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앤디 위어 <프로젝트 헤일메리> (별 4개, 강추)
수많은 사람들은 마음속에 영웅을 품고 살아간다.
아마 그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많은 사람들의 영웅의 근원 이미지는 아버지일 가능성이 높다.
흔한 스테레오 타입으로 생각해 본다면 아버지에서 선생님, 선생님에서부터는 다양하게 변화하는데 아이돌이나 유명 스타, 혹은 내가 지지하는 정당의 정치인 등등... 다양한 사람을 영웅으로 숭배하게 된다.
인간은 돈이나 명예 같은 가치를 숭배하기도 하지만 그것의 현신인 사람을 믿고, 따르고, 숭배하는 경우, 그리고 그러한 피숭배자가 많은 사람을 우리는 '영웅'이라고 부르게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인 이영도 작가의 <눈물을 마시는 새>의 4권 부제목은 <왕을 찾아 헤매는 인간>이다.
책 전반에서 다른 종족들과 다르게 인간은 자신들이 숭배할 왕을 찾아 세상을 헤맨다.
지구에 있는 여러 영장류 중에서도 특히 인간은 보호받아야 하는 기간이 길다.
이러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한 가지는 인간의 특히 거대한 전두엽의 발달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생물학적인 한계가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인간은 오랜 시간 누군가를 믿어야만 하고, 보호받아야 하고, 그렇게 성장한 전두엽은 체계적으로 누군가를 믿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인간은 결국 왕, 영웅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웅이 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뛰어난 신체 능력을 지닌 슈퍼맨 같은 사람?
화려한 언변과 천재적인 정치 감각으로 사람들을 통솔하는 역사 속 위인들?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사고 현장에 뛰어들어 사람들을 구해가 목숨을 바치는 의인들?
프로이트는 인간이 태어나 필연적으로 반대 성별을 가진 부모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고, 같은 성별을 가진 부모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며 권위 대상 (authority figure)의 붕괴와 통합을 겪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떠올리는 수많은 영웅들은 실제로 훌륭한 면이 많겠지만, 가까이서 보게 되면 그들도 그저 나약한 인간일 뿐일 테고 그 과정에서 우상 숭배의 붕괴를 겪기도 한다.
어쩌면 최근 대중문화에서 흔히 보이는 cancel culture, 나락 보내기 문화는 이런 심리적 모순에서 일어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영웅은 별 볼일 없다는 이야기냐? 당연히 아니다.
앤디 위어의 소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영웅의 모습에 대해 제법 설득력 있는 고찰을 보여준다.
** 아래부터는 소설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영화를 보고 글을 읽으시면 재미가 2배!
책의 주인공 그레이스가 가진 능력은 비범하면서도 평범하다.
그레이스는 과학 관련 박사 학위의 소유자이고, 책을 계속 보다 보면 상당한 수준의 문제 해결 능력과 논리적 추론 사고를 보여준다.
이렇게 비범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논문이 인정받지 못하자 소심하게 삐져서 학계를 떠나 중학교 교사로 살고 있으며, 프로젝트 헤일메리라는 인류 구원 임무에 참여하는 자세에서도 우리가 흔히 영웅에게 기대하는 어떤 위대한 숭고미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비행사로 함께 임무에 참여하는 야오 대장이 훨씬 전형적인 영웅의 모습에 가깝게 그려진다.
이 소설의 플롯 전체는 사실 어찌 보면 전형적인 왕도물, 영웅의 탄생 서사에 가깝다.
주인공 그레이스 또한 '내가 혹시 영웅적인 숭고함을 가지고 모험에 참여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소설 내내 작전에 임한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소설 말미에 기억 상실이 회복되며 자신은 인류를 위해 스스로 자살하는 임무인 프로젝트 헤일메리에 끝까지 참여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도망치고 싶어 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극적인 반전으로 이것을 깨닫는 시점에 그레이스는 우주에서 새롭게 만난 외계인 친구인 로키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로키를 그리고 로키의 외계인 민족(?)을 구하러 간다.
우리가 아는 수많은 위인들은 과연 어땠을까?
