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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닮녀 Jun 04. 2024

산이 웃고 있었다

없을 법하면서도 있을 법한 지어낸 이야기

날이 저물고 있었다. 오랜만에 호기롭게 오른 산행. 바위를 폴짝 뛰어올라 나뭇가지와 하이파이브하고 초록잎의 싱그러운 향기에 이끌려 정상까지 단숨에 올랐다. 바스락바스락 서로가 서로를 쓰다듬으며 낮게 깔아주는 BGM은 하늘 멍하기에 딱 좋은 소리였다. 넋 놓고 하늘과 구름에 취해 둥둥 떠다니다 보니 어느덧 산등성이는 해를 벌써 반이나 삼켜버렸다. 아뿔싸.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앗."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바위에서 일어나 가방을 둘러메고 발을 옮기려는 순간 왼발은 옮겨졌지만 오른발은 누가 땅속에서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듯 꼼짝을 하지 않았다. 무언가 걸리기라도 한 건가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맨발로 가야겠다며 신발을 벗으려고 했지만 발과 신발과 땅은 꽁꽁 한 몸이 되어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등골이 오싹하니 소름이 돋았다. 지금 당장 산 아래로 도망쳐야 하는데, 오른발은 여전히 본드라도 붙여 놓은 듯 꿈쩍하지 않았다.


"꿈인가...? 아얏."


볼을 꼬집어보았지만 아니었다. 그래, 꿈이 이렇게 생생할리 없지. 산등성이는 이제 해를 거의 삼키고는 뻘건 트림을 하고 있었다. 어서 오너라고 환영해 주던 나뭇잎 박수소리는 빛이 사라지니 스산하고 구슬펐다. 갑자기 왜 등산을 하겠다고 나서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건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나한테 이러는 건지. 나를 탓했다가 남을 탓했다가 하늘을 원망했다가 이내 앞으로 착하게 살겠으니 제발 한 번만 선처를 해달라고 온갖 선행을 약속하며 아무도 없는 숲에 애원을 했다. 



"제가 가진 것도 나누며 살고요, 불평 안 하고 열심히 살게요. 진짜 운동도 열심히 하고, 일도 열심히 하고, 또 가난한 사람도 돕고요, 미워하거나 질투하지도 않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저 좀 놔주세요. 누군지는 몰라도 제 발 좀 놔주시면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려가서 착하게 잘 살 테니 저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저한테 아직 아이가 둘이나 있거든요. 남편도 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고요, 아직 효도라고 제대로 한 것도 없는데 부모님보다 먼저 저 세상에 가면 진짜 너무너무 불효자식이잖아요. 그러니까 진짜 딱 한 번만 봐주세요.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뭐든 시키는 대로 할게요. 그러니까 으앙"



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무섭고 두렵고 막막해서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때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또 들렸다. 


"누구 있어요?"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나의 발을 붙잡고 있는 땅이었다. 땅에서 소리가 난다고? 오른발이 붙어 있어 숙이기 어려웠지만 왼발을 쭈욱 펴고 오른발은 구부린 채로 앉아 허리를 최대한 땅에 숙이고 귀를 가져다 댔다. 그때였다. 



"좀 치워죠."

"으악"

분명 땅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너무 놀라 뒷걸음질 치고 싶었으나 오른발이 여전히 떨어지지 않아 그 자리에 털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프다고, 좀 치워죠. 흑흑 제발."

분명 아프다고 말하는 소리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다시 귀를 가져다 댔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오른발아래 은색 빛이 반짝였다. 뭐지? 맞다. 등산길에 당 떨어질까 봐 입에 물고 왔던 사탕 껍데기였다. 더운 날씨 때문에 끈적끈적하게 녹아버린 설탕이 묻어 잠깐 발 밑에 두고 가져간다는 게 그만 멍 때리다가 신발과 땅에 들러붙은 거였다. 아무도 없는데 부끄러웠다. 내가 버린 쓰레기 때문에 발이 안 떨어진 거였다니. 뜨거워진 낯짝으로 사탕 껍데기 아래 흙을 마구 파내어 다리를 떼어내려는데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렇게는 안 돼. 내가 너무 아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요?" 

나는 땅을 향해 귀를 가져다 댔다. 

"주문을 외워봐."

"무슨 주문...? 요? 전 주문을 모르는데요?"

"쓰레기를 두고 가면 산이 울고, 쓰레기를 가져가면 산이 웃는다 이렇게 3번 외치면 된단다. 단, 크게 외쳐야 해. 아주 크게."

부끄러워서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지만 땅을 파도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은빛 사탕껍데기에 붙은 나의 다리와 땅 때문에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외쳤다.


"쓰레기를 두고 가면 산이 울고, 쓰레기를 가져가면 산이 웃는다. 쓰레기를 두고 가면 산이 울고, 쓰레기를 가져가면 산이 웃는다. 쓰레기를 두고 가면 산이 울고, 쓰레기를 가져가면 산이 웃는다."


-'틱'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신기하게도 딱 붙어 꿈쩍도 않던 발이 떨어졌다. 사탕 껍데기도 떨어졌다. 나는 얼른 배낭에 쓰레기를 주워 넣었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우사인볼트처럼 전속력으로 산을 뛰어 내려왔다. 등산로 초입까지 내려와 초소를 발견하고 나서야 제정신이 들었다. 땀으로 뒤범벅되어 땅에 털썩 주저앉은 나의 옆으로 젊은 남녀 무리가 지나가며 투덜거렸다. 



"아이씨. 무서워죽는 줄 알았네. 누가 드론 같은 씨씨티비로 지켜보고 있는 거 아냐? 딱 걸렸잖아. 아니 어디서 그런 메아리가 들려온 거야?"

"야. 산이 운다잖아. 쓰레기를 버리고 오면 어떡하냐. 들고 와야지. 산이 웃어야 산이 계속 우리 곁에 있고, 그래야 우리도 잘 살 거 아냐. 앞으로 몰래 쓰레기 버리고 그런 거 하지 마. 우리는 지구인 아니냐"

"안 버려. 진짜 절대 안 버린다고. 오히려 싹 주워왔거든. 어후 무서워서. 앞으로 절대 안 버려."

"우와 저 녀석 정신 제대로 차렸네."

그들의 손에는 쓰레기가 잔뜩 들려있었다. 



산에 저렇게 쓰레기가 많았나. 그럼 진짜 내가 산이랑 대화했던 건가. 배낭을 열어 사탕 껍데기를 찾았다. 엥? 사탕 껍데기는 없고 아직 뜯지 않은 사탕이 들어있었다. 분명 아까 산에서 먹고 껍데기를 버렸다가 그 이상한 주문을 외웠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탕을 뜯었다. 사탕을 쏘옥 입에 넣었다. 껍데기는 배낭에 고이 넣었다. 옷을 털고 일어났다. 발걸음을 옮기며 만나는 쓰레기를 하나 둘 챙기며 나는 싱긋 웃었다. 내 뒤로 산도 방긋 웃고 있었다. 




*쓰레기를 두고 가면 산이 울고, 쓰레기를 가져가면 산이 웃습니다.

[그림책으로 글쓰기-그냥, 좋아서 씁니다] 상상글쓰기 미션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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