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양귀자의 <모순> (별 4개, 강추)
친구의 결혼 축사에서 내가 했던 말이 있다.
'정신과에 오면 인생의 정답을 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정신과에 와서 알게 된 건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때는 결혼 축사이니 '인생의 정답에 그나마 가깝다고 생각되는 것은 좋은 사람을 만나 인생을 함께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는 덕담을 보탰다.
그러다가 요새 생각하는 인생의 중요한 정답 중 하나는 모순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더랬다.
양귀자<모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수많은 대극(對極)이 나온다.
주인공의 이름인 안진진(No,眞眞) 부터가 진짜 진짜 가짜다.
처음부터 작가는 이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글로 적다 보니 이런 작위성은 얼핏 유치해질 수도 있는데 자연스럽게 몰입되어서 신기했다.
쌍둥이인 이모와 엄마의 대조적인 삶. 아버지와 이모부의 서로 다른 모습.
주인공 안진진과 이모의 딸 주리.
안진진이 고민하는 두 남자인 김장우와 나영규.
이 둘은 요샛말로 가져온다면 MBTI로 J의 극한, P의 극한. 사실 나아가서는 ESTJ대 INFP인데...
실소가 절로 나오는 구성이었다.
수많은 대극 속에서 모순은 자연스럽고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작가는 도입부와 말미에 각각 삶과 죽음을 대비시킨다.
이렇게 살아선 안돼!라고 정열맨처럼 깨어나는 안진진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이모의 처연한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어린 날에는 삶의 모순을 견디는 능력이 너무나도 부족했던 것 같다.
사실 선과 악의 존재를 찾아 끊임없이 헤매던 날도 있었고, 사회에 만연한 악의 존재에 분노하다가 나의 내면에 악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워하는 날도 많았다.
그러다 내가 내린 결론은 결국 선악은 동전의 양면이고 이러한 모순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핵심이 아닌가라는 결론에 도착했었다.
소설의 종반부에는 삶의 부피를 늘리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사실 행복도 불행도 모두 동전의 양면이다.
삶이라는 상자 안에 '행(幸)'이라는 동전을 마구 채워서 돼지 저금통을 쌓아가는 걸까. Yes행 No행...
행복에 대한 연구에 한창 꽂혀 있었던 적이 상당 기간 있었는데, 내용인즉 행복은 결국 안정적이고 좋은 관계의 양, 건강, 성숙한 방어기제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삶의 부피는 어쩌면 나의 가슴을 찢어놓았던 아픈 관계, 시간이 지나며 점점 약해지는 내 몸을 보면서 하는 고민들, 미성숙하게 소리 지르고 눈물을 쏟으며 지내온 나날들에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희한하게 과거를 떠올리면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이 유독 선명하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어쩌면 그건 희한한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별점: 4/5
이유: 영화나 책은 내 생각을 바꾼 작품이 5점인데, 이 책은 내가 하던 생각들을 정리해 준 느낌. 4.5점은 생각을 바꿔놓진 못했지만 내가 느끼기에 구조적으로나 연출적으로 등등 기발하고 정말 완벽하다 느끼는 건데 이 책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고. 근데 아주 좋은 책이고 주변에 많이 추천할 것 같다!
덧) 나는 보통 엄마, 형 관련된 주제들이 나오는 부분에서 눈물 스위치가 눌리는 경우가 많다. 근데 이상하게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주인공이 술 마시고 깽판 치는 아버지의 머리에 돋운 핏대를 회상하며 '아버지도 괴로웠다는 것을 안다. 아버지는 그렇게 우리를 사랑했던 것이다.'라고 하는 장면이었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사실 전형적인 스톡홀름 신드롬처럼 느껴지기도 한데 왜 나는 이 말에 갑자기 마음이 사르르 아플까...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