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시작쯤이었어요. 아이들을 모둠끼리 앉게 했어요. 마지막 한 명이 남았는데, 본 반 수업에 참여하는 도움 반 아이였어요. 보통 고등학생과 달리 질문도 많고, 반응도 활기차고 거침없어 눈에 금방 띄었어요. 그래서 임의로 교탁 앞 모둠에 앉게 했어요.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아이는 하나를 말하면 질문하고, 그다음을 말하면 또 질문하고. 참다못해 타이르듯 말했어요.
“일단 기다려줘. 설명이 끝나고 나서 대답해 줄게. 알았지?”
아이의 기다림은 오래가지 않았어요. 모둠을 위해 안내하는 내용과 활동 순서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큰 소리로 투덜댔죠. 교실 안은 저와 그 아이 목소리만 남았고, 경쟁하듯 두 목소리는 점점 커졌어요. 순간순간이 아슬아슬했습니다.
“아니, 아니, 저 이거 못 하겠거든요. 어떻게 하는지 알려주세요. 뭐야, 이거 어떻게 하는 거야.”
다른 아이들은 아이를 참아내고 있는 건지, 제 반응이 어떨지 궁금해 기다리는 건지, 반 분위기는 점점 무거워졌어요.
“선생님 설명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지. 왜 참지 못하지? 선생님은 너만을 위해 있지 않아. 기다려! 알겠니?”
제 목소리인데도 흠칫 놀랐어요. 듣기에도 퉁명스러운 데다 단호한 목소리였어요. 그 순간 아이들의 눈동자는 빠르게 움직이며 우리 둘 사이를 오갔습니다. 교실은 무거운 침묵으로 채워졌어요. 그때 아이는 울먹거리며 말했지요.
“선생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모르면 질문하라고. 몰라서 묻는 건데, 모르는 게 잘못인가요?” 순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어요. 수업 첫머리에 제가 했던 말 그대로였죠. 옳은 말인데, 정확하기까지 해서 더 당황했어요. 큰 한숨을 쉬고, 얼버무리며 말했습니다.
“어어 알았어. 알았으니까. 기다려.”
아이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툴툴댔어요. 때마침 끝 종이 울렸고, 서둘러 짐을 챙겨 교실을 나왔습니다. 뒤통수에 아이들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어요. 참 부끄러웠어요. 지금도 그래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어요.
해변가에 여자아이가 서 있어요. 파도를 보고 있죠. 파도가 밀려옵니다. 아이는 새침하게 뒤로 물러나죠. 이제 파도가 쓸려갈 차례에요. 이때다 싶었겠죠. 아이는 뒷걸음치듯 쓸려가는 파도를 보며 겁을 줍니다. 그랬더니 다시 파도가 밀려와요. 파도는 작은 물보라를 만들어 인사합니다. 아이는 어땠을까요? 뒤로 물러나는가 싶더니 여유 있게 앉아 파도를 봅니다. 이제 아는 거죠. 파도가 고만큼만 밀려온다는 것을요.
이제 밀려오는 파도에 아이는 물러나지 않아요. 아이는 다가오는 파도를 몸으로 만납니다. 갈매기도 덩달아 신났어요. 흠뻑 젖어 온몸으로 놀아요. 깔깔 웃는 소리, 첨벙대는 파도 소리, 갈매기들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요. 그런데 이번엔 어쩐지 다시 밀려오는 파도가 점점 커져 아이 키를 훌쩍 넘었어요. 어떡하죠. 아이는 깜짝 놀라 해변으로 도망쳐요. 아이는 커진 파도를 보고 약을 올리네요. 어 이게 아닌데. 파도가 아이를 덮쳤어요. 아이인지 파도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파도는 사방에 물방울로 흩어져요. 아이는 이내 울상이 됩니다.
