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춰둔 마음을 봉인해제 하는 그 말
책이 출간되고 한 출판사 대표님께서 연락을 주셨다. 그림책으로 랜선으로 인연이 닿았던 분이 따로 연락을 주셨다. 내가 쓴 글이 좋다며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이야기 나온 김에 시간을 내어 줄 수 있냐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그곳이 달나라라도 갈 기세였다. 내 글이 좋다니, 그런 영광스러운 이야기를 듣다니, 달이 아니라 천왕성이라도 명왕성이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흔쾌히 그쪽으로 가겠다고 했고, 대표님은 사무실이 파주에 있다며 주소를 보내주셨다. 내비게이션을 열어 검색을 했다. 소요시간은 1시간 20분가량이었다. 지방도 아니고 수도권에 있는데 1시간 20분쯤이야 나는 가볍게 여겼다. 약속날짜가 다 되어서야 지도를 살펴보는데, 헉 80km 떨어진 곳이라니... 얼마 전 강의하러 갔던 인천까지도 40km라 멀다고 생각했는데, 그 배를 가야 닿을 수 있는 곳이 파주였다. 하... 막막했다. 그래도 가야 했다. 나에게 제안해 준 그 마음에 가 닿고 싶은 내 마음을 외면할 수는 없었기에.
아침부터 서둘렀다. 서울을 관통하여 다리라는 다리는 웬만해서 다 지나는 그런 코스였다. 서울의 지리를 잘 모르는 1인으로서 청담대교, 한남대교, 마포대교 그야말로 다리의 연속이었다. 한강을 끼고 직접 운전하는 건 처음이라 긴장할 대로 긴장했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운전면허도 없던 내가, 면허가 있어도 남편이 없으면 서울도 못 가던 내가, 직접 핸들을 잡고 다리를 건넌다는 건 운전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작고 작은 나만의 섬에서 다리를 건너 더 커다란 세계로 나아가는 느낌이었다. 조금 더 넓어진 세상에 내 힘으로 나오는 아주 사소한 즐거움과 짜릿함을 만끽하며 운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사고라도 나면 다음번 세상에 나오는 일이 아주 늦어질게 뻔하니까. 초행길이었지만 직진에 직진에 직진을 하면 되는 코스라 무사히 도착했다.
처음 가본 출판의 도시 파주는 매력적이었다. 높지 않은 빨간 벽돌 건물들이 아담하게 줄지어 있고, 그 사이사이 풍성한 나무들이 늘어선 모습이 참 이국적이었다. 책과 어울리는 고요하고도 적막한 분위기, 블록을 지날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출판사의 이름과 나에게 퇴짜를 놓았던 출판사의 이름들이 나를 반겨주는 듯했다. 이런 곳에서 책을 만드는 기분은 어떨까? 드라마에서 보았던 출판사 느낌에 심취하며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야말로 초면이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 둘이 만나 두런두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정하고도 솔직하고 거침없는 이야기들이 오가며 마음이 시원해졌다. 아, 역시 먼 길을 돌아 돌아오기를 잘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사무실을 나와 근처 카페이자 식당이자 출판사이자 목공소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리 준비해 놓은 메뉴로 맛있는 식사를 하고 마음이 통하는 이야기가 더 오갔다. 출판에 관한 이야기, 글에 관한 이야기, 작가에 관한 이야기, 홍보 이야기, 함께 사는 이야기, 나눔에 관한 이야기, 미래에 관한 이야기. 많고도 많은 이야기가 우리를 연결해 주었다. 그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한마디가 있었다.
"할 수 있어요"
대표님은 내 글이 좋다며 그런 글을 더 쓰라고, 에세이도 그림책도 소설도 좋으니 써보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문학적 글쓰기는 타고난 사람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할 수 있을까요'라고 되물었고 대표님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 말을 건넸던 것이다. 할 수 있어요라고. 진짜 할 수 있을지, 언제 할 수 있을지, 얼마나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나는 여전히 물음표가 가득한 마음이지만, 대표님의 말을 듣고 나니 그 많은 물음표 속 아주 작은 것 하나가 더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시작해보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용기. 내 마음속에 있었지만 차마 꺼내지 못하고 봉인되어 있던 그 보석함을 대표님이 열어주었던 것이다. 마음 봉인해제.
다시 본캐로 돌아와야 하는 두 아이의 엄마인 나는, 짧은 만남을 뒤로한 채 다시 한강 위로 자리 잡은 수많은 다리에 나를 태운 네 개의 바퀴를 뜨겁게 굴렸다.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얼른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빨리 집에 가서 뭐라도 쓰고 싶었다. 에세이라도 그림책이라도 소설이라도. 용기를 내어 뭐라도 쓰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의 이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오늘의 내 다짐을 잊지 않기 위해 일기와 에세이 그 어딘가에 있는 이 글을 기록에 남겨보는 중이다.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진솔한 그 눈빛,
그 마음을 야금야금 아껴 먹으며 무어라도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