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납장도 짐이다

우리의 짐이 줄어드지 않는 건에 대하여

by 모과

아내와 집을 합친 이후로 계속 짐을 정리하고 있다. 집의 크기에 비해 서로의 짐이 너무 많다는 걸 이사를 끝낸 뒤에 깨달았다. 충격을 받은 아내는 '이 집엔 내 필통 하나 둘 곳이 없어!'라고 소리쳤고 (물론, 그 정도는 아니었다) 쌓여있는 이사 박스를 바라보며 연일 '이 집엔 수납장이 필요해...'라고 중얼거렸다. 우리는 날을 잡고 곳곳에 쌓여있는 물건들을 정리해보기도 했지만 드라마틱하게 짐을 줄이고 공간을 확보한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유튜브에 정리하는 법을 검색해 봤다. 놀랍게도 세상엔 정리전문가라는 직업이 있었다. 대기업 회장님 집도 정리해 봤다는 정리컨설턴트부터 풍수학적으로 집정리를 코칭해 주는 풍수 선생님까지, 모두가 대한민국 일타 정리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티셔츠 효율적으로 개는 법 같은 걸 배워 옷장을 정리하기도 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요요현상으로 줄어들었던 살이 서서히 다시 불어나듯 한 번 정리했던 곳들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원래의 지저분한 상태로 돌아왔다. 수납에도 관성의 법칙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회사 일이 바빠진 아내는 함께 팔을 걷어붙이고 집전체를 들어 엎을만한 에너지는 없었다. 퇴근한 아내는 침대에 누워 계속 '이 집엔 수납이 필요해...'만 되뇌이고 있었다. 결국 새로운 수납장을 사는 게 답이었을까. 하지만 우리는 뭔가를 새로 사려면 평균 3개월에서 6개월을 고민하는 사람들이었고, 당분간 새 물건은 들이지 말자고 결의한 상태였다. 우리가 새 수납장처럼 거대한 물건을 사는 건 쉽지 않았다.

그때 문득 한 사람이 생각났다. 과거 한 인테리어 회사에서 근무했을 때 함께 일했던 선배였다. 그는 나에게 인테리어 고객을 응대하는 다양한 노하우를 가르쳐줬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게 있었다. 바로 don`t 화법. 그는 무언가를 지를까 말까 고민하는 고객에게 '에이 그냥 안 하셔도 돼요' 또는 '굳이 그거까진 하지 마세요'식의 don‘t를 제안했다. 이 화법이 가장 쉽게 적용되는 게 수납장이었다. 주방 인테리어를 하면 기본적으로 상부/하부장을 짠다. 특히 주방은 수납이 중요하기 때문에 상하부장를 포함해 이런 저런 수납장을 함께 짜다보면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선배는 고민하는 고객들에게 "어차피 주방 수납 많이 해봤자 소용없습니다. 이사 갈 때 다 버리는 게 그릇이에요. 상부장은 하지 마시고 개방감 있게 쓰세요." 라는 멘트를 날리며 고객을 홀렸다. 하나라도 더 욱여넣고 팔아야 하는 인테리어 업자가 오히려 '빼기'를 권하면 고객은 역으로 그를 신뢰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이 이야기를 하나의 훌륭한 영업 기술로만 받아들였다. 하지만 실제로 주부가 되어 살게 된 지금, 그의 말은 단순한 영업멘트가 아닌 진심이었단 것을 알게 됐다.


역시 온라인으로 만나는 일타선생님보단 직접 부대끼고 지냈던 사람의 말이 더 와닿는 법이다. 새로운 수납장은 사지 않기로 했다. 대신 기준을 바꾸기로 했다. 누구나 자신만의 정리수납법이 있다. 나는 잘 버리지 못하는 맥시멀리스트였다. 필요해서 들인 물건이니 두면 분명히 쓸 곳이 있다, 는 게 내 지론이었다. 그러다 보니 집 안 곳곳엔 10년에 한 번 정도 쓸 것 같은 물건들이 점점 쌓여갔다. 서재 방으로 이름붙인 방 하나는 방이라기보단 박물관에 가까웠다. 초등학교 때 주고받는 편지부터 교과서, 일기장, 오래된 핸드폰까지 잠들어있어 조금만 뒤져보면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시대상을 연구할 수도 있는 곳이었다. 그 방에 있는 것들 중 절반만 정리해도 서랍 하나는 비우고 다른 물건들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굳이 새 수납장을 사지 않아도 새 수납장을 얻을 수 있는 간단한 원리였다.


기준을 바꾸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큰 변화라기보다 변주라고 생각한다면? 버리는 걸 잘 못했던 이유가 기존의 물건이 아까워서 (= 이미 지출한 비용에 대한 아쉬운 마음) 였으니 그 기준을 살짝 변주해, 버림으로 인해 수납을 사지 않아도 된다 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고 드디어 물건을 버릴 수 있게 됐다.. 버리는 게 돈이다!!

물론 여기엔 단순한 지출 논리뿐만 아니라 추억의 소중함이라는 감정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그 또한 수십 년이 흐르며 대부분 휘발되었고 이제 새로운 추억으로 채워보자는 나름 획기적인 결심도 했다. 결국 나는 서재방의 절반을 비워냈다. 정리하다 보니 십분의일 초기 회의자료 같은 것도 튀어나와 전부 갖다 버렸는데 아내가 보더니 그런 건 몇 개 남겨놔도 되지 않겠어...? 할 정도로 싹 버렸다. (회의자료는 10% 정도 다시 주워왔고 십분의일로 보내려 한다…)

아직도 정리는 진행형이지만 이제 자신감이 붙었다. 시선을 바꿨더니 무엇이든 내다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맥시멀리스트에서 미니멀리스트가 된다, 되고 있다.


물론, 교과서는 아직 안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