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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May 05. 2023

가난한 열다섯 꿈 많던 나를 만난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1983 년, 마천동에서 서대문으로 이사했다. 같은 집에 세 살던 어른들이 서대문은 잘 사는 동네라며 “좋겠네.” 했다. 꼭대기 우리 집 앞엔 오르막 길 이 내리막 길 뿐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경치 하나는 좋았다.


사람들은 우리 집을 '새시집'이라 불렀다. 고방 유리가 끼워진 새시문을 열면 신발 벗 틈을 두고 두 계단 높이의 마루와 방 한 칸이 이어졌다. 시멘트 바닥 수도 옆엔 짤순이 세탁기, 키 낮은 여닫이 찬장, 곤로 같은 부엌살림이 벽을 따라 기다랗게 줄을 이었다. 골목에는 새시집이 여럿 있었다. 크기만 다를 뿐 한 사람이 만든 것처럼 똑같았. 사람들은 주소 대신 번호를 붙여 불렀다. 우리 집은 새시 2 호였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얼마 앞두고 혜정이 집에 놀러 갔다. 혜정이는 대문에서 사귄 첫 친구다. 혜정이네 집은 우리 집보다 땅에서 세 배쯤 가까웠는데 대문도 있고 현관문도 있고 작은 화단을 가꾼 마당도 있었다. 혜정이는 언니와 방을 같이 써서 불편하다고 했는데 책상 두 개가 들어가고도 둘이 누워 잘만큼 큰 방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우리 집이 가난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내 가난은 공납금을 못내 교무실에 불려 가고 가끔 찾아오는 거지처럼 밥을 빌어 먹는 일이었다. 집에 가니 엄마가 곤로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서서 설거지하던 혜정이네 부엌이 떠올랐다. 온 식구가 한 방에서 같이 자고 찌개 끓는 곤로 옆에서 세수하는 건 우리 집 주변에만 흔한 일이었다.


가난을 자각하며 사춘기가 시작됐다. 새시집이 싫었다. 가난이 불행의 동의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존엄한 가난 아니었다. 그 때 내게 가난은 한계다. 이기 싫은 반점. 숨기고 싶은 약점. 할 수 있는 건 공부밖에 없었다. 내 힘으로 가난을 벗어날 순 없지만 성적은 해 볼 만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새시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옆집 미선이는 제 집 두고 우리 집 마루에서 공기놀이를 하고 아줌마들은 목걸이에 구슬 꿰는 부업을 하며 수다를 떨었다. 골목에선 동생이 친구들과 딱지를 쳤다. 계란 차에선 "계란이 왔어요. 싱싱한 계란이 왔어요."를 반복했다. 아이들은 두부를 사러 나왔다 심부름을 잊고 말뚝을 박무궁화꽃을 피웠다. 새시문과 베니아 방문은 골목 소리를 막지 못했다.


나는 매일 소음과 싸우 집중력을 시험받았다.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이른 저녁을 먹고 일곱 시쯤 잠자리에 누웠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귀를 막으며 꾸역꾸역 잠을 잤다. 그렇게 자고 새벽 두 시에 일어났다.


시간의 배치를 바꾸니 세상이 달라졌다. 몇 시간 전까지 시끄럽던 동네는 잠들어 조용했다. 새벽은 익숙한 곳을 다르게 만다. 공녀에 나오는 벽난로의 마법처럼 스탠드를 켜고 책상에 앉으면 단칸방은 나만의 방이 고 낡은 나무 책상은 멋진 마호가니 탁자가 됐다. 나는 비로소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갖게 됐다.


고입 연합고사 계획표를 제출했을 때 선생님이 부르셨다. "7 시에 자서 2 시에 일어난다고? 왜 이렇게 공부하는데? "


'공부방이 없어서요'라는 말 대신 친구들과 비슷하게 계획표를 고쳤다. 새벽은 은밀해졌다. 새벽은 숨기고 싶은 비밀이자 나만의 비법이었다. 새벽 공부 쌓일수록 마음이 튼튼해다. 벽 속에서는 가난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았다. 마치 든든한 뒷배를 둔 듯 당당하고 나만 갈 수 있는 곳을  듯 신났다. 새벽은 나의 수호천사이 도피처였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야 잠이 오고 어둔 방 불 켜진 책상을 좋아하는 열다섯의 잔재를 내 안에서 감지한다. 막연한 성공을 바라고 가끔은 비장했던 시간들. 나는 그때의 꿈을 얼마나 이뤘을까. 잊었을까. 살면서 힘들 때면 새벽을 찾는다. 이전보다 많이 가졌으나 자꾸 초라해지는 마음을 다독인다. 가난한 다섯 꿈 많던 나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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