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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풍경 Nov 01. 2021

통증으로 정서를 호소하다

신체화장애

   "최대리~" 

   박 과장의 칼칼한 목소리가 사무실 안쪽에서 들리자 정신없이 손가락을 움직이며 워드 작업 중이던 최대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피가 식는다. 목 뒷부분을 시작으로 짜릿하니 저린 느낌이 정수리까지 올라오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목과 어깨가 단숨에 뻣뻣해진다. 익숙한 통증, 또 시작이다. 저린 느낌은 어깨를 타고 손가락 끝까지 이어지다가 이어 아릿아릿한 전신의 통증으로 번져나갔다. 

   "최대리!" 
   "아, 네!"

   벌떡 일어나 박 과장의 책상 앞으로 달려간 최대리는 오늘도 기억나지 않는 실수의 결과를 과장이 툭 던져놓은 서류를 뒤적이며 눈으로 확인한다. 온몸의 통증은 더 심해져 어질어질하다. 

   "죄송합니다...."
   "최대리, 요즘 왜 이러지? 새로운 업무도 아니고, 늘 하던 일인데. 초짜나 하는 실수라니. 몇 년 간 해오던     거잖아? 무슨 일 있나? 반복되니까 나도 봐주기가 힘들어."
  "특별한 일 없는데요... 정말 송구합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자신의 책상 앞으로 간 최대리. 이유를 본인도 알 수가 없다. 점심시간도 반납하며 15분 정도 헐레벌떡 식사를 마치곤 종일 컴퓨터 앞을 떠나지 않는데... 부하직원들 실수 커버하랴, 불평불만 잠재우며 팀 내 분위기 관리하랴, 거래처 컴플레인 상대하랴, 본인 업무에... 애사심에 성실함이라면 부끄럽지 않다 자부해왔는데 갈수록 힘들어진다. 왜 이렇게 기억나지 않는 실수는 반복되고, 꾸중 듣는 횟수가 늘고, 온몸이 저리고 아픈 걸까? 

최근 종합검진 결과도 이상은 없었는데... 젊은 사람들도 치매가 온다던데... 아니라면 혹시 정신질환은 아닐까? 



통증의 원인을 찾을 수 없다면


        위 글은 통증과 관련된 단편적 사례입니다. 많은 이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신의 통증, 소화불량, 복통, 두통, 손 저림, 마비 증상 등으로 병원의 여러 과를 전전하며 검사를 반복하다 최 종착역으로 신경정신과를 찾아오는데요. 지인 중 사회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설사가 지속되는데도 원인을 찾을 수 없어 결국 신경정신과로 의뢰된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다행히 항우울제와 항불안제 처방을 받고 꾸준한 약 복용 후 설사가 잦아들어 '화병'이었다며 한숨 돌린 경우였지요.


     이렇게 원인불명의 통증 또는 신체적 증상으로 고생을 하시는 분들은 본인의 증상이 명백한데도 불구하고 내시경과 CT촬영을 해도, 병원을 옮겨 재검사를 해봐도 이상이 없다 하니 난감해하십니다. 이분들의 통증은 특별한 촉발 사건이 없을 수도 있지만 스트레스나 과로에 의해 더 강해지기도 합니다. 여하 간에 이러한 일을 겪는 분들이  결국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 신경정신과가 되어 '심인성'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치료에 들어가게 되지요. 그런데 전통적으로는 순전히 심인성으로만 생각되었던 신체화 증상의 생물학적 근거가 밝혀진 지 제법 되었습니다.


신체화장애, 그리고 우울증

메티칼 트리뷴 뉴스 우울증과 신체화 증상 2003.04.10


     통증과 우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우울의 증세로 통증이 나타나기도 하고, 통증이 심하신 분들은 이로 인해 우울감을 느낍니다. 이미 2002년 경에 우울과 통증의 생물학적 연관성, 약물치료가 화두가 되어 미국과 국내 학계에서 활발하게 연구발표가 이뤄졌습니다. 우울증과 통증에 관여하는 신경전달 계통이 공유되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힘을 얻었고요. 후뇌의 수많은 신경다발 중 변연계로 향하는 회로는 우울증과, 말초신경 방향으로 뻗는 회로는 통증과 연관된다는 것이지요. 우울증에 사용되는 특정한 항우울제가 신체화장애에도 효과를 보여 이를 증명했습니다. 또한 우울증 환자들에게서 뇌 전두엽의 기능 저하가 보고되었는데, 신체화장애 환자들에게서도 두뇌피질 기능 저하, 우반구 기능 저하 등이 관찰되어 뇌기능과의 연관성도 제기되었습니다.  

     전년도 미국 학회의 흐름의 영향을 받았을 듯한데 2003년 대한우울. 조울 학회가 22주년 기념 차 신체화 증상과 우울을 주제로 춘계 학술대회를 개최하였어요. 이게  벌써 한참 전이라, 최근에는 접근방식이 다양화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사회문화적 접근 방식 외에 통각 예민도를 다룬 정신생리학적 접근방식, 주의집중력과 기억을 다룬 신경생리학적 접근방식, 우울증이나 감정표현 불능증을 다룬 정서 및 성격적 접근방식 등.... 신경정신과 질환 중 신체화장애는 예후가 좋은 편은 아닙니다. 뇌영상 과학과 컴퓨터 기술, 신경생리학적 방법론의 발전 덕분에 신체화장애의 기전에 대한 시각이 다양화된 만큼, 신체화를 예방하거나 통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이 보다 명확해지길 소망합니다....


