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손더스가 말하는 안톤 체호프의 '구스베리'를 읽고
고등학생들은 진로에 고민이 많다. 겉으로는 해맑아 보여도 막상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물으면 대답하지 못하거나, 잘 모르겠다 말하는 경우가 많다. 대답하는 학생에게 왜 그 일을 하고 싶은지 물으면 종종 이런 답을 듣는다.
"안정적이잖아요."
"돈을 잘 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너무 현실적인 답이라 당황스럽지만, 노련하게(?) 재차 묻는다.
"그래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건 맞지. 그래도 너가 그 일을 하고 싶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잘 살고 싶어서요. 돈이 있어야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잘 살 수 있잖아요."
더 이상 묻지도 반박하지도 못했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끝나갈 즈음 소위 좋은 학군이라는 동네로 이사했다. 6학년이 된 큰 아이가 밥을 먹다 말고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 프랑스어 배우고 싶어요."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대충 되물었다. "갑자기 왠 프랑스어?"
"난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단 말이야. 프랑스어 하는 애는 없다구요."
아이는 말끝에 울먹였고, 아이 말에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아이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세상 물정 모르는 엄마다, 초등때부터 중등 공부를 시작하지 않으면 아이가 나중에 힘들어진다, 천천히 연습시키고 적응시켜야 한다, 등등. 고등학교에서 수년 동안 입시를 지켜본 교사인데도 주위 선배 엄마들의 조언에 흔들렸고 무시할 수 없었다. 교사이기 전에 엄마니까. 하지만 그때까지 몰랐다. 자기도 잘하는 것이 있다는 걸 보여줘야 했던 현실을 아이가 감당하고 있었다는 걸.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함께 한참 울었다. 그후 학원 정보를 알아보고 상담도 받으며 열성 엄마들을 따라가려 노력했다. 아이도 늦은 시간까지, 주말까지 학원에 가 공부하는 것에 익숙해져갔고 그렇게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때는 서둘러 무사히 적응해 다행이다 생각하며 나와 아이들을 위로했다.
"그래,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지금은 참아 내자."
어른이 되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한 학생, '지금 공부해야 한다'고 아이들을 다독인 나. 우리가 놓친 것은 무엇일까?
행복을 인생의 목표로 두는 건 현재는 불행하다는 걸 뜻한다.
우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길 원한다. 주도적으로 살아갈 때 삶이 의미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과 친밀감을 느끼며 연결될 때 행복하다 느낀다. 종교에서는 자신이 누군가에 선물이 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처럼 '행복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는 늘 해오던 본질적 질문이고 철학사에서 반복적으로 재정의되어 왔다. 덕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궁극적으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쾌락은 일시적이며 내면의 평온과 도덕적 삶이 행복이라고도 말한다. 한편으로 행복을 쾌락(즐거움)으로 보기도 하고, 삶에 만족하고 긍정적인 판단으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도 본다. 그래 다 좋다.
그래도 우린 어떻게 살아야 행복해질 수 있을지 늘 헤매고 질문한다.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건 뭐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나?
행복이라는 것이 실제 있기는 한가?
행복이라는 신기루를 쫒기 위해 언제까지 희생해야 하나?
안톤 체호프의 <구스베리> 속 이반도 토해내듯 질문한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그른가?
행복이 무엇인가?
소설 속 주인공 이반은 동생 니콜라이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질문하는 이유를 말한다.
시골 생활에는 좋은 점이 있지. 테라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연못에서는 오리가 헤엄치고 모든 것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고, 그리고 구스베리가 익어가.(497쪽)
니콜라이는 단순 반복되는 사무일과 넉넉하지 못한 형편으로 불행하다 생각했기에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시골 생활을 동경한 듯 하다. 구스베리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답답한 마음, 그리움 그리고 다시 행복하고 싶다는 복합된 감정이 집약된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니콜라이의 감정은 점점 구스베리에 대한 갈망을 키우고 실행에 옮기며 분명한 욕망으로 자리잡아갔다.
