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20 일이면 성아 할머니께서 회비를 주러 학원에 오신다. 성아가 올해 중3이니 햇수로 5년째이다. 직업이 학원선생이고 그 일로 생활비를 버니 돈을 주고받는 일이 이상할 게 없는데 가르치는 행위가 돈으로 환산되는 현장은 여전히 쑥스럽다. 할머니는 이런 내 맘을 아시는지 오실 때마다 박카스 한 병, 사탕 한 봉지, 요구르트 한 줄을 같이 갖고 오신다. 들고 오신 것을 나눠 먹으며 짧은 이야기를 나눈다. 회비를 받으며 쑥스러웠던 마음은 곧 오래 알고 지낸 다정한 이웃을 만난 기분으로 바뀐다.
성아가 할머니와 처음 학원에 온 날이 기억난다. 표정은 순한데 눈빛엔 경계가 가득했다. 할머니는 장바구니 가방에서 종이 몇 장을 꺼내셨다. 가족 연락처와 스쿨뱅킹 계좌번호, 자동이체 확인서, 개인 정보 수집 동의서, 방과 후 수업 신청 등 새 학기에 내야 하는 각종 유인물이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하시는 할머니께 설명을 드리는 것보단 직접 하는 편이 빠를 것 같아 적어 드렸다. 6학년 때도 중학교 입학할 때도 보호자 사인을 대신했다.
성아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생활을 힘들어했다. 수업시간에 교실을 나가 교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친구와 놀지 않고 말도 하지 않았다. 눈도 제대로 뜨지 않고 어리숙하게 굴었다. 6학년 때엔 학교에서 ADHD 상담을 권유해 몇 달간 약을 먹었다. 애가 없어졌다는 할머니 연락을 받고 형들 따라 반딧불이 축제에 간 성아를 찾아 다닌 적도 있다. 할머니가 늦은 시간 학원에 오셔서 성아 얘길 하며 우셨을 땐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해 휴지를 건네고 곁에 앉아 듣기만 했다.
그러던 아이가 중학교에 가면서 달라졌다. 가르쳐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나는 성아가 수학을 좋아하고 사람을 대하기 싫어 일부러 멍청하게 보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2학년이 되고 시험을 치면서 실력이 드러났다. 학교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학교 아이들 말을 들어보면 수학 선생님이 성아를 아끼고 공부를 잘해 친구들도 성아를 인정한다고 한다. 그래선지 대답하기 귀찮을 때면 일부러 빛을 빼고 흐리멍덩하게 눈을 뜨던 아이에게 점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번 달에도 어김없이 할머니가 오셨다. 얼굴 축이 많이 나신듯해서 물었더니 며칠 감기를 앓으셨단다.
"할머니가 건강하셔야 성아가 든든하죠. 공부 열심히 합니다. 할머니가 잘 키우셔서 철이 났어요. 인물도 점점 좋아지고요."
지난달에도 지지난달에도 한 말인데 들을 때마다 기뻐하신다. 추석 잘 쇠라며 박카스 한 상자를 주셔서 즉석에서 할머니와 한 병씩 나눠 마셨다.
하루 지나 올해 고3인 제자 둘이 찾아왔다. 추석선물이라며 젤리 두 봉지를 건넨다. 덩치는 산만한 녀석들이 하는 짓은 여전히 귀여워 아직도 내 눈엔 처음 봤던 열두 살 같다. 하나는 해군 고등학교를 다녀 엊그제 배에서 내렸다 하고 하나는 수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려준다. '6학년 때까지 구구단 엇갈려하던 녀석이 사람 됐구나. 단원평가 20점 맞았던 거 기억나냐' 하며 추억을 핑계삼아 놀렸다. 애들은 "쌤, 쫌." 두 글자로 입을 막더니 그땐 철이 없었다며 이제와 미안하단다.
자랄수록 더 멋있어질 걸 믿었다. 아이들은 믿음보다 더 멋지게 자랐다. 믿는 만큼 자란다고 하던데 아니었다. 믿어주면 아이들은 믿음 이상으로 더 잘 큰다. 동기 중에 혼자 특성화고에 간 윤이 소식이 궁금했다. 고등학교 입학할 때 오고 다음 해도 봤는데 올해는 못 만났다. 친구들보다 조금 빨리 세상에 나가는 아이. 맘 쓰이고 궁금하지만 먼저 연락하진 않는다. 같이한 시간 최선을 다했다고 끈적한 인연이 돼야 한다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떠나고 나는 과거에 머문다. 한번쯤 돌아볼 때 그래 그때 좋았지 그 정도면 충분하다.
내년에 채점 아르바이트를 하러 오겠다며 아이들이 일어선다. 학원 졸업할 때 했던 말을 잊지 않은 모양이다. '면접 합격하겠냐.' 했더니 아는 사이에 왜 이러냐며 너스레를 떤다. 그제 할머니께 받은 세 장 중 두 장을 꺼내 용돈 하라 쥐어 주었다. 지난번에 선생님이 치킨 사주셨다 했더니 어머니가 그러면 안 된다 했다며 한사코 거절한다. '기대 없이 한 좋은 행동이 기쁜 결과를 가져오는 경험을 자꾸 해야 더 자주 착한 일을 하게 된다.'라고 말했더니 그제야 웃으며 받는다.
성아가 교실에서 공부 중이었다. '너도 졸업하면 형들처럼 쌤 보러 와. 대학 가면 아르바이트하러 오고 결혼할 때 연락해. 쌤이 가서 네가 얼마나 사고뭉치였는지 네 짝지한테 다 말해줄게.' 말없는 아이답게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도 입가 가득 웃어가며 삼각비 문제를 푼다. 뭐가 쑥스러운지 지난번에 풀어준 문제를 괜히 다시 묻는다. 분명 성아도 내 믿음보다 더 멋지게 클 것이다.
이번 달엔 할머니께서 주신 회비가 이렇게 쓰일 예정이었나 보다. '70살까지 학원 하세요' 라는 아이들 말이 덕담인지 괴담인지 모르겠지만 아무 때나 들러도 그 자리에 꼭 있을 누군가가 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익숙해지면 잊어버리는 태도와 결심이 있다. 건네받은 따뜻한 인사를 떠올리며 다시 기억해낸다. 박카스 한 병과 젤리. 타우린과 당의 조합, 기운이 번쩍난다. 이런 기운을 다시 선물 받을까 싶어 남은 회비 한 장을 학원 서랍에 넣어 뒀다. 기대가 없어야 더 크게 기쁜 법이지만 기다리며 떠올리는 기쁨도 충분히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