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은 숨겨져 있다.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과 제나 히츠의 <찬란하고 무용한 공부>

by ㅁㅗ하니
KakaoTalk_20240714_183420455_08.jpg <프레드릭>의 한 장면


"선생님, 전 프레드릭이 별루 맘에 안드는데요."

역시 나올 말이 나왔다.


"아 그래? 프레드릭이 맘에 안드는 이유가 뭐지?"


"<개미와 베짱이>에서 놀기만 하던 베짱이는 댓가를 치르잖아요. 그런데 프레드릭은 염치도 없고 아무 일도 안하고. 겨울 내내 프레드릭이 뭘 먹었겠어요? 다른 친구들이 모아놓은 먹이를 먹고 산 거잖아요."

"맞아요. 아무리 시인이어도 먹고 살아야 시도 쓰죠."

"맞아요. 왜 일도 안한 프레드릭이 칭찬을 받는지 모르겠어요. 다른 쥐들이 너무 착해요."

"그건 공평하지 않아요."

"열심히 일한 쥐들은 억울해야 하는데 왜 박수를 치죠?"


애들이 여기저기에서 성토를 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한 아이가 말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프레드릭도 일은 했어요. 혼자 햋빛 모으고, 색깔 모으고, 이야기를 모았잖아요."

"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네. 일을 안했다고 볼 수는 없네."


난 반갑게 동의했다. 이 기회를 이용해야겠다 싶어 재차 물었다.


"그럼 프레데릭이 한 일은 뭐지?"

"남들과 다른 일이요."

"그러네. 그럼 다른 쥐들이 한 일과 어떤 면에서 다를까?"


그때 그 아이 답은 이랬다.

"쓸 데가 다른 거 같아요."


이 말이 끝난 뒤 한 두명의 아이들이 말했다.

"음, 뭐, 그렇게 볼 수도 있네."


이럴 때 참 뿌듯하다. 그 아이 말로 대화는 전환된다. 일차원에서 다차원으로, 평면에서 입체로, 딱딱함에서 말랑말랑함으로. 아이의 말이 벽에 문을 만든 거다. 아이들의 생각에 새로운 문이 열리는 거다.

이처럼 그림책, 소설, 시 같은 열린 결말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철학적 탐구는 더 넓고 깊은 사유의 지평으로 우릴 안내한다. 그 시간 내게도 그랬다.


쓸데가 없는 게 아니라 쓸 데가 다른 거구나.



뒷자리 후배 교사가 물었다.

"선생님은 공부가 그렇게 좋으세요?"

"어? 글쎄...... 음, 그렇게 보여?"


늘 배우길 즐겨하시는 선배 선생님께 같은 질문을 한 적 있다.

"선생님은 왜 공부하세요?"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재미있어서. 난 그냥 공부하는 게 좋아."


같은 질문에 선배 선생님은 답했는데 난 답하지 못한 이유, 공부는 쓸모가 있어야 한다 생각해서다.


부모님은 늘 공부해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대학이나 학과, 직업을 선택할 때도 우선 순위는 '쓸모가 있느냐'였다. 여기서 쓸모는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것과 교환할 수 있는 것인가가 기준이다. 부모님은 가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그러실 수 밖에 없었다는 걸 이해한다. 그렇게 예술가는 밥을 굶는다, 쓸데 없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말들처럼 쓸모있음은 내 생각과 판단의 한계를 지었다.

결혼전 남들 따라 대학원에 들어갔다. 뚜렷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공부하고 싶은 것이 분명해서도 아니다. 늘 그랬든 언젠가 쓸모있을 거란 생각에서다. 결혼 후 아이 기르며 휴학했고 11년 만인 마흔살이 넘어서 석사 과정을 마무리했다. 무엇을 아는지도, 무엇을 알고 싶은지도 몰랐으니 논문은 부끄러운 수준이다.

외고에서 입시 과목이 아닌 과학 수업을 고민하다 자연스럽게 과학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우연히 철학 스터디에 참여했다. 그 전과 다르게 배우는 즐거움이 있었다. 주위에서 교수될꺼냐, 전문직 승진할꺼냐 물었지만 뭐라 할 말이 없어 답했다.


"그냥 비싼 취미 활동이야."


