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려는 마음

정아은의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을 읽고

by ㅁㅗ하니

요즈음 예민 지수가 최고조다. 평가와 거의 동시에 마무리해야 하는 마감 있는 글을 써야 해서다. 학생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며 신뢰성 높은 글을 써야 하는 주관적인 글쓰기, 그것도 최소, 최대 글자수, 따옴표, 각종 문장 부호까지 정해진 종류와 형식이 있다. 학교나 지역을 나타내는 말,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학생 성적에 관한 말은 공식적 금기어다. 이뿐인가 비공식적으로 피해야 할 단어 목록들은 수두룩 빽빽해 옆에다 펼쳐놓고 확인하며 써야 할 정도다. 여러번 고쳐썼다고 안심했다간 여기저기 빨간펜으로 그어지고 덕지덕지 라벨이 붙어 되돌아온 종이 뭉치에 좌절하게 된다. 이렇게 인간 시스템이 걸러내지 못하는 단어나 표현들은 이듬해 기계 시스템에서 걸러지고 최악의 상황에서 교사의 책임을 묻는 경우도 생긴다. 얼핏 보면 정아은의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에서 소개하는 작가의 글쓰기와 비슷하다. 하지만 두 글쓰기는 분명 다르다. 한쪽에는 있고, 다른 쪽에는 없는 게 무엇인지 책을 읽으며 들여다보았다.

오랜 기간 글을 써온 작가들도 자기 글이 주제에 딱 맞는 글이 아닐 수 있으리라는 불안함과 조급함을 갖고 좌절한다고 한다. 정아은 작가는 말한다. 책쓰기를 시작하기 위해 넘어서야 하는 건 잘 쓰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정답이 있으리라는 믿음이라고. 나 역시 부단히 싸우고 있는 믿음이기도 하다.

정답 고르기의 기억은 한국인의 몸에 지울 수 없는 화인으로 박히지 않았을까.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해도 항상 정답을 찾아 헤매게 되는 습성. 정답을 향한 해바라기 성향에 영향을 미친 근대화 바람. 문제의 근본에 흐르는 역사와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해결과 성과를 만들어내기를 중시한 국가 전제의 분위기. (30쪽)

학창 시절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다. 단순하며 명쾌한 설명에 전율을 느낀 적도 있을 정도로. 그래서 교사라면 과학을 가르치고 싶었고, 현재까지 26년을 고등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고 있다. 교과서 지식을 절대 진리처럼 가르쳤고, 정답을 잘 찾아내는 방법을 가르치며 자부심을 느꼈다.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하진 않겠다. 과학적 소양을 위해 기초 지식이 필요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한다. 문제는 내가 정답을 묻는 수업이 답답해진 거다.

화학 교과는 선택 교과로서 좋아하거나, 최소한 배워야 하는 이유가 분명한 학생들이 수업을 듣는다. 그러다 보니 과학을 왜 배워야 하는지 학생뿐 아니라 교사 자신도 묻지 않거나 생각하지 않게 된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상황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근본적 질문을 하게 되는 것처럼, 외고에서 수업하며 그 결정적 질문과 만났다.

“화학은 너무 어려워요. 선생님은 이 어렵고 재미없는 공부를 왜 하셨어요?”

아이의 당돌한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도 못했다. 답할 수 없었던 건 나도 그 이유를 잊었거나 몰라서였다. 학생의 질문으로 ‘과학이란 무엇인지’ 묻게 되었고, ‘과학을 왜 배워야 하는지’ 학생들을 설득해야 했고, ‘과학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가르치던 정답으로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니까.

지금 만일 당신에게 지금 당장 해야 하는 본업에 방해가 되지만 자꾸만 알고 싶고 궁금해지는 화두가 있다면, 그 화두를 적극적으로 따라가야 한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그 화두에 몸을 담가야 한다. 몸을 담그는 과정에서 만나는 자료와 사람들의 말, 내 입에서 나가는 말들 중 의미있게 여겨지는 조각들을 기록해야 한다. 자신만의 문제의식과 사유를 담은 이 조각들이, 향후 집필하게 될 논픽션 단행본의 대들보가 되어줄 것이다.(124쪽)

관련 책을 찾아 읽다 대학원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수업 관련 책, 과학 교육론이나 화학 교재론 등. 하지만 여전히 내가 가진 본질적 질문들을 교묘히 피해 가는 난해하고 진부한 말뿐이었다. 컵에 물을 비워야 채울 수 있듯 익숙하고 잘해왔던 것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철학 공부였다. 처음엔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와 달리 철학이라는 완고한 벽에 좌절하고, 낯선 용어들로 말문이 막혔다. 책을 읽으며 메모하고, 기록하고, 생각을 덧붙이면서 글쓰기가 좋은 철학적 탐구, 철학함이라는 걸 알아갔다.

