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도 않으면서
가끔 광화문 교보문고에 간다. 책을 사거나 보러 갈 때도 있지만 보통은 더 가벼운 마음으로 간다. 요즘 무슨 책이 매대에 진열되어 있는지 베스트셀러 책장엔 무슨 책이 올라와 있는지 보고 싶은 마음에 서점을 찾는다. 온라인 페이지만으로는 충족이 안 되는 책의 풍경을 보고 싶은 마음인 것 같다.
그런데 갈 때마다 종종 놀란다. 생각보다 사람이 너무 많다. 나처럼 이 '풍경'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았나? (사실 나는 집이 가까워서 가는 것도 있는데) 책을 소개하는 유튜버, 일명 북튜버로 활동하고 있는 한 친구는 수년 전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이제 책은 굿즈야, 멋지게 생긴 굿즈를 사는 것처럼 책을 그냥 책장에 넣어두고 싶은 거지.' 친구의 말을 곱씹어보면 교보문고는 온갖 종류의 굿즈를 비치하고 있는 하나의 큰 테마파크다. 유튜브와 온라인 세계에 지친 사람들이 잠시눈앞에 존재하는 물성의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무료 테마파크를 방문한 것이다.
책을 구경하는 사람들을 비집고 한쪽 구석으로 가면 또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그곳엔 2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이 있다. 광화문 교보에서 사람들이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이곳이 재밌는 이유는 이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어느 시간대에 가도 만석이다. 그리고 그 주변엔 누군가 일어나면 바로 빈자리를 꿰차고자 손에 든 책과 테이블을 번갈아보고 있는 웨이팅 고객들이 서 있다. 정말 자리가 나면 무섭게 채워진다. 오래 기다렸는지 작은 환호를 내뱉는 분을 본 적도 있다.
그러니까 단순히 굿즈와 테마파크라는 단어로 치부하기엔 이르다. 여전히 이곳엔 인스타나 유튜브 같은 (어쩌면 자신의 화장실에서도 볼 수 있는) 빠르고 편리한 방식이 아닌 구태여 몸을 끌고 나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책을 펴는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정보를 습득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에이 그건 너무 일부의 얘기 아닌가? 그럴지도 모른다. 2025년, 작년 데이터 상 교보문고 일 평균 방문자는 1만 5천 명. 하지만 교보문고는 22-24년도 모두 200억대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1만 5천 명 중 테이블에 앉아 책을 탐독하려는 사람들은 바쁜 현대 사회에서는 조금 비껴간 엉뚱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설을 맞이해 십분의일 책장을 정리했다. AI와 관련된 유튜브를 틀어놓은 채 먼지 쌓인 책을 하나하나 닦았다. 기분이 묘했다. 나는 이 책을 굿즈로 인식하는 걸까. 와인 바에 놓여있는 책을 꺼내 읽어볼 엉뚱한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AI 시대에 책은 미래는 어떻게 될까. 여러 잡생각에 치이며 계속 책을 닦다가 우연히 옛날에 본 책 한 권을 폈다.
"잘 찾아보면 그런 게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우리는 신기술만 보면 흥분한 나머지 마구 엉뚱한 예측을 내놓곤 한다. 특히 일간 신문은 검증할 틈이 없는 탓에 그런 예측들을 많이 내놓는다. 개인용 컴퓨터 초기에는 '사무실에서 종이가 사라진다'는 예언이 난무했다. 이젠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시피 종이 사용량은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과 더불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김영하 <<랄랄라 하우스>>
AI는 더 정교한 예측 가능성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이 초특급 신기술의 방향성은 예측 가능하지 않다. 더 엉뚱한 방향으로 사람들을 이끌 여지도 많다. 많은 것들이 불확실한 시대에 그나마 확실한 것은 가끔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면 내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범람하는 유튜브 쇼츠를 넘길 때보다는 수북이 쌓인 책을 뒤적이는 사람들을 볼 때, 자리가 나길 기다리며 선 채로 책을 보는 사람들을 볼 때 더 기분이 좋다. 십분의일의 작은 책장 앞에 서는 사람들도 잠시나마 그런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는 마음으로 오래된 책의 먼지를 닦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