공부를 시작했지만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지 않으니 방어적으로 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논문을 시작도 못한채 수료 시기가 와버렸다. 그 와중에 난 다른 공부를 기웃거렸다. 또 다른 비싼 취미를.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론>에서 끊임없이 어떤 것들의 표면을 파고들어 더 진정한 것을 향해 가는 배움(스튜디오시타스, Studiositas)과 다르게 같은 층위에 있는 것들 사이를 끊임없이 옮겨 다닐 뿐 그 이상의 무언가로 귀결되지 못하고, 단순한 경험의 짜릿함을 넘어서는 어떤 성취도 이루지 못하는 배움을 쿠시오시타스(Curiositas)라 했다. 나의 공부는 쿠시오시타스였다. 허기를 채우듯 얕은 즐거움만 쫒는 공부는 쇼핑을 하거나 인터넷 쇼츠를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자각 때문인지 용기내 교수님께 전화했다. 논문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논문을 쓴다고 휴직을 결심할 즈음 코로나가 덮쳤다. 그 기간에 큰 아이가 대입을 치뤘고 결과가 좋지 않았다. 작은 아이는 특목고에 적응하지 못했다. 시아버지가 쓰러지셔 2년 가까이 병환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친정아버지는 치매와 신장 투석을 병행해야 했고 최근에 돌아가셨다. 남편의 일도 경제적 부침이 있었고 난 무급휴직 상태였다. 차곡차곡 겹쳐 온 시련들에도 불구하고 논문은 통과됐고 졸업장을 받았다. 그후 도전할 만한 제안도 받았지만 결국 학교 현장으로 돌아왔다. 난 교.포.박.이었다.




20년 간 공부해 얻은 박사 학위는 크게 쓸데가 없었다. 그때 당시 그 쓸데 없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쓸모있어야 한다는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공부를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를 설득할 공부의 쓸모를 찾아야 했다.

그때부터였다. 온라인 책 읽기, 철학적탐구공동체 활동, 책쓰기교육 활동, 학생들과의 책대화 등등. 인정과 교환 가치가 있는 쓸모들을 제쳐두고 그냥 마음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공부해갔다. 그런 내게 그 방향이 맞다고 말해주는 책을 만났다. 소중한 젊은 친구가 보내준 책, 제나 히츠의 <찬란하고 무용한 공부>다.




"나는 학자 공동체보다 더 넓은 인간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꼈다."(29쪽)


"나는 더 넓은 경험을 갈망했다. 어떤 식으로든 사건들에 내 나름대로 주도권을 쥐고 싶었다."(29쪽)


"나는 무언가 다른 것, 무언가 새로운 것을 원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33쪽)


"진정한 한계를 마주했을 때에야 인간성이 가장 잘 표현되고 향유된다는 말은 클리셰로 들리겠지만 엄연히 진실이다."(42쪽)





읽는 내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듣는 듯 했다.

내가 공부하고 싶었던 이유가 세계를 이해하고, 세상과 연결되고 싶었던 거구나, 어린 시절 공상하던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었던 거구나. 그동안 욕망과 쓸모를 우선으로 생각하며 살아내느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이유들이다.


한 사람의 내면의 삶을 구성하는 사유와 상상은
숨겨지고 말해지지 않고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보통 사람들에게 실패가 내면으로 향하는 가장 잘 다져진 길이라는 말처럼 코로나 기간 맞닥뜨린 시련들은 내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을 들쳐내주었다. 삶에서 주어진 크고 작은 유용성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쓸모를 포기했더니 내 공부가 실패도 헛짓도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어쩌면 난 쿠시오시타스(Curiositas)에서 스튜디오시타스(Studiositas)로 무사히 넘어간 것일수도.


배움은 숨겨진 상태로 시작한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내면에 품은 생각에서,
독서광들이 조용한 생활에서,
출근길 아침에 몰래 하늘을 바라보는 일에서,
테라스에 앉아 무심히 새들을 관찰하는 행위에서 시작한다.
배움의 숨겨진 삶이야말로 배움의 핵심이자 의미 있는 부분이다.(44쪽)

배움의 핵심과 의미는 숨겨져 있고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쓸데 없다 오해받을 수 있다. 프레드릭처럼.


대학 학문은 몇몇 사람들에게 흥미롭고 큰 통찰을 줄 수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 공부가 필요한 건 아니다. 학교 교실에서 배우는 수학, 과학, 사회 교과 지식들을 올바른 의견으로 보고 흡수하는 식의 공부는 삶의 본질적 질문에 답해주진 못한다. 그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공부는 일상에서 시작되고, 일상에서 실천되어 삶에 변화를 일으킬 때 얻을 수 있다.

제나 히츠도 배움의 진정한 가치에 질문하고 답하기 위해 사람 대 사람의 가르침으로 돌아갔다고 말한다. 그리고 공부하는 삶의 중요성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고백한다. 나도 철학적탐구공동체 공부를 하면서 교.포.박. 교사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숨겨진 배움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해주는 일이 내 역할이라 생각하게 됐다. 교실 안에는 공부의 목적을 쓸모에 초점을 두며 맹목적으로 공부하는 나와 같은 아이들, 쓸모에 동의할 수 없어 방황하는 아이들이 많다. 그 아이들이 자신이 하는 공부가 갖는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제나 히츠는 제안한다.


사유를 즐기는 평범한 사람의 사례를 모아보기 바란다.
소수에게만 어쩌면 가족과 이웃과 동료에게만
삶의 찬란함을 드러내 보이는 사람을 찾아보기 바란다.


나도 숨겨져 있는 배움을 즐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 쓸데 없는 공부가 갖는 쓸모를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배움은 드러나지 않을 뿐이라고, 하던 대로 계속 하라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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