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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Sep 19. 2023

4월 21일



화요일이었다. 커피를 한 잔 내리는 동안 버릇처럼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뉴스란은 지난주 치른 선거로 시끄러웠다. 선거 조작, 부정선거라 적힌 제목으로 기사가 여러 개 올라와 있었다. 선거가 끝난 풍경은 처음 투표를 했던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승패가 나뉘는 일 중 정치만큼 변명 많고 뒤끝 긴 싸움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일일 확진자 수는 한 자리였다. 지난 2월엔 상점 대부분이 문을 닫았다. 개학까지 연기됐던 3월에 비해 4월은 상대적으로 안전해 보였다. 식당과 거리에 사람이 많아졌단 기사엔 '아직 안심하기 이르다' ' 제발 마스크 좀' 'K방역 자랑스럽다' 등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가급적 외출을 삼가지만 이 정도면 다행이란 분위기였다. 포기와 적응으로 얻어낸 평온은 언제 깨질지 모를 불안이기도 했다.


엄마는 2주 전부터 소화가 안된다며 죽을 달라고 했다. 간 소고기와 다진 야채를 넣어 끓인 뒤 소분해서 냉동했다. 전자레인지에 돌려 방으로 들어갔더니 아빠가 손잡이를 돌려 침대 머리를 올리고 있었다. 침대 한쪽이 올라갈수록 엄마는 아래로 접히듯 내려다. 아빠가 두 팔로 허리를 안아 엄마를 올려 앉혔다. 다리를 쓸 수 없게 되면서 엄마는 혼자 앉을 수 없었다.

5년 전 거실에서 넘어져 고관절이 부러졌을 때 의사는 다리만 보면 어렵지 않은 수술이지만 간경화에 당뇨까지 앓고 있는 엄마에겐 목숨을 걸만큼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어렵게 고비를 넘긴 후에도 2,3주면 된다는 회복기간이 두 달 넘게 걸렸고 다리도 완전히 낫지 않았다. 끌며 걷더라도 집 안에서나마 조금씩 움직일 수 있는 걸 위안으로 삼았는데 6개월도 안돼 통증이 시작됐다. 약해진 뼈가 박아놓은 철심을 감당하지 못하고 쪼개졌다. 철심을 빼면 다리를 쓸 수 없다는 말에 엄마는 몇 달 동안 버텼지만 결국 통증이 이겼다. 이번엔 다리를 잃기 위해 목숨을 걸고 위험한 수술대에 올라야 했다.


엄마 턱 아래 수건을 두르고 침대에 붙어 있는 식판을 세워 펼쳤다. 아빠가 혈당체크기를 가져오고 아침에 먹을 약을 꺼냈다. 엄마 옷을 넣어두던 서랍은 약서랍이 됐다.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고 1년쯤 지나 엄마는 가 옷을 대부분 정리했다. 깨끗한 옷은 기부하고 싶다는 엄마를 처음엔 말렸다.

엄마가 다시는 두 다리로 걸을 수 없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슬픔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옷을 버리고 기부하자는 말에  '그러지 마. 맘 아파'라고 하자 '보고 있으면  맘이 아프지'라고 엄마가 말했다. 괜찮아지면 입고 놀러 가자며 사옷이 여러 벌이었다. 한때 그 옷은 희망의 상징이었시간이 지나며 희조차 추억이 되어갔다. '저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지.'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다 서글픈 확인이었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머리를 말리고 마스크를 챙겨 출근했다. 지하 1층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에 비치된 소독제를 눌러 꼼꼼하게 손을 비볐다. 주차장으로 걸어가오늘이 21일인 게 떠올랐다. 21일은 퇴직 전 남편의 월급날이었다. '퇴직한 지 벌써 4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월급날이 기억나다니. 하긴 20년 넘게 그랬으니 아무래도 21일은 평생 월급날로 기억하겠군'이란 생각이 들었다.

학원에 도착하자마자 창문을 열고 소독부터 시작했다. 지난 2월과 3월엔 한 달에 2주만 수업을 할 수 있었다. 그 사이 학원생은 절반으로 줄었다. 학교가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되면서 학원도 온라인 수업을 하는 곳이 많아졌만 혼자 운영하는 작은 교습소에선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손잡이 책상 의자 바닥에 소독제를 뿌리며 이전으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불가능할지 모른단 걱정이 함께 찾아왔다.