이미 마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신문 광고를 읽고 돈을 모았소. 그러다 결혼을 했다는 소식이 들리더군요. 여전히 구스베리 덤불이 있는 땅을 사기 위해 아무런 애정도 없이, 단지 돈이 있다는 이유로 나이 들고 못생긴 과부와 결혼한 거요. 결혼한 뒤에도 게속 인색하게 살면서 제수를 반쯤 굶기고 제수의 돈을 자기 이름으로 은행에 넣었소. (중략)돈이란 건 보드카와 마찬가지로 사람한테 묘한 짓을 할 수 있더군요.(498쪽)
가난한 공무원이 구스베리가 있는 아름다운 집과 농장을 소유하고 하인을 둘 정도로 살려면 돈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돈이 있어야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지 않냐던 학생과 다르지 않다. 맞다.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이 있다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데 자유도가 커진다. 이반의 말을 빌려 체호프는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는 생각은 행복을 물질적인 것을 갖추는 일차원적 수준에서 보는 거라 말한다.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도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돈은 주조된 자유'라고 말했다. 돈이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 발터 벤야민은 '돈은 유사 전능성을 준다'고 말했다. 돈으로 못하는 것이 없어 신이 된 듯한 착각을 불러올 수 있다 경고한다. 안타깝게도 니콜라이가 행복으로 가는 과정은 이대로다.
나무를 심은 뒤 처음 딴 구스베리였소. 동생은 웃음을 터뜨리고나서 잠시 말없이 눈물을 글썽이며 구스베리를 보았는데 흥분해서 말을 못합니다. 이윽고 구스베리 하나를 입안에 넣고 마침내 갈망하던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의기양양해서 나를 흘끗 보더니 말했소. '정말 맛있네!', 그러더니 게걸스럽게 먹으면서 계속 말하더군요. '아, 얼마나 맛있는지! 맛 좀 봐!'
사실은 단단하고 시큼했지요.(502쪽)
드디어 소중한 꿈이 실현된 사람이 어떠한지를 보고 싶었지만 동생의 모습은 그러지 못해 답답하고 슬픔을 느꼈다고 이반은 고백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인간의 행복에 관한 내 생각에는 늘 슬픔이라는 요소가 섞여 있었는데, 정작 행복한 사람을 보니 절망에 가까운 답답한 느낌이 엄습합디다. (502쪽)
이반은 동생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이 꿈꾸는 행복이 순수하고 도덕적인 것만이 아닌 탐욕, 타락, 위선, 거짓과 함께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당신은 욕망이나 탐욕을 행복과 구분하고 있는가? 무엇이 행복인가?
특히 밤에 나를 무겁게 짓누르더군요. 동생 방 옆에 내 잠 자리를 마련해 주었는데 동생이 깨어 있음을 알려주는 소리가 들렸소. 동생은 계속 일어나 구스베리 접시로 가서 자꾸 먹더군요. 정말이지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얼마나 압도적인 힘인가! 인생을 보시오. 강한 자들이 무례와 게으름, 약한 자들의 무지와 야만성, 도처의 끔찍한 가난, 과밀, 타락, 만취, 위선, 거짓...그럼에도 모든 집과 모든 거리에 평화와 고요가 있소.(502쪽)
이어 이반은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본성을 말한다.
모든 만족하고 행복한 자의 문 뒤에는 반드시 작은 망치를 든 불행한 사람이 있어 계속 거기 서서 문을 두드리며 그가 아무리 행복하다 해도 조만간 인생은 발톱을 드러낼 거라고, 고통이, 그러니까 병과 가난과 상실이 찾아올 거라고, 그때가 되면 지금 그가 다른 사람들을 보거나 듣지 못하듯이 아무도 그를 보거나 듣지 못할 거라고 상기시켜 주어야만 하오.(503쪽)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로인해 불행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행복한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 병, 가난, 상실에 의해 불행해질 수 있다. 행복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면 행복이라는 실체가 무엇일까? 있기는 한 건가? 영원하지 않다면 흐르는 시간처럼 행복은 지속되는 상태가 아니라 흘러가는 것이 실체일 수 있다. 행복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이반은 분노에 차 말한다.
이반은 분노한 표정으로 부르킨을 보며 말했다. "왜 우리는 기다려야 하는지 물고 싶어. 무슨 이유로? 어떤 것도 단번에 할 수는 없다고, 모든 관념은 점진적으로 때맞추어 실현된다고들 하지. 하지만 누가 그런 말을 하는 거요? 그게 정당하다는 증거가 어디 있소? 여러분은 사물의 자연적인 질서니 모든 현상을 관장하는 법칙을 거론하지만 나, 살아 있고 생각하는 사람이 도랑을 건너뛰거나 건너갈 다리를 놓을 수도 있는데 그 옆에 서서 기다린다는 사실에 무슨 법칙이 있고, 무슨 질서가 있소? 다시 말하지만 왜 기다려야 하는 거요? 그렇게 기다리다, 결국 우리에게는 살 힘조차 남지 않을 거요. 하지만 우리는 살아야 하고 살려고 열심이잖소.(504쪽)
이반이 얼마나 이 문제에 대해 고민했는지 느껴진다. '행복이란 이런 거야'라며 전형이 있듯 규정하고, 그걸 위해 현재의 고통을 인내하고 의무와 책임을 다하라 다그치는 사람들에게 따지듯 묻는 거다. 내가 아이들에게 지금 공부를 해야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가스라이팅 했듯.