그런데 모래밭에는 조개껍질이며, 불가사리, 소라 껍데기가 가득해요. 파도가 건넨 선물입니다. 그 많은 선물을 가져오려고 자기 몸을 그렇게나 부풀렸나 봐요. 아이도 갈매기도 모두 행복해합니다. 멀리서 엄마가 부르시는 소리가 들려요.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이에요. 아이는 못내 손에 묻은 모래를 털며 속삭입니다. “선물 고마워. 재미있었어.” 아이는 멀어져 가는 파도와 갈매기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합니다.
이수지가 글을 쓰고 그린 『파도야 놀자』입니다. 사실 그림책에는 글이 없어요. 제가 그림을 보고 읽어냈어요. 작가는 글이 없는 그림책을 여러 편 집필했어요. 그중 이 책은 제 어린 시절을 기억나게 해 좋아합니다.
존재자가 아닌 ‘존재’로서 만났어요.
구릉지 풀밭이 펼쳐진 목장 맨 끝이 우리 집이에요. 그래서 학교에 가려면 40 여분 걸어 푸른 목초지를 지나야 했어요. 학교 부근에 마을이 모여 있던 터라 혼자 걸을 때가 많았죠. 가끔 무서울 때도 있었지만 외롭지는 않았어요. 풀밭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 하늘에 떠가는 구름, 길가 풀숲에서 폴짝 뛰어오르는 개구리와 귀뚜라미, 심지어 강아지풀하고도 놀았어요. 바람은 뺨과 머리카락을 간지럽히며 지나가기도 하고, 몸이 밀릴 정도로 세게 치며 불기도 했어요. 변덕스럽게 이쪽저쪽 불어 댈 때면 스치는 소리도 달라져요. 그러다 어디로 갔는지 잠깐 조용해지기도 해요. 숨바꼭질하는 걸까요? 뭉게구름이 있는 날이면 풀밭에도 구름이 지나갑니다. 바람 따라 구름도 흘러가죠. 하늘에는 하얀 구름, 풀밭에는 초록 구름. 가만히 서서 눈을 감고 팔을 벌리면 바람이 몸을 휘감아 구름이 있는 곳까지 데리고 갈 것 같았어요. 그땐 바람도, 구름도 친구가 됩니다.
그림책을 넘기며 초등학생 시절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어요. 글 한 줄 없는데도 아이의 설렘과 행복이 고스란히 전해졌네요. 이수지 작가는 글이 있으면 글을 따라가지만, 글이 없으면 독자는 자기 목소리를 듣게 된다.고 말합니다. 작가의 그림책을 좋아하는 이유에요. 작가가 정해놓은 길이 없기에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어요. 아이의 이야기에서 어린 시절 친구였던 바람과 구름을 기억해 낸 것처럼. 책에서 글은 작가의 주제와 의도를 전달하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그 도구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독자에게 완벽한 자유를 선사해 줘요.
우리는 일상에서 늘 언어로 대상을 규정합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는 이름, 나이, 직업, 사는 동네로 그 사람을 파악하려 해요. 이런 규정은 편리하고 효율적이지만 때로는 대상을 그 틀 안에 가두기 쉬워요. 그 대상이 갖는 고유함은 드러나기 어려워요. 하지만 그런 것들에서 자유로울 때가 있어요. 어린 시절 친구와 재미있게 놀 때입니다. 그 순간은 말이 필요 없어요.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면, 이때가 바로 ‘존재’를 만나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존재자’에만 집착하느라 정작 그들을 있게 하는 ‘존재’는 잊고 산다고 해요.
. 존재자는 우리 앞에 드러나는 대상으로 인간, 동물, 사물, 자연 그리고 언어가 있어요. 존재는 그 대상들이 ‘있게’ 하는 방식이자 드러나게 하는 배경입니다. 마치 빛이 있어야 사물이 보이는 데 사물만 봐왔던 것처럼, 우리는 존재자를 생각하는 게 익숙해요. 언어가 자꾸 그렇게 생각하게 이끕니다.
