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험 임산부 센터에서
수술 후에 금방 퇴원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일주일에 2-3번 자궁경부 길이를 쟀는데, 길 때는 1.5cm 짧을 때는 1cm 남짓이었다. 그 짧은 길이 사이로 아가는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다.
핸드폰 메모장을 열어 매일 기록을 했다. 기록에는 감정이나 슬픔은 담기지 않았고, 무미건조한 숫자들이 나열됐다. 마그밀 몇 개, 물 00ml, 소변 00ml. 피검사를 하고 나면 수혈을 했다. 어떤 날은 빨간 피만, 그리고 어떤 날은 빨간 피랑 노란 피 둘 다.
가장 모순적인 부분은 내가 세상과 모든 연락을 끊어 놓고, 누군가와 말을 하지 않으면 사방에서 불안감이 밀려들어 나를 덮치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내가 아플 때도 이런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밑도 끝도 없는 불안감이 너무 무서웠다.
특히 침대에서 움직일 수 없으니 내가 가장 열심히 할 수 있는 건 자책이었다. 내가 괜히 대학원 공부를 했나, 괜히 회사 일을 열심히 했나, 내가 괜히 욕심을 부려서 임신을 한다고 했어, 아가가 주수도 못 채우면 어쩌지. 조용한 2인실에서는 옆자리 산모가 우는 날도 있었고, 내가 우는 날도 있었다. 울고 나서는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다며 서로 간식을 건넸다.
그래서 고위험 임산부 센터에서는 간호사 선생님들이 검사를 위해 자주 들러주시는 게 좋았다. 조용한 적막은 삐삐 거리는 검사 기계 소리와 함께 깨졌고, 그 덕분에 나는 겉모습만큼은 제법 온전한 상태로 버틸 수 있었다. 수간호사 선생님은 해사한 얼굴로 괜찮을 거라고, 이 시간은 다 지나갈 거라고 말해주셨다. 혈액내과 교수님은 예고도 없이 깜짝 들러 “괜찮지? 잘 버텨봅시다.” 한 마디하고 가셨다. 산부인과 교수님은 주말도 없이 들러주셨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위안이 됐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 안에서는 괜찮을 거라는 확신 같은 게 안 생기는데, 의료진 선생님들이 말해주면 괜찮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지 않는 법을 연습했다.
퇴원을 하게 된다면 하고 싶은 일들을 썼다. 별 거 아닌 일들인데 거창해 보였다.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했으니, 뭐든 믿어봐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병원에서 버티는 동안, 남편은 더없이 바빴다. 병원에서는 회사도 집도 멀었는데, 매일 퇴근하고 꼬박꼬박 병원에 들렀다. 샤워를 못해서 찝찝해하는 나를 위해 발을 닦아주고, 간식을 사다 날랐다. 그리고 옆자리 산모에게 병원 생활 팁을 전수받았다. 오래 같이 있을 수 있는 주말에는 1층으로 배달음식을 시켜서 받아오면 좋고, 머리 감겨주는 기계가 있다는 것도 들었다.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갔다. 자궁수축제는 8 가트로 맞으니 아주 약간 숨차고 심장이 조금 빨리 뛰었지만 괜찮았다. 아가는 잘 버티고 있었다. 교수님은 당분간 이 상태로 유지하다가, 21주가 되면 정밀초음파를 하자고 하셨다. 아직도 버텨야 할 2주가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