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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un 13. 2023

첫사랑이 끝난 걸 알았다

이제니,<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오랫동안 사랑의 기준은 첫사랑이었다. 첫사랑에게서 연애하는 법을 배웠다. 짝사랑이었으니 그가 가르쳐준 것은 아니었다. 사랑이 사랑을 대 물려 가르쳤다.


그 사람은 버스 제일 뒷자리에 앉았다. 누군가와 사을 할 땐 버스 로 갔다. 그와 같이 본 영화는 '아마데우스'. 사랑할 때마다 모차르트 이야기를 꺼냈다. 광기, 천재성, 영감, 음악,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때에만 사랑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공중전화 잔액 숫자가 100에서 80이 됐을 때부터 울었던 것 같다. 나는 "이제 가요. 안녕히 계세요."라고 말했다. 60원이 됐을 때 수화기 너머로 "전학 가서도 공부 열심히 하고 서울에 올라오면 연락해."라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2 짝사랑한 그와 헤어지는 중이었다. 짝사랑은 만나지 못해도 할 수 있는데 미련을 두면 떠날 수 없어 이별했다. 40원을 남고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전화기 위에 올려둔 채 공중전화박스에서 나왔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으므로 남기는 편을 택했다.



그는 교회 전도사님이었다. 나와는 여섯 살 차이가 났다.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그가 중학교 3학년 눈에는 나이 많은 어른으로 보였다. 내가 중학생이 아니라면 내 머리가 바가지 머리가 아니라면 내 키가 조금만 더 컸다면 분명히 그와 사랑할 수 을 것 같았다. 


성경퀴즈 대회에서 1등을 한 것은 사랑의 힘이. 상품으로 영어 성경책을 받았다. 성경을 통독해도 선물로 성경을 주고 성경을 공부해도 성경을 주는 까닭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그때는 괜찮았다. 검은색 가죽표지를 넘기면 그가 적은 내 이름이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성경구절과 함께 적혀 있었다.


나는 매일 저녁 성경책을 읽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가죽의 감촉. 표지를 넘기고 경건한 마음으  장만 읽었다. 그가 적은 내 이름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그가 빛이고 어둠이던 시절. 창세기 앞에 그가 있었다.



아빠엄마 얼마나 시간을 두고 상의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사 닷새 전에 통보받았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다. 아빠가 시골에 가서 개척교회를 한다고 했다. 아빠는 하나님이 '그곳'으로 가라 명령하셨다 했고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처럼 주저 없이 서울 살림을 정리했다. 주민등록 등본 앞 뒤로 빈칸이 없을 만큼 이사를 다녔지만 이번엔 달랐다. 아빠 혼자 들은 하나님의 명령이 내게도 적용되 사실이 부당하게 느껴졌다.


나는 안 간다 고집부렸다. 예상 못한 반응에 엄마 놀랐다. 이사와 전학을 마음대로 결정한 아빠가 미웠다. 나는 단식하고 통곡했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이 힘을 발휘했다. 고민 끝에 엄마는 친한 집사님 댁에 나를 하숙시키기로 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와 떨어졌다. 3개월이 지 전학하기로 했다. 엄마 없는 하숙살이는 서러웠고 딸 없는 시골살이는 글펐던 것이다.


서울에서 이사한 곳까지는 300 킬로미터. 1986년 기준으로 고속버스를 타면 6시간 기차로 4시간. 편지는 그보다 긴 3일이 필요했다. 하루에 오고 가려면 피곤지만 불가능하지 않은 길. 하지만 거리는 물리적으로만 계산되지 않는다. 내가 떠나온 300 킬로미터는 나온 고향이고 만날 수 없는 짝사랑이자 울면서 남긴 40원이었다. 나는 고향에서 추방당한 자의 습으로 어둔 버스터미널에 내렸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 품은 채 다.



에 들어가고 첫여름방학, 서울에 갔다. 중학교 친구를 만나고 교회를 방문했다. 3년 만에 그를 만났다. 나도 성인이 됐다는 것을 알리려 아이스크림이 들어간 비엔나커피를 마셨던가. 5 센티미터 굽이 박힌 흰 구두가 불편해 테이블 아래 발을 꼼지락거렸다.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나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어 커피를 남겼다. 옆에선 커다란 선풍기가 고개를 돌려가며 바람을 보내고 있었다. 선풍기 바람에 이틀 전 말은 긴 파마머리가 날리고 엉켰다.


그는 내게 신입생 생활은 어떤지, 남자친구는 있는지, 오늘 덥네 날씨 얘, 교회는 잘 다니니 라고 물었다. 는 그작은 교회 부목사로 가게 됐단 소 듣고 축하해 주었다.

말이 드문해졌을 때 그의 앞에 놓인 커피 잔을 응시하며 물었다. "요즘도 버스 뒷자리에 앉으세요?" 그는 무슨 말인가 싶어 잠시 각하더니 말했다. "요즘엔 버스를 잘 안 타. 지하철 타고 다녀."



첫사랑이 끝난 걸 알았다. 맙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당신 때문에 외로웠지만 당신 덕분에 낯선 곳에서 힘든 시간 버텼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중전화 근처를 서성이며 걸지 못한 전화 보내지  편지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는 말들일뿐'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더 이상 사랑이 아니어서 슬펐지만 첫사랑이란 그런 니까 다정한 척 웃으며 헤어졌다. 안녕히 세요. 방학되면 놀러 올게요. 다음에 또 연락할게요. 다정한 인사를 '세 번도 넘게 했다.'



눈을 맞으며 걸었던 거리. 충정로에서 서울역, 삼각지를 돌아 한남동으로 이어지던 발자국. 그는 걷는 것을 좋아했고 나는 그와 걷는 것이 좋았다. 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빙판을 밟고 넘어질 뻔했을 때 그가 손목을 손목 위 팔뚝을 잡아 주었다. 


내게 그 길은 덕수궁 돌담길 같은 것이어서 겨울이면 떠오르는 군고구마 같은 것이어서 사랑이 끝난 후에도 잊히지 않았다. 손부터 잡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사랑이 사랑을 가르쳤다. 






헤어질 때 더 다정한 쪽이
덜 사랑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나는
더 다정한 척을, 척을, 척을 했다.
더 다정한 척을 세 번도 넘게 했다.

안녕 잘 가요. 안녕 잘 가요.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는 말들일뿐.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이제니,<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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