 꼭 필요한 영상들을 들으면서 일요일 아침을 달린다. 공책을 꺼내 새로운 삶 40대의 꿈을 적어 본다. 그리고 글을 쓴다.
그래. 나는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시간 가장 중간에 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