아빠의 문자를 확인한 건 받은 지 20분이 지나서였다.아빠가 '이상하다'라고 한 걸 보니 엄마에게 간성혼수가 온 모양이구나 생각했다. 마는 일 년에 서너 번씩 간성혼수가 왔다. 약해진 간이 암모니아를 완전히 해독하지 못해 남은 암모니아가 엄마 몸속을 제멋대로 돌아다녔다. 몸에게 암모니아는 독소였다. 독에 당한 몸은 여러 가지 이상 반응을 일으켰다. 암모니아가 대뇌로 들어가 신경을 마비시켜 간성혼수가 왔다. 간성혼수가 오면 눈은 뜨고 있어도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몸을 가누지 못해 입을 벌린 채 목이 뒤로 넘어갔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엄마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야 저녁에 가도 될지 지금 가야 할지 결정할 수 있었다. 바로 가야 한다면 6시까지 잡힌 일정이 곤란했다. 엄마가 아픈 후론 일하다 갑자기 연락을 받고 집이나 병원으로 뛰어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사정을 부탁하고 맡길 사람을 찾아야 했다.


음 간성혼수로 쓰러졌을 땐 엄마가 곧 죽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 12년 동안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엄마도 나도 쉽게 죽지 않는다는 걸 배웠다. 엄마는 의사가 자꾸 살려낸다며 병원에 가지 않겠다 했다. 여자 병실은 아빠가 있기엔 불편한 점이 많았다. 급한 업무를 처리해야 할 땐 아빠와 간병인이 대신했지만 대부분 내가 엄마 곁을 지켰다.


전화가 연결되는 소리를 들으며 익숙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수업을 마치고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오늘은 병원에서 자야 할 테니 집에 들러 필요한 것을 몇 가지 챙겨야겠다 생각했다.


"아빠 어디야? 아직 집이야? 먼저 병원 가세요. 엄마는 어떤데?"​
"아니, 그게 아닌 거 같아. 숨을 안 쉬어. 엄마가 숨을 안 쉬어.”

아빠가 여기까지 말하고 흐느꼈다.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가 왜 숨을 안 쉬어? 내가 갈게. 지금 바로 갈게요."

순간 이명이 울렸다. 아빠가 하는 말이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심장은 믿지 않는데 목소리가 울음으로 변했다. 전화기를 든 손이 부르르 떨렸다. 4월 21일 오후 1시 40분경이었다.


엄마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빠가 엄마 옆에 많이 운듯한 얼굴로 서 있다 내가 방에 들어가자 말없이 방을 나갔다. 엄마는 몇 시간 전 나가면서 본모습 그대로였다. 가슴까지 이불을 덮은 채 마치 잠든 듯 편안한 표정이었다. 나는 한 손으로 엄마의 볼을 감싸며 조용히 '엄마' 하고 불렀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엄마 볼이 따뜻했다. 엄마, 내 말 들려. 엄마 정신 차려봐, 엄마의 이마를 짚고 얼굴을 쓰다듬고 손가락을 코 밑에 댔다. 목 여기저기를 더듬으며 어딘가에서 분명히 몰래 숨어 뛰고 있을 맥박을 찾아 헤맸다. 엄마 엄마. 가슴에 손을 얹고 엄마를 가볍게 흔들었다. 엄마 내 말 들려. 엄마의 몸은 닿는 곳마다 부서질 듯 연약했다. 살이 모두 말라버려 헐렁해진 살갗 안의 뼈가 모양대로 만져졌다.


엄마는 언제부턴가 하루 대부분 눈을 감고 지냈다. 내가 출근하고 퇴근할 때만 잠시 눈을 뜨고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날엔  뜨지 못하고 '다녀올게'라는 인사에 '응' 이라고만 대답했다. 자기 전에 들어가면 이미 잠든 날이 많았다. 엄마가 건강하고 활기찼던 시간들은 빨리 잊혔다. 60년을 건강하게 살았지만 그런 시간이 있었는지 모르게 엄마의 모습을 바꿔놨다.