이반은 행복에 대해 열변하며 자기의 잠정적 결론을 친구들에게 말한다.
젊고 강하고 기민할 때 멈추지 말고 선한 일을 하시오! 행복은 없고 있어서도 안되오.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있다면 그 의미와 목적은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더 크고 더 이성적인 거요. 선한 일을 하시오.(505쪽)
다소 종교적이며 교훈적인 말로 마무리한다. 가르치듯 해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누가 모르나. 행복하고 싶다는 욕망이 인생의 의미와 목적보다 못한 가치인가?
체호프가 이 말을 끝으로 소설을 끝냈다면 내가 이렇게 글을 쓰지 않았을 꺼다.
체호프는 우리에게 행복에 관해 더 생각해보라고 밀어붙인다.
이반의 행복에 관한 열변에 친구 부르킨, 알료힌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못해 지루해한다.(직접 소설을 읽어보길 권한다.) 삶에 관한 본질적 질문에 관해 깊이 생각하길 싫어하고 피하는 우리들 모습이지 않나? 또 아름다운 하녀 펠라게야와 소나기를 활용해 이반이 말한 행복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체호프 소설이 19세기가 아닌 21세기에도 읽히는 이유다.
<구스베리> 소설의 영어 제목이 <Swimming in a rainy pond>이다. 작가 손더스도 자신의 책 제목을 동일 이름으로 붙였다.
소설에 대한 손더스의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 있다.
이반 이바니치는 오두막에서 나와 빗속에서 첨벙 물로 뛰어들어 두 팔을 넓게 밀어내며 헤엄을 쳤다. 그가 일으키는 물결에 하얀 수련들이 흔들거렸다. 그는 강 한가운데까지 헤엄쳐 나가 물속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다른 곳에서 올라와 계속 헤엄치다가도 연신 물속으로 다시 들어가 바닥에 손을 대려 했다. "아이쿠 하느님!" 그는 기뻐서 계속 소리쳤다. "아이쿠 하느님!"그는 물방앗간까지 헤엄쳐 가 농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와 강 한가운데에 누워 얼굴을 비에 드러낸 채 둥둥 떠 있었다. 부르킨과 알료힌은 이미 옷을 입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는 계속 헤엄을 치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어이쿠 하느님!"그는 계속 탄성을 질렀다. "주여, 저에게 자비를."(495쪽)
이 장면을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이반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한껏 누리고 있다. 어린아이가 된 듯 자유롭다. 돈, 명예, 물건 등 다른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 그냥 그 자체로 누리는 거다. 행복해지기 위해, 행복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애쓰고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간순간을 만족하고 충분히 누릴 때, 그리고 이반처럼 감사하다 표현할 때 '맞뜨리는 것(encounter)'이 행복일 수 있다 말하는 듯 하다.
행복은 목표가 아니라 충실한 삶의 부산물이다. 놓치기 쉬운 단순한 진리. 이게 원래 구스베리다.
작가 손더스는 체호프의 소설이 갖는 가치를 말한다.
이 이야기는 행복에 관해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우리에게 말해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에 관해 생각하는 일을 도와주려 하는 것이다.
손더스는 행복뿐 아니라 다른 질문들에 대해서도 질문에 바로 답하기 전 한 번 더 명료하게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말한다. 당연하다. 인간의 생각, 입장은 주관적이고 편협하기 때문에 나름의 문제가 있다. 그래서 지나치게 믿고 확신하면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판단하기 전에 일단 듣고 질문하고 생각해봐야 한다. 이를 철학 용어로 판단중지(에포케 epoche)라 한다. 체호프는 우리가 행복에 관해 서둘러 판단하지 않게 이야기 속에 여러 장치를 숨겨놓았다. 우린 왠지 낯설고 어긋나 보이는 걸 찾아내면 된다. 그러기 위해 일단 판단 중지하고 읽고 들어야 한다. 철학적탐구는 일상 속 삶의 이야기에서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끄집어 내고 대화를 통해 본질적이고 추상적인 질문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이다. 그러기에 그림책 만큼이나 소설은 좋은 탐구 소재이다.
이에 공감한다면 데니스 수마라의 '왜 학교에서 문학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책도 읽어보길 권한다.
이야기를 소재로 철학적탐구를 하려는 이유는 그 무엇보다 내 삶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더 잘 살아내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더 나아지는 엄마, 더 성숙해지는 인간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