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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닮녀 Jul 27. 2022

마법 같은 푸른 맛의 방학

언니의 방학은 어떤 맛인가요? 깨물면 점점 녹아든 스트로베리 그 맛일까요

언니에게 편지를 보낸 지가 꼬박 한 달이 되어가네요. 돌아오지 않는 편지라 하더라도 편지를 쓰겠다고 다른 매거진을 만들며 선언을 했더니, 이번 달은 언니의 편지를 받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이 벌어졌네요. 방학이라 더 바빠진 언니가 편지를 쓰지 못할 수도 있다는 문자를 보냈을 때,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요. 편지는 받으려고 있는 게 아니라 쓰려고 있는 거라 생각하기에, 뭐 내가 쓰면 되지 하고 마음으로 속삭였답니다.



얼마 전 저는 뒤늦게 확산세를 보이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격에 손을 들고 말았답니다. 그날이 언니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죠. 언니를 만나지 못해서 너무너무 아쉬웠지만요. 코로나 바이러스는 제게 세상에서 둘도 없는 소중한 방학을 선물해주었답니다. 결혼과 출산 이후 처음 만나는 방학이었어요.


확진 판정을 받은 저는 방 하나에 산더미 같은 그림책과 노트북을 가지고 들어갔어요. 그곳에서 저는 아침에 눈을 뜨면 남편이 차려주는 밥을 먹어요. 아침을 먹고 또 늘어지게 그림책도 보고 책도 보고, 인스타 세상에 좋아요 하트를 흩뿌려 주어요. 그럼 또 남편이 점심을 차려준답니다. 특별히 남편의 설거지를 배려하여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먹은 그릇을 방 앞에 내놓지요. 그럼 남편은 또 냉커피를 배달해 주어요. 냉커피의 시원함으로 에어컨이 없는 독방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저녁 시간이 돼요. 컴퓨터로 이것저것 일을 하고는 저녁을 먹어요. 샤워를 하고 밤이 되면 즐겨보지 않던 유튜브와 넷플릭스에 빠져서 새벽 2시까지 나만의 시간을 즐겨요. 평소에는 감히 누릴 수 없던 찐 방학이었어요.



한 두 끼 정도 밥을 차리지 않은 날은 있었지만, 여행을 가서도 캠핑을 가서도 아이들 먹이는 일만큼은 거의 제 몫이라 쉴 수가 없었죠. 그런데 온전히 삼시 세 끼를 남편이 차려주는 밥을 먹으며,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책을 보고, 좋아하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즐기는데 아,,, 이런 게 방학이지 싶더라고요. 그렇게 푹 놀고 일주일 뒤에 방을 나오니 (냉장고와 부엌, 화장실을 청소하느라 힘들었지만) 무언가 다시 달려 나갈 힘이 생기더라고요. 진짜 인생의 방학다운 방학을 보냈구나 느껴졌어요.





저희 집 아이들도 방학을 맞이했어요. 예체능 학원만 다니다 보니 사실 시간이 널널해요. 하루에 길면 두, 세 시간 짧으면 한 시간, 심지어 캠핑을 위해 비워둔 금요일은 아무 스케줄도 없는 날도 있답니다. 방학 4일 차에 빈둥빈둥 놀기만 하는 아이들을 보고 남편이 한마디 하더라고요. 학원을 보내야 하는 게 아니냐고요. 아니면 문제집이라도 몇 개 더 풀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요. 남편은 '라떼는 말이야'를 외치며 선행학습이 나쁘지 않다는 자신은 그렇게 공부해서 이득을 보았다는 논리를 주장하더라고요. 싸우고 싶지 않아 '방학은 쉬는 게 방학이지~ '라는 한마디만 하고는 슬쩍 어물쩡 구렁이 담 넘어가듯 지렁이 땅속 들어가듯 넘겼어요.



그러곤 한참 뒤에야 생각이 들더라고요. 방학은 배움을 놓는 것. 잠깐 쉬는 게 방학인데 왜 더 공부하라고 하는 거지? 하는 의문이 들더라고요. 더 똑똑하게 따졌어야 했는데 하고 찌릿한 맘이 들었어요. 그래서 마음을 더 단단히 먹었어요. 더 방학답게 보내리라! 하고요.