소설 <칼의 노래>를 이전에 인상 깊게 읽었는데 이 소설은 우리나라의 가장 위대한 영웅 중 하나일 이순신 장군의 고뇌와 동정심 같은 인간적인 면모들을 입체적으로 묘사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당연히 만나본 적이 없으니 알 수는 없지만 이순신 장군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위인들이 알고 보면 사소한 일로 시작한 일이 생각보다 잘되거나 커졌을 수도 있고, 두렵거나 무섭지만 한 발 내디딘 무언가가 위대한 행동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소설의 주인공 그레이스도 결국 무섭지만 한 순간 자그마한 용기를 낼 수 있는 지혜와 선량함이 있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각이 있었다.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개인적으로 아주 동감하는 말이다.
잔다르크가 지금 사회에 태어났으면 혁명을 이끌 수 있었을까?
마찬가지로 현대의 환경, 인권 운동가가 중세 사회에 태어났으면 지금과 같은 유명세를 얻긴 힘들었으리라.
시대는 필연적으로 사람들에게 불만족을 낳고, 이러한 불만족 속에 사람들의 믿음은 싹트며, 이러한 믿음의 집합체는 수렴하며 어떠한 대상을 향한다.
베스트셀러 <팩트풀니스>에는 이런 좋은 말이 나온다.
"악당을 찾지 말고 원인을 찾고, 영웅을 찾지 말고 시스템을 찾아라!"
우리는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영웅을 갈망하며 싸구려 분노를 해소하려고 한다.
그렇게 영웅이 나타나 주지 않을 때는 분노가 마구 발산하며 서로를 미워한다.
하지만 나는 세상을 바꾸는 힘은 잔다르크가 이끄는 혁명의 깃발 아래에 있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중학교 선생님으로 최선을 다하며 학생을 가르치는 따뜻하고 성실한 마음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한 우리의 작은 선의와 지혜가 모여 세상을 바꿀 것이다.
결말이 다소 교조적으로 된 감이 없잖아 있지만,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도 결국 지구를 구하는 것은 위대한 카리스마나 책략이 아니라 주인공 그레이스가 품은 작지만 단단한 우정이었다.
책의 내용 중 영웅서사 외에 인상 깊었던 몇 가지를 추가로 써보자면,
인류구원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이끄는 절대권력의 소유자 스트라트가 경영학이나 과학 전공자가 아니라 역사학 전공자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상당히 흥미로웠다.
스트라트는 어찌 보면 악역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사실 이 사람을 단순히 악역으로만 보기는 힘들다는 느낌을 많은 독자들이 받으리라 생각한다.
이 사람이 결국 주인공 그레이스를 강제로 자살 임무에 참여시키는 데에는 전형적인 공리주의적인 논리가 작동한다. 인류 전체를 구하려면 너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
그런 사람의 전공이 '역사'라... 역사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서로 미워하고 죽이고 투쟁하는 일을 반복했고 이러한 지옥 속에서 잠시나마 위안을 얻는 방법은 결국 공리주의적인 희생뿐인 걸까...
로키라는 외계인을 통해 우리가 서로 다른 존재를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자연스럽게 던지는 소설의 방식도 흥미롭고 인상 깊었다.
어찌 보면 흔한 방식이기도 하지만 따뜻한 인류애가 느껴지는 서술 전달은 언제나 읽는 사람을 즐겁게 한다.
소설 전반에 녹아있는 작가의 유머감각도 상당해서 중간중간 실소를 머금으며 보기도 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 별점: 4/5
이유: 일단 글을 잘 써서 술술 읽힌다. 아마도 대체로 호불호 없이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약간의 과학적 배경지식이 필요한 게 장벽일 수도 있는데, 사실 다 이해 못 해도 읽는데 문제가 없기에 쿨하게 넘기면서 읽으면 된다 ㅋㅋㅋ 나도 솔직히 각속도 이런 얘기 나오면서 우주선에서 튕겨나가고 이럴 때는 뭔 말인지 잘 몰라서 넘겼다... 그래도 어쨌든 '오 우주선의 위기구나!' 하면서 보면 됨 ㅎㅎ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에서 느낀 감동은 위에서 주절주절 썼으니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