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언니의 고향 전주에 다녀오면서 언니 생각이 났어요. 언니에게 편지 쓸 때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어색하지 않게 인사하고 싶은데, 코로나를 앓고 난 언니에게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 괜히 어색해지려고 해요. 어색하지 않아도 될까요? 무소식이 희소식일 거라 믿으며, 사느라 바빠서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 버린 거라고 얼렁뚱땅 둘러대어 보아요. 언니 이제 몸은 좀 괜찮아요? 아프지 않기를요.
언니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한 때에는 꽃내음이 채 가시지 않은 봄이었지요. 도시의 매미들이 요란하게 우는 여름을 지나 높은 하늘에 청량함이 가득한 가을을 통과하고 이제는 펄펄 눈이 내리는 겨울이 되었어요. 2022년도 마음속의 추억 상자의 자물쇠를 열어 고이 넣어두어야 할 때가 왔네요. 언니와의 인연은 작년 이맘때 즈음, 그러니까 2021년 12월 즈음 제가 뜻밖의 다이어리를 선물 받으며, 미리 구비해 두었던 다이어리를 나누며 시작되었죠. 언니와 제가 함께 속해 있던 단톡방에 제가 다이어리를 나누고 싶다 글을 올렸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 소심한 마음을 붙들고 요리조리 어르고 달래고 있었던 찰나, 언니가 손을 번쩍 들어주었던 거 기억해요? 딸에게 주고 싶다고요. 가장 무서운 게 무플이라고 아무도 손을 들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깜깜했던 저였어요. 지금도 고맙고 그때도 참 고마웠어요.
그 아주 작은 계기가 이렇게 인연이 되어 언니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서로에게 편지를 주고받는 소중한 대상이 되었어요. 우리의 인연을 생각하니 훈훈한 미소가 절로 지어지네요. 언니와 함께 한 봄은 작은 행복이 넘쳐나기를 바랐고, 여름은 푸른 맛과 빨간 맛이 어우러지기를 바랐고, 가을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기억을 붙잡기를 바랐었죠. 비록 여름에 예정되어 있던 만남은 저의 코로나 확진으로 눈앞에서 차창 너머로 이별인사를 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지만, 그때 만나지 못한 아쉬움이 저를 광주로 이끌었어요. 덕분에 언니의 공간에서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죠. 언니와 함께한 순간들이 모두 2022년 좋은 순간으로 남아있어요.
브와포레 출판사에 만든 그림책 <좋은 순간에...>에는 아빠와 딸이 나와요. 아빠는 딸에게 다가가 좋은 이야기를 건네고 싶어 하죠. 하지만 딸은 이야기하기 좋은 순간을 기다려달라고 말해요. 아빠는 딸을 기다리며 주변의 동물과 사람들에게 좋은 순간이 언제냐고 물어요. 다들 선뜻 대답하지 못해요. 하지만 이내 좋은 순간을 떠올리기 시작해요.
강아지는 자신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줄 때라고 하고, 자전거 탄 아주머니는 녹색 신호등이 켜지는 순간이라고 하고, 할머니는 오래전 꽤 큰집에 할아버지와 살던 그때가 좋은 순간이었다고 하고, 아내는 당신을 처음 만난 순간이라고 답하죠. 남자는 대답을 듣고 딸에게 돌아가며 생각해요. 좋은 순간은 특별하지 않다고, 바로 지금, 우리에게 있는, 우리 모두의 순간들이 좋은 순간이라고 말하지요.
출판사에서는 소통을 위해서는 서로의 적당한 때를 기다려줄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건네지만요, 책은 보는 사람의 마음이니까요.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언니를 알게 되고 언니와 연을 맺고 언니를 알아가고 같은 책을 나누고 언니의 고민을 듣고 언니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언니에게 마음을 건네고 멀리 있어도 가끔 떠올리고 또 편지를 쓰면서는 언니의 웃는 얼굴을 내내 생각하는 이 순간들이 내게 좋은 순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에게 좋은 순간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곳곳에 흩뿌려져 내 마음이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어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말이죠.
12월에 이렇게 편지를 쓸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마음을 든든하게 하는지 몰라요. 함께 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붙일 순 없지만, 함께 케이크를 나누는 것 이상으로 마음을 나누고 있어 마음이 따스해요. 언니의 좋은 순간에도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언니가 좋은 순간에 내게 답장을 써주세요. 그게 언제가 되더라도 언니의 적당한 때를 기다려줄게요.
P.S 무엇보다 아프지 말아요. 이번 주말은 크리스마스니까요. 남의 생일이 왜 기다려지냐는 신부님의 물음에 아직도 답을 찾고 있어요. 비록 답은 미지수지만 여전히 기다려지네요. 언니도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지나요? 답을 찾으면 좀 알려줘요.
<육 센치 여섯 살> 프로젝트
키는 육 센치 나이는 여섯 살 차이 두 여자. 마흔이 넘어 인생을 조금 알게 된 육 센치 작고 여섯 살 많은 언니와 인생을 좀 안다는 나이 마흔이 되기를 갈망하는 육 센치는 크고 여섯 살 적은 동생이 책 이야기를 편지로 주고받습니다. 언니는 독서교실 선생님으로 동생은 그림책 활동가로 살아갑니다. 책을 매개로 삶을 성찰하고 글을 쓰며 마음을 나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