기억하는 엄마는 과거를 넘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60킬로그램이던 몸무게는 40킬로그램까지 빠지고 다리는 근육이 사라져 앙상했다. 엄마가 말하기 힘들어하는 날엔 엄마의 머리카락을 만지곤 했다. 아빠가 잘라준 모양을 늘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변하지 않은 건 머리카락 감촉뿐인 것 같았다. 엄마는 머리카락이 얇고 색이 연했다. 연약한 부드러움이 손끝에 전해지면 그 순간만큼은 예전의 엄마 같았다. 눈은 감고 있지만 엄마가 내 손길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엄마의 죽음은 인정되기까지 절차가 필요했다. 첫 조문객은 119 응급대원이었다. 응급대원은 환자가 집에서 돌아가시면 경찰서에 신고해야 된다고 말했다. 경찰이 곧 형사가 올 거라 했다. 엄마의 죽음은 사건이 되고 엄마가 있는 방은 사건 현장이 됐다. 남부경찰서 소속 형사 두 명이 왔다. 한 명은 방으로 들어가고 다른 한 명은 나와 아빠와 함께 식탁에 앉았다.

"마음 안 좋으실 텐데, 의례적인 거라. 그러니까 지병이 있으시고 오전까진 의식이 있으셨단 거죠?"

이미 응급대원과 경찰에게  이야기였다. 형사는 작은 수첩을 꺼내 볼펜을 딸깍거리며 나와 아빠를 번갈아 쳐다봤다. 나는 식탁에 팔꿈치를 세워 머리를 짚고 두 눈을 감은 채 손으로 이마와 눈두덩을 여러 번 문질렀다. 눈꺼풀 안쪽이 뻐근하고 두통이 몰려와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눈꺼풀 밑으로 엄마가 간암 판정을 받을 때 보았던 MRI 영상이 떠올랐다. 모니터 속에서 간은 크고 검은 덩어리였다. 생명이 살 수 없는 죽은 땅의 모습을 한 덩어리 위에 옅은 검은색 반점이 보였다. 다 죽어가는 땅에 기어코 뿌리내린 암세포였다. 눈꺼풀 속에서 반점이 하나둘 늘어나더니 어느새 덩어리 전체를 뒤덮었다. 반점으로 덮인 그것은 곧이어 산산이 부서지고 점으로 흩어졌다. 흩어진 들은 재처럼 흐려져 가볍게 날아다니며 소멸했다.


슬픔은 사건이 되어 진술되었다. 아빠의 말을 들으며 형사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고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 사이 흰색 가운을 입은 검안의가 왔다. 혹시 코로나로 사망한 경우 장례식장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형사는 경위서 작성을 위해 누군가 경찰서로 가야 한다고 했다. 아빠가 따라나섰다.

"코로나 검사 이상 없으면 장례식장에서 차를 보낼 겁니다. 한 시간 안에 올 거예요. "


방에 들어가니 엄마가 침대에서 바닥으로 내려져 있었다. 바닥에는 얇은 이불이 깔려 있고 응급대원이 두고 간 것으로 보이는 하얀 천이 덮여 있었다. 서랍을 열어 고무줄 바지를 찾아 엄마에게 입혔다. 엄마는 근육 빠진 앙상한 다리 보이는 걸 싫어했다.


조용히 엄마 에 누웠다. 엄마 얼굴에 내 얼굴을 갖다 댔다. 한 손으론 엄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다른 손으로 엄마의 가슴을 지나 어깨를 안았다. 따뜻했다. 엄마가 여전히 이 공간 어딘가에 머물러 있을 것 같았다. 들을 수 있기를 바라며 '엄마 미안해, 사랑해'라고 말했다. 엄마를 간병하며 위급한 순간마다 엄마의 죽음을 상상했다. 현실이 되었을 때 나는 내가 한 번도 제대로 죽음을 상상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래도 갈 땐 편안하게 가셨네'라고 말했다. 엄마는 정말 편안하게 갔을까. 편한 죽음이란 게 있을까. 지켜보는 이 없이 가는 길이 외롭진 않았을까 궁금했다. 작은 희망마저 모두 사라지고서야 엄마는 병원에서 죽고 싶지 않다던 소망 하나를 이뤘다. 심장은 천천히 약하게 뛰며 엄마를 잠재우고 엄마 따라 잠들었다. 엄마는 마지막 숨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의 얼굴에 내 눈물이 닿았다. 엄마를 데우지 못하는 허망하고 뜨거운 눈물. 죽음은 아직 희미한 온기를 남겨 두었다. 제 나는 후회와 이별의 온도를 안다. 나는 온기가 서서히 모두 사라질 때까지 그대로 엄마를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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