한국의 공교육 체계를 통과한 성인에게 모자란 것은 그런 '지침'보다는 '직접 올라타고 넘어지지 않도록 나아가는 경험'이다. 우리는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규칙과 주의 사항을 외우고 있지만 정작 글을 많이 써보지는 않았다.(63쪽)

질문에 답하려면 과학 분야 논문이나 보고서 쓰는 정도로는 부족했다. 정답 찾기식 쓰기에서 벗어나려면 인문학 책을 읽고 계속 쓰는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학생 대상 인문학 강의, 고등학교 논술 아카데미, 인문 영재 강의, 인문독서추진단 활동. 과학 교사로 익숙하고 잘할 수 있는 장을 벗어나 낯설고 서툰 영역에 발을 들였다.

인문학은 사람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파고들어도 파고들어도 파악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의 마음을 파헤치는 데 정답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한 순간도 인문학이라 불려선 안된다. 글쓰기와 인문학은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문화유산 가운데 정답과 가장 거리가 먼 장르인 것이다. 우리 마음의 생각 회로에는 시공간의 제한이 없다.(31쪽)

인문학을 읽고 쓰며 달라진 점이 있다. 처음 질문들에서 ‘과학’이라는 단어의 무게다. ‘과학을 왜 배워야 하는가?’는 ‘왜 배워야 하는가?’로, ‘과학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는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로. 어쩌면 과학은 배움의 이유와 과정에서 만나는 하나의 언어이지 않을까. 고등학교 과정에서 배우는 과학은 다수의 보통 학생들이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오히려 실재하는 진리로 보는 것보다 인문학으로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내 생각이 드러나기 시작한 거다. 여전히 분명하지는 않지만.


사람은 어떤 경우에 변하는가? 사람이 변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통해 '앎'을 얻을 때이다. 인생의 특정 순간을 통해 우리는 '아, 그렇구나!'하고 무릎을 친 뒤, 생각을 바꾼다. 그리고 바뀐 생각을 제 인생에 투여해 나아가던 항로를 조정한다. 그렇다면 '앎'은, 다른 말로 '깨달음'이라 할 수 있는 이 진한 변곡점은 언제 발생하는가? 마음에 큰 파동이 일 때다. 외부에서 무언가를 통해 마음에 충격이 가해지고 그로 인해 마음에 가지런히 정렬돼 있던 기존 사고의 질서에 균열이 생길 때다. 그런 균열이 오는 것은 높은 확률로,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구체적이 예시를 접할 때다. ....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이다......누군가의 말보다 누군가의 삶을 통해 배운다.(135쪽)

책쓰기교육 연수에 참여하며 질문에 답하고 싶다는 마음, 쓰는 중의 충만함, 내 안의 책쓰기에 대한 열망을 알아차렸다. 그 마음, 그 질문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알아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이제 읽고 쓰는 것을 중심에 둔 삶을 살겠다 다짐했다. 아이들이 책쓰기를 하며 자기 목소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쓰는 것에 막연한 동경과 끌림을 갖고 있는 교사들과 함께 하며 무용해 보이는 책대화와 책쓰기에 시간을 들이고 있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만족감에서 온다. 만족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앎'에서 온다. 내가 무엇을 가질 수 있었는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이었는지, 무엇이 사회의 탓이고 무엇이 내 탓인지, 돈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지와 같은 인과관계를 알게 되면 막연했던 욕망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바뀐다. 내가 진짜 갖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이고 갖지 않아도 별 상관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물질에 대한 욕망도 제어할 수 있다. 내가 어떤 순간에 굴욕감에 지배당하고, 어떤 순간에 굴욕감을 수화할 수 있는지 파악하면,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분노의 순간을 분류해 각각 다르게 대응할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을 가장 빠르게,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글쓰기다.(230쪽)

글을 쓰려면 자기 생각과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 정해진 답이 있을 거란 믿음은 이를 방해한다. 나도 그랬지만, 아이들이나 선생님들도 낯설어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그림책 대화였다. 처음 그림책 대화에서 내 생각과 감정이 부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해방감을 주었다. 그림책의 글과 그림이 보여주는 삶의 구체적인 이야기는 정답이 정해지지 않은 질문을 끌어내고 열린 답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우연히 만난 그림책에서 쓰려는 마음을 위로받고 응원받을 수 있었다. 진리는 단순함 속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학교에서 ‘해야 하는 쓰기’와 내가 ‘하고 싶은 쓰기’는 쓰는 마음에서 차이가 있다. 매일 수업에서 ‘가르쳐야 할 것’과 ‘가르치고 싶은 것’ 사이를 오가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전자의 질문들도 과학을 잘 가르치고 싶다는 마음, 하는 일에서 행복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거란 걸 쓰면서 알게 됐다. 이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시작된 글쓰기를 책이 되는 쓰기로 옮기는 중이다. 자꾸 쓰려는 마음을 알아차렸으니 쓰는 사람이 되어 글쓰기가 주는 효용의 바다에 빠져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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