신체화 장애, 완치보다는 관리에 방점을


     신체화 장애이신 분들은 관심을 '완치'보다는 '관리'로 옮길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은 환자를 더욱 통증에 몰두케 하여 통증에 관련된 신경계를 더욱 예민하게 깨우고, 이것이 신체증상을 가중시키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체화를 겪는 분들의 경우 스트레스 사건보다는 이에 대한 부적절한 대처방식이 문제일 수 있습니다. 문제 해결 중심 대처방식을 취하는 그룹보다 정서적으로 대처하는 그룹이 신체화장애에 취약하다는 통계 보고가 있답니다. 약물과 동시에 심리상담 등으로 생활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적절한 대처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접근할 때에 장기적으로는 더 긍정적인 효과를 보실 수 있을 거예요. 다만 신체화이신 분 중 일부는 스스로 심리적인 요인이나 특성과 통증의 연관성을 인정하시지만, 일부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정이 도저히 안 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때문에 치료자가 처음부터 직설적으로 지적하기보다는 통증이나 증상 자체로 인해 이분들이 겪고 있는 불편감과, 생활의 질이 떨어지는 고충 등을 공감해드리고, 장기적으로 관리하며 호전되도록 힘써 보자고 방향을 제시하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집니다. 


   개인적으로는 통증으로 인해 저하된 기능을 간과하지 말고 죄책과 무능감으로부터 자유롭도록 치료자가 이 환자군을 터치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신체화가 아니더라도 요통, 퇴행성 관절염 등 만성통증은 총명함을 갉아먹는 벌레와도 같습니다. 신체화 장애이신 분들 역시 단기 기억장애나 주의집중력 문제로 어려움이 많은데 이것을 신체화 증상과 연결시키지 못하여 '무능력'이나 '부주의' 등 자신을 탓하시는 모습은 마음이 아픕니다. 자존감도 바닥이신 상태이고요. 또한 검사 등으로 원인을 밝혀내려고 집착하는 내담자라면, 그 고집에 온전히 따라주는 것은 그의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 수많은 검사를 거치고 여러 과를 전전해 오신 분이라면 그분의 내면에는 의사나 상담사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둬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굳이 그렇게 스쳐 지나간 이전의 수많은 치료자들과 같은 선상에서 출발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신체는 감정을 위한 극장 theater 으로 이용된다

                      이영호, 신체화의 생물학적 기전; 신체화의 신경심리학적 모델을 중심으로

                                                   정신신체 의학 8(1) 128p.



     위의 최대리의 경우 신체화 장애와 우울증이 동반되면서 업무실수가 반복되고, 스트레스의 과중이 뇌기능 저하로 이어지며 악순환이 반복되는 중일 수 있습니다. 이른바 '정신을 차린다'는 방법으로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약물치료를 받아 망가진 신경체계에 작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본인이 좋은 사람이 되고자 능력 이상의 분야까지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본인의 불안 수준이 매우 높은 상태라 업무의 질이 더욱 떨어지는 것은 아닐지, 내면에 노력하고 있는데 알아주지 않는다는 피해의식이나 억울함, 적개심이 무의식 수준에서 눌려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하네요. 


      최대리의 핵심감정은 불안과 분노일지도 모릅니다. 그가 지금까지 취해온 방법은 더욱 자신을 채찍질하여 열심히 일을 하면서 피로감을 높이고 집중력을 떨어뜨리며 신체화 증상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을 수도 있습니다. 신체화의 경우 충분히 쉬어주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답니다. 한 가지 더 추측해보기는, 본인이 힘든 상황인데도 직원들의 실수를 커버해주거나 가르쳐주려는 등의 오지랖이 '괜찮은 사람'으로 있고 싶은 최대리의 욕심일 뿐 실제 회사생활에서 마이너스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내적 에너지를 소진할 것이고,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사소한 실수만 지적한다고 상사에게 불만을 품었다면, 표현하지 못한 분노는 몸의 통증으로 나타날 수 있겠지요. 이 순환고리는 실수 위에 실수를 얹는 결과로 이어졌을 수 있고요. 최대리가 다행히 신경정신과 내지 상담센터를 방문할 결심을 곧 할 듯 하니 다행입니다.  회사에 따라 다릅니다만 근래에는 사내 상담실을 갖추거나 EAP사를 통하여 사원의 정신건강 복지에 지원을 하는 사측이 많아지고 있으니 회사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추천하고 싶은 방법이에요.





    위의 사례는 가공된 이야기였습니다만, 우리의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영-혼-육 은 상호 간에 영향을 줍니다. 한 곳이 곪게 되면 다른 요소에도 그 염증이 옮아가니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지요. 대한민국과 같이 솔직한 정서 표현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자라난 이들은 대화도 일처럼 하고, 마음이 다치면 몸에 통증을 느끼는 경우가 더 잦습니다. 내 가족의 마음, 어떤지 오늘 물어주세요. 용건 위주의 대화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 영혼과 영혼이 교통 하는 대화를 시도해 주세요. 그리고 내 마음에도  물어주세요.



 요즘 어때, 괜찮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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