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비밀을 알고 있나요?

'삶(신시아 라일런트 글, 브렌던 웬젤 그림)'을 함께 읽고

by ㅁㅗ하니

격주 목요일 저녁마다 선생님들과 '그림책과 함께 철학함하기(줄여서 그함철)'를 하고 있다.

신시아 라일런트가 쓰고 브렌델 웬젤이 그린 그림책 '삶'을 읽고 대화를 나눴다. 책의 각 장면을 돌아가며 읽은 후 작가의 생각과 의도를 헤아려보고 각자의 삶과 연결해 장면을 해석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날 선생님들과 함께 철학하기의 소재는 삶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지 말하는 장면이었다.

그림책 '삶(신시아 라일런트 글, 브렌던 웬젤 그림, 이순영 옮김)' 중에서


작가는 동물들이 무엇을 가장 사랑할지 말한다. 매는 하늘이라고 할 거고, 낙타는 모래라고 말하고, 뱀은 풀이라며 쉭쉭거릴 거라 말한다. 그런데 거북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지 모른다고 한다. 이유는 수백년을 살면서 너무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란다. 그러고 나서 작가는 말한다.

하지만 거북이도 삶을 사랑합니다.
등에 쏟아지는 소나기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고 삼 대학 입학 원서를 쓸 즈음, 그땐 지금과 입시가 달랐으니 10월이었겠다. 교무실에서 담임 선생님은 눈도 맞추지 않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오셔서 원서 다 쓰고 가셨다."

"네?"

쓰고 가신 원서는 지방 국립대학교 사범대학 원서였다.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대학, 학과였다. 고등학교를 지원할 때도 아버지 말을 따랐다. 먼 도시에 가서 공부하느니, 시내 고등학교에 가 열심히 공부하면 더 유리하다고. 도시로 간 친구들을 보며 자존심 상했지만 그 말을 믿고 따랐다. 이과 학생들은 하얀 가운에 대한 로망을 갖고 있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처음엔 유전공학을 연구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부모님의 반응은 시쿤둥했다.


"여자가 무슨 공대. 공대는 가지 마."


다른 말씀이 없어 공대 말고 의대를 가면 되겠지 싶었다. 그래도 지방 의대는 갈 수 있는 성적이니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갑자기 사범대학이라니. 교사는 선택지에 없었고 한번도 그려본 적 없었다. 집안 사정을 고려해본 적 없는 철없는 생각이었다.

그날은 야자를 하지 않고 집에 갔다. 방에 앉아 계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끓고 말했다.


"저 의대 가고 싶어요. 형편이 안되면 입학금만 주세요. 그 다음은 제가 알아서 할께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입학만 하면 생각대로 될 줄 알았다. 말대꾸 한번 하지 않던 모범생 막내딸이 처음으로 아버지 뜻을 꺽으러, 아니 협상이란 걸 시도한 거다. 그때 심장은 말하는 대로 요동쳤다.


"안돼. 너 뒷바라지 하느라 식구들이 고생해야 되겠니? 오빠들 힘들게 할 수 없다. 네가 아들이면 모를까, 여자애가 지방 사대 나와 교사하는 게 훨 낫지."


이 한마디 하시고 돌아앉으셨다. 목소리는 단호했고, 눈빛은 차가웠다. 평소 엄하셨지만 공부잘하는 막내딸은 편애하시던 아버지다. 더 이상 말해도 소용없단 걸 알았다. 동의가 되지 않았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말 끝에 인사 없이 뒤돌아 뛰쳐나왔다. 대문을 나올땐 이미 비구름이 몰려와 어둑해져 있었다. 그리고 계속 학교까지 걸었다. 그 먼 길에 소나기가 함께 했다. 하늘에서도 눈에서도 마음에서도 비가 내렸다.

믿었던 부모에 대한 원망, 내 뜻과 상관없이 포기해야 하는 억울함, 세상의 높은 벽의 존재를 알게 된 좌절감,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이유의 부당함에 항변하지 못한 답답함.