그림책 속 아이는 파도를 존재자가 아닌 ‘존재’로 만나고 있어요. 흠뻑 젖어 온몸으로 파도와 놀고 있는 아이가 충만한 ‘있음’을 누리는데 글이나 말이 굳이 필요할까요? 덕분에 저도 바람과 구름을 존재로 만났던 그 벅찬 순간을 떠올릴 수 있었네요.
침묵이 진실을 전해줘요.
글 없는 그림책을 읽고 나 문득 그날 교실의 침묵이 떠올랐어요. 두 장면 모두 글과 말이 사라진 침묵을 담고 있지만 그 결은 달라요. 그림책 속 침묵이 자유롭게 놀았던 경험을 생각나게 했다면, 그날 교실의 침묵은 진실을 마주하게 했어요. 철학자 강신주는 김형도의 시 『소리의 뼈』를 빌려 말이 갖는 권력과 폭력성이라는 성질을 언어의 뼈라고 말했어요.
그 언어의 본성은 침묵할 때 드러난다고 보았지요. 빛이 없을 때 어둠이 드러나듯, 말이든 글이든 언어가 부재할 때 그 본성이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날 아이들의 침묵은 제가 내뱉은 말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깨닫게 해주었어요. 언어의 뼈는 사용 규칙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책임과 진실함도 포함해요. 학교에서 아이들의 침묵은 그 말의 무게와 책임을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 됩니다.
그 침묵 속에서 아이를 향한 제 시선과 태도를 돌아보게 되었어요. 우리가 맺는 관계를 ‘나-그것’과 ‘나-너’로 설명한 철학자 마틴 부버의 조언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나-그것’의 관계에서 우리는 상대를 사물이나 수단으로 인식합니다. 책상, 의자, 나무, 구름, 바람, 파도 심지어 사람도 ‘그것’으로 봅니다. 이때 우리는 상대를 설명하고 이해하고 판단하려 해요. 나와 분리된 존재로 보기에 마음대로 조작하고 회피하거나 무시하기 쉽습니다. 반면 ‘나-너’의 관계는 다릅니다. ‘너’는 이용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나와 함께 하는 존재입니다. 사람, 동물, 자연까지도 나와 동등한 존재로 마주합니다. 그림책 아이가 파도를 친구인 ‘너’로 만난 것처럼요.
수업 진도를 나가야 한다는 급한 마음을 핑계로 그 아이의 질문과 요구를 귀찮은 방해물로 여겼어요. 아이를 존중받아야 할 ‘너’가 아니라 ‘그것’으로 대했어요. 제 입에서 나간 날 선 말은 아이의 존재를 지우는 말이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아이들의 침묵은 제 말이 얼마나 이중적이고 편협한지를 깨우쳐 주는 무언의 가르침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네요.
교사는 수업에서 다양한 관계를 맺어요. 매번 아이들을 ‘그것’이 아닌 ‘너’로 대하기가 쉽지 않아요. 중력에 이끌리듯 아이들을 통제하고 판단하고 설명하려는 관성에 빠지곤 합니다. 부버의 말처럼 우리는 수많은 ‘그것’에 둘러싸여 살아가기에, 온전한 ‘너’를 만나는 경험은 드물고 귀합니다. 그렇기에 가끔 있는 그 만남은 오래 기억될 수 있어요. 저처럼요.
글 없는 그림책이 제게 언어 너머의 자유를 선물했듯, 교실의 침묵은 제가 잊고 있던 ‘너’를 다시 기억하게 해주었어요. 그리고 아이를 온전한 ‘너’로 만나기 위해 한 번 더 사과하고 싶다는 용기를 갖게 해주었어요.
오늘 제가 만났던 존재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네요. 여러분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수많은 ‘그것’들 사이에서, ‘너’를 만났나요? 그리고 그 누구에게 진정한 ‘너’였나요?
@이수지 에세이 『만질 수 있는 생각』
@강신주의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마틴 부버의 『나와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