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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닮녀 Jul 15. 2024

안녕, 무궁화호

'이번 정차 역은 구미 구미역입니다.'

한참을 자다 정차 알림 방송에 눈을 떴더니 구미였다. 아 아직 구미구나... 반도 못 왔네. 

다시 눈을 붙였다. 잠깐 졸았는데 또 알림방송이 나왔다.

'이번 정차 역은 김천, 김천역입니다.'

아휴 이제 겨우 한 정거장 왔네. 다시 자야지.

잠이 들려는 찰나 다시 알림방송이 나왔다.

'이번 정차 역은 추풍령, 추풍령 역입니다.'

하.... 잠 좀 자려는데 또 정차네. 시끌시끌해서 잠에 들 수가 없네.

얼른 잠에 빠져들어야지라는 마음으로 차가 달리자마자 눈을 감고 양을 셌으나 양이 100마리도 되기 전에 다음 역에 도착했다.

그 이후로도 황간- 영동- 각계- 심천-지탄-이원-옥천-대전-신탄진-부강-조치원-전의-찬안-성환-평택-서정리....

아무리 잠에 들려고 해도, 아무리 잠을 자도, 아무리 깨어나도 종착역에 닿지 않던 그 열차는 무려 6시간 남짓 달려서야 나를 종착역에 내려주었다. 그날 나는 다짐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다시는 이 열차를 타지 않으리라. 





때는 바야흐로 2009년, 부산역에서 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에 가서 다닐 아카데미를 조사하러 가는 길이었다. 어디에 살지도 알아봐야 하고, 아카데미 주변 아르바이트 할 곳도 찾아야 하고 이것저것 알아보러 나섰다. 한 달 뒤면 서울로 주거지를 옮겨가야 하는 내가 답사차 가는 여정에 비용을 많이 쓸 수가 없었다. 그래 뭐 사람들 다 타고 다니는 열차인데, 차로 가도 5시간 정도는 달려야 도착하는 곳이 서울이니까 6시간 정도 걸리는 기차야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다. KTX와 비교하면 시간은 당시 기준으로 2배 하고 조금 더 걸리지만, 비용은 반보다 훨씬 저렴했다. 거의 삼분의 일의 가격으로 서울에 갈 수 있다니, 가난한 드림걸에게는 달콤한 기회였다.



별생각 없이 경제적 논리에 이끌려 무궁화호를 예약한 나는 6시간 남짓 열차에 있는 동안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다짐했다. 서울에 가서 꼭 성공하리라. 다시는 무궁화호를 타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무조건  KTX를 타야지라고 성공의 의지를 불태웠다.  물론 그 이후로 나는 객관적인 성공을 이루지도, 꿈을 이루지도, 돈을 많이 벌지도 못했지만 정말이지 열차만큼은 KTX열차를 탔다. 



그렇게 잊힌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힌 무궁화 열차는 KTX와 SRT로 뒤덮여 이제 영영 사라진 줄 알았는데, 오늘 글을 쓰려고 노선을 뒤적이다 보니 아직도 운영 중이라는 사실이 참 놀라웠다. 서울로 상경한 지도 어느덧 15년이다. 세월의 힘은 강력해서 지나고 나면 뭐든 아름다워 보이기 마련인데, 여전히 무궁화호는 절대 절대 타고 싶지 않다. 



고향인 부산인 내가 기차 하면 얽힌 에피소드가 참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궁화 열차를 다시는 타고 싶지 않던 배고팠던 그 시절의 추억이 먼저 떠올랐다. 간절하면서도 패기 넘치던 그때의 내가 아련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요동치는 인생의 흐름 앞에 이 글을 쓰며 다시 마음을 다잡아 본다. 내 인생의 무궁화호는 없다고. 천천히 가도 돌아가도 다 괜찮다는 걸 알지만, 정차역이 그리 많은 완행열차만큼은 그다지 타고 싶지 않다고. 그러니 그때의 그 단단한 마음을 불러오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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