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닮녀 May 01. 2024

이번 역은 풍선나라입니다

없을 법한 지어낸 이야기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 차의 마지막 정류소입니다. 잊으신 물건 없이 안녕히 가십시오."  졸음에 취해 분명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그대로 푹 잠에 빠져버렸다. 잠시 뒤 누군가 나를 흔들었다.


"자, 도착했으니 그만 내려요. 나도 볼일 보고 다음 운행 준비해야 하니까요. 근데 그 신발 신고 왔어요? 영 불편해 보이는 데, 잘못하다간 쫓겨날 수도 있으니 여기 이 비상용 신발 신도록 해요. 돌아갈 때 꼭 반납하고요."


꾸벅꾸벅 졸다가 버스 정류장 까기지 와 버린 내게 둥글둥글 피에로 아저씨처럼 생긴 기사 아저씨는 매끈매끈한 고무신을 던져주고는 바지춤을 올리며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어 창문을 내다보았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알록달록 색색깔의 풍선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빨갛고 노랗고 파란 풍선들로 이루어진 건물과 길과 자동차. 놀란 마음을 부둥켜안고 버스에서 내리자 물컹, 풍선이 내려앉았다.


'맞다. 고무신발.'


나는 급히 버스로 돌아와 아저씨가 무심하게 던져준 고무 신발을 착용했다. 그러자 왠지 모르게 내 몸도 풍선처럼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신발을 착용하고 다시 버스를 나와 바닥을 내디뎠을 때 둥둥 느껴지는 바운스. 어디론가 가벼워서 날아가버릴 것 같은 느낌이 불안했지만 한편으론 재미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도 전부 둥글둥글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나와 같은 마음처럼 '재미있어!'라고 외치듯 활짝 웃고 있었다. 나도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은 풍선나라를 즐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게에 들어가 알록달록 화려한 풍선옷을 사서 걸쳤다. 몸이 한결 더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통통 튀어 다니기도 하고 몸의 무게를 잔뜩 실어 날아오르면 한 번에 저 멀리 옆 건물까지 갈 수 있었다. 어린 시절 200원 내고 방방이 타며 활짝 웃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주변 시선 의식하지 않고 마구 굴렸다.


요사이 속상한 일 투성이어서 웃을 일이 없었는데 한바탕 신나게 웃어댔다. 내가 뛰어도 방방 튕겨나가고 누군가가 튀어도 나도 모르는 어디론가 방방 튀어나가는 풍선나라는 끊임없이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서로 모르는 사이라도 금방 친구가 되어 함께 손을 잡고 즐겼다. 새로 사귄 친구들의 손을 잡고 이끄는 곳에 갔더니 대형 미끄럼이 있었다. 퐁신퐁신하지만 쭈욱 미끄러지는 미끄럼틀은 동심의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면 옆에 서 있는 풍선 인형을 따라 바람이 빠지는 듯한 춤을 추기도 했다. 현실 세계라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쭈뼛쭈뼛 박수만 쳤을 텐데. 풍선나라에서는 누구나 다 같이 춤을 췄다. 신나게 몸을 흔들고 있는데 갑자기 내가 서 있는 풍선만 피슝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며 가라앉았다. 휘청 중심을 잃었다. 순간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엄마, 이거 내가 젤 아끼는 몰랑이잖아. 이걸 왜 깔고 자고 있어! 터진단 말이야. 그리고 발에 그건 왜 끼고 있는 거야? 잠꼬대하면서 엉덩이는 또 왜 흔들어? "


소파였다. 오랜만에 창문 청소를 하다가 창문에 붙여놓은 딸아이의 몰랑이 인형을 엉덩이 깔고 잠이 들어버렸다. 손에 쥐고 있던 고무장갑은 발에 쏘옥 걸친 채로.  딸이 확 빼가는 바람에 피슝하고 풍선이 꺼졌던 것. 이런, 이게 뭐람. 좋았다 말았네.







어린 시절, 성당 헌금하라고 엄마가 500원을 주시면 100원은 과자를 사 먹고, 200원은 방방이를 타고, 200원을 남겨갔어요. 그리고 멜빵바지 입고 화장실에서 볼일 보다가 변기에 200원을 홀랑 빠트린 적도 있답니다. 그래서 빈손으로 헌금을 내는 척만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친구들과 방방이를 타며 훨훨 하늘을 나르던 그 가벼움을, 그 황홀함을 저는 일주일 내내 손꼽아 기다렸어요. 성인이 되고 나서는 방방이를 탈 일도 없거니와 방방이를 탈 때도 '다 큰 어른이 애들 노는데 왜 저래?'라는 눈총을 받을까 봐 망설이곤 했어요. 그러다 크리스마스 때 지인들과 방방장을 대관해서 마음 놓고 탄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마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생기 돋는 자유로움을 느꼈답니다. 버스를 타고 깜빡 잠들어 마주한 세상에서 어린 시절 내가 좋아하던 세상으로 가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비록 현실은 창문을 닦다 지쳐 잠이 든 엄마지만요. 요즘은 성인들도 타는 방방장이 많다고 하니 자유롭고 싶은 나를 돌보기 위해 남들 눈치 보지 말고 즐기러 가봐야겠습니다. 그림책으로 글쓰기 8기, 3일 차, 상상글쓰기 미션 완료.

작가의 이전글 우리가 힘이 없지, 꿈이 없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