그때 맞았던 소나기처럼 처음 접한 이 복잡한 감정의 기억은 마음에 새겨져 아렸다. 그 후 일이 뜻대로 되지 않다 생각될 때, 이룬 것 없는 평범한 삶이라 답답하다 여겨질 때 내 감정은 그 시간으로 돌아가 날 흔들었다.


결혼해 아이가 그 때 내 나이와 같아질때가 되어서야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거북이가 등에 쏟아지는 소나기를 결국 사랑하게 된 것처럼.

원망과 결핍도 나의 일부라는 걸 고백할때까지 아버지는 기다리지 못하셨다. 돌아가시는 아버지 귀에 대고 말했다.


"아버지, 이제 더 이상 나한테 미안해하지 말아요. 나 원망하지 않아."


이 말을 꼭 들으셨길.


좋고 행복했던 경험만 삶이 될 수 없다. 남보다 뒤쳐지게 한 결핍, 세상의 기준에 못미쳤다는 실패도 삶의 중요한 조각이었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일때 삶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 생각한다.

책 말미에 작가는 삶을 사랑할 수 있는 비밀을 말한다. 그 비밀은 모든 삶은 변한다는 거란다.

작가가 동물들은 알고 있는데 혹시 당신도 이 비밀을 알고 있는지 묻는 듯 하다.


그림.png 그림책 '삶(신시아 라일런트 글, 브렌던 웬젤 그림, 이순영 옮김)' 중에서
동물들은 삶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삶은 변한다는 것이지요.



근대와 현대 사유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이 '존재에서 생성으로(Frome being to becoming)이다. 전통적 서양 존재론은 생성(becoming)이 일어나는 현상 너머 본질적 세계를 전제하지만, 현대 사유는 변화하는 현상을 긍정하고 여기에서 본질을 찾으려 시도한다는 데 차이가 있다. 이렇게 사유 전통을 과감하게 끊어낸 사람이 니체이고 베르그송이다. 이들 덕에 현상학적 인간존재론 즉 실존적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세계가 변화한다는 것(생성한다는 것)은 시간이 있다는 의미와 같다.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생물들은 시간의 지평에 속해 있기에 모든 것은 변한다. 삶도 변한다. 이것은 자명한 진리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 경험하는 현상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인생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림책 작가가 삶에서 아름다운 것이 모두 사라진 것 같을 때에도 잊지 말고 주위 현존재들에 관심을 기울이라 말하는 이유다.


자기 인식하는 얼마 안되는 동물인 인간, 현존재(지금 여기에 사는 존재)가 자기 삶을 이해하려면 시간을 전제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현존재는 늘 미래에 생각이 가 있다. 그 미래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우린 죽음으로 향해가는 존재란 걸 안다. 죽음이 자기 실존의 근본 조건임을 아는 거다. 그래서 우린 늘 불안을 안고 살 수 밖에 없다.


모든 부정적 감정의 끝은 이 실존적 불안과 맞닿아 있다. 절망, 실패, 좌절, 열등감, 억울함도 결국 필멸할 수 밖에 없는 내 존재의 의미를 상실할까 불안해 드는 감정들이다. 이 불안을 통해 인간은 무, 없음, 없는 것 앞에 서게 되고 그때 절망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 삶의 비밀이다. 행복, 성공, 성취로는 실존을 확인할 수 없다. 우리가 이런 삶의 비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 때, 자기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온전히 이 생을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오랜 시간 경험으로 거북이는 등에 쏟아지는 소나기가 자신이 살았 있음을 알려주는 실존의 증거란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건지도 모른다.


그림책이 던진 질문으로 시작된 글을 쓰며 과거의 나를 만나 진정으로 아버지와 화해하게 된 듯 하다. 그리고 미래의 나를, 삶을 사랑하겠다 다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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