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23년 전, 아들의 다섯 살 크리스마스 때의 일이다. 아들은 받고 싶은 선물을 일찌감치 한 달 전 산타에게 통보했다.
"산타 할아버지, 라이츄를 만나고 싶어요."
라이츄. 그렇다. 아들이 원한 선물은 바로 포켓몬스터 라이츄였다.
그래 너
다섯 살 아들은 만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다.아들에게 포켓몬은 상상이 아니었다. 아들이 원하는 라이츄는 인형이 아닌살아있는 진짜 라이츄였다.
'엄마 착한 어린이한텐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시지? 산타 할아버지가 나 착한 일한 거 다 알겠지? 밥 안 남기고 다 먹었어. 산타 할아버지한테 꼭 말해 주세요.'
그야말로 기승전산타도 아닌 산타 승전 산타였다.
처음엔 좋았다. 그럼 그럼 산타 할아버지는 다 아시지.잘 됐다 싶어 써먹기도 했다. 엄마 말 잘 들어야 산타 할아버지가 오시지.그러던 것이애가 너무 매달리니 조금걱정이 됐다. 괜찮을까?저러다 실망하면 어쩌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콩알만 하던 고민이 산처럼 커졌다.
'저건 만화야. 다 지어낸 거라고. 살아있는 라이츄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라고말하는 건너무 잔인했다.'산타 할아버지가 더 좋은 선물을 주셨네.' 다른 선물로 대체하는 방법이 제일 손쉽겠지만 실망할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에 산타는 없어.'라고 하기엔아직 어렸다.
어떡하지. 아들이 밤마다 산타 할아버지에게 기도를 올릴 때나는옆에서 손톱을 잘근거렸다. 큰일이네. 라이츄를대체어디서 뎆고 오냐고.
귀여운 녀석
크리스마스이브가 됐다. 아들은 라이츄와 만날 생각에 들떴다. 그럴수록곤란했다. 어떡하지. 이대로는 위험해.뭐라도 해야 되는데. 일단 라이츄 인형을 샀다. 왠지 이 상황에 부족할 거 같아 좋아하는 공룡 모양의 장난감을 하나 더 샀다.
'그래 이 정도면 좋아하겠지. 설마 진짜 살아있는 라이츄를 기다리는 건 아닐 거야... 긴 뭐가 아닐 거야야. 지금 한 달 넘게 라이츄 타령만 하는데.원하는 건진짜 라이츄잖아. 인생 5년 차에 산타는 없어라고 동심을 파괴할 수도 없고. 아냐, 생각해봐.사실 산타는 언젠간 깨질 믿음이잖아. 몇 년 빠르다고 크게 문제 될 건 없지않을까.. 는 또 무슨 말이야.문제가 없긴 왜 없어. 애한테 뭐 하는 짓이냐고.'
밤이 오고 아들은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자 아들이 소란을 떨며 달려왔다.
"엄마 이거 봐봐.이거, 이게 뭐예요?"
손에는 라이츄 인형과 편지 한 통이 들려 있었다.
"음, 이게 뭐지? 산타 할아버지 편지인가?"
"읽어봐 엄마. 빨리요.읽어 주세요."
나는 아들을 내 다리 사이에 앉히고 봉투를 열었다.
"어디 보자. 착한 어린이 현이에게"
아들은 깜짝 놀라며 손가락으로 편지지를 가리켰다.제 이름 석자는 그릴 줄 알았던아들이편지 맨 윗줄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던 것이다.
착한 어린이 현이에게.
안녕. 나는 라이츄야. 네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산타할아버지에게 들었어. 착한 일을 엄청 많이 했다며. 나도 멋지고 착한 너를 만나고 싶어. 그런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별에 악당이 쳐들어왔어. 내가 지금 너를 만나러 가면 우리 별은 악당에게 파괴될 거야. 미안하지만 그래서 너를 만나러 가지 못할 것 같아. 대신 나와 닮은 인형을 보낼게. 나라고 생각하고 많이 사랑해 줘. 우리 다음에 꼭 만나자.
- 라이츄가
편지를다 읽고 나는 잠시 그대로 있었다. 편지를 읽는 내내 아들은 내 앞에 앉아 편지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이 믿을까. 믿어라. 믿어라.
잠시 후, 아들은 와앙하고 크게 울며 뒤돌아 안겼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라이츄가 악당을 물리치길라이츄가 사는 별에 평화가 오길 진심으로 바랐다. 아들은 편지를 믿었고 슬펐지만 이해했다. 당부대로 대신 보내준 인형을사랑했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아들과 라이츄 사이엔 뭐랄까,둘만의 끈끈한 우정이존재했다.
포켓볼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아들은 드디어 산타의 진실을 알아챘다.친구에게 들은걸까? 크리스마스가 가까워 오던 어느 날 네 살 아래 동생이 들을까 조심하며은밀하게 말했다.
"사실 산타는 없지? 엄마랑 아빠가 선물사주는 거지?"
아들 말로는 일곱살 때부터 좀 의심스러웠다고 한다. 내가 그렇게 연기를 못했나. 네 아빠가 좀 어설프긴 했어. 세상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듯이제 본인은 어린애가 아니라는 듯 건방지게 굴더니문득물었다.
"그런데 엄마, 나다섯 살 때 라이츄한테 받은 편지 말이야. 그럼 그건 누가 쓴 거야?"
누가 썼겠니 꼬맹아. 아들은 그날 다섯 살 그때처럼 울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분해서 울었다. 오랫동안 믿었던 라이츄의 편지가 사기란 사실을 깨닫고허무해 울었다.거봐라. 동심은 중요한 거야. 산타를 계속 믿었으면 너와 라이츄사이의 우정이 깨질 리는 없었을 텐데.
가끔 우리는 이 이야기를 나눈다. 아들은 나를 사기꾼 엄마라놀리고 나는 아들의 동심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노고를 스스로 치하한다.아들은 자신의 진심은 어떡할 거냐묻고 나는그때마다 다 큰 아들이 귀엽고 즐겁다.
지금이라면 산타 할아버지를 섭외하거나 라이츄 인형옷을 구해 입고 좀 더 그럴싸하게 크리스마스 연극을 했을지 모르겠다. 그때는 그만한 창의성도 없고 여건도 안 됐지만 동심을 지키기 위해 어른은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법이니까. 어차피 깨질 환상이라도 산타를 기다리며 자란 아이가 나중에 누군가의 산타가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니까.
나중에 혹시 손주가 생겨다섯 살에만 꿈꿀 수 있는 선물을 원한다면 그때도 동심을 지키기 위해 평생 간직할 추억 하나 만들어 줄 작정이다. 대를 물리는 사기. 아니지, 대를 이어 지켜주는 동심.10년 안에 내게도 손주가 생길까. 상상이 안간다.그나저나 요즘 아이들은 몇 살까지 산타를 믿을까,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