배움을 잠시 쉬면서 장기 휴가를 떠나라는 의미의 방학. 물론 그 시간 동안 알차게 학업을 채울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림책 『마법의 여름』같은 방학을 아이들에게 선물하고 싶었어요. 『마법의 여름』은 도심 속에서 심심한 방학을 맞이하고 있는 형제가 외삼촌의 엽서를 받고는 시골 외가로 떠나는 이야기랍니다. 그 공간에서 아이들은 맘껏 뛰어놀고 자연과 하나 되어 느끼고 마법처럼 신기한 나날들을 보내요.


진짜 쉰다는 게 무엇인지, 방학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산다는 게 무엇인지를 몸소 경험하지요. 나무에 맨 손으로 오르기도 하고요. 냇물을 건너보고 낚시도 하고요, 비를 맞으며 진흙을 밝아보기도 해요.


마법의 여름(아이세움 그림책) 후지와라 카즈에, 하타 코시로 글/ 하타 코시로 그림/ 미래엔아이세움
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이런 비는 처음 맞아보았다.
소나기는 마치 하늘에서 뿌리는 샤워 같았고
진흙은 밟을수록 자꾸자꾸 더 밟고 싶었다.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이 도심에서 시골스럽게만 지낼 수는 없겠지요. 그치만요 적어도 방학이라고 미래를 위해, 앞만 바라보며 아이들을 공부와 학업이라는 구석으로 내몰고 싶지 않았어요. 깨우지 않아도 아침 일찍 일어나 동생과 누나와 배 깔고 누워 만화책을 돌려보고, 평소에는 못다 한 유치한 역할 놀이도 가끔 하기도 하고, 보드 게임하며 내가 이겼네, 네가 이겼네 티격태격하다 하하하 웃기도 하고, 해가 저물면 매미 소리가 울창한 밖으로 나가 물소리 벌레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는, 둥그런 달님과 방긋 인사 나눌 잠깐의 여유가 있는 그런 방학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학교 다니느라 학원 다니느라 숙제하느라 학기 중에는 느끼기 어려웠던 여유를 방학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짧은 여름 방학은 아쉬운 대로 도심 속 여유로 즐겨보려고 해요. 또 기회가 닿는다면 기나긴 겨울 방학은 진짜 어디론가 저 구석진 곳으로 떠나 매일 자연과 함께하는 날을 보내고 싶은 욕심도 들고요. 사교육 시장에 있는 언니에게 사교육을 겨냥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교육을 외면하는 듯한 이 이야기가 어떻게 들릴지 궁금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하지만 언니의 사교육은 이런 교육이 아닌 사심을 담은 교육이기에 내 맘을 알아주리라 대 놓고 표현해 봐요.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이었던 것 같아요. 경남 고성 외할머니 댁으로 엄마와 언니와 며칠 묵으러 갔었죠. 아빠는 일하시느라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고만 하셨고요. 시골이라 화장실도 불편하고 여기저기 뜯긴 방충망 때문에 벌레도 많았던 공간, 집에 가고 싶다 생각했었는데요. 다음 날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누가 나에게 마법이라도 건 것 같았다니까요.

 고성 앞바다에 가서 잡아온 '쏙'이라는 새우 비스무리한 갑각류를 푹 쪄서 먹었던 기억을 잊을 수 없어요. 너무 징그럽게 생겨서 먹지 않을 거라 했는데, 한번 맛보고는 이름처럼 쏙 빠져들었던 기억이요. 할머니와 엄마와 언니와 둘러앉아 바구니에 잔뜩 쌓인 갑각류를 먹으며 여름밤 냄새에 취해갔던 기억이요. 푸르스름한 달이 유난히 밝아 보이던 그날의 기억이요. 그날의 바다의 추억과 달 덕분에 방학은 제게 푸른 맛으로 영원히 기억되어 있어요.



언니의 방학은 무슨 맛 일지 궁금해요. 답장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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