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시간을 살고 있나요?

철학의 개념 뿌리, 시간에 대해

by ㅁㅗ하니



그리스 신화 이야기는 서양 문학, 회화 등 예술 전반에 마르지 않은 샘이 되어 영감을 주어왔다. 새턴, 그리스식 이름으로 크로노스(Kronos), 농경의 신이기도 한 사투르누스 이야기도 그 중 하나다. 사투르누스는 제우스의 아버지로도 더 유명하다. 크로노스의 아버지는 우라노스, 우라노스를 거세시킨 크로노스는 자식들한테 똑같이 내쳐질 거라는 저주를 받아 아내 레아가 아이를 낳으면 삼켜버린다. 이 신화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그림이 루벤스(1577-1640, Peter Paul Rubens)와 고야(1746-1828, 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의 '새턴,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다.

(좌) 루벤스(1577-1640), (우) 프란체스코 고야(1746-1828) 출처:위키 백과

같은 이야기를 표현했지만, 두 그림에는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 먼저 고야의 크로노스 얼굴은 무엇인가 크게 겁이 질린 표정이다. 무엇이 크도록 겁이 났을까? 또 크로노스가 겁에 질려 먹고 있는 것이 아이의 몸이 아니라 다 큰 성인의 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성인의 몸이 인간의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리스 시대 아이의 조각상은 찾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고야는 완전한 아름다움을 갖는 그 '무엇'에 극도의 공포를 느껴 삼켜버리는 크로노스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그럼 그 '무엇'이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그리스 신화에는 크로노스가 또 있다.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Chronos)다. 농경의 신인 크로노스(Cronos)와 음이 같고, 철자가 살짝 다르다보니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두 신을 혼동해서 동일한 존재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들은 농경의 신인 크로노스(Cronos)가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Chronos)을 다른 말로 ‘시간’을 삼키는 거라 해석한다. 즉 신마저 두려워 한 '무엇'이 바로 시간이라고 보는 거다.


과거 사람들은 자연의 변화, 특히 해나 달의 운동과 모양 변화, 천체의 위치 변화의 규칙성을 찾아 시간의 기준으로 삼았다. 현대는 더 정확하고 정밀한 시간을 알기 위해 세슘 원자의 진동수를 기준으로 정한다. 늘 인류는 시간을 정확히 측정하기 위한 더 정밀한 방법과 기준을 찾아왔다. 여기서 인간이 시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드러난다. 시간은 절대적이고 완전하다는 생각. 플라톤이 주도하는 서양의 사유에서 이 시간 개념은 과학의 사유로 이어졌고, 근대 과학에서 시간은 세계가 존재하는 불변하는 대전제가 되었다.

릴케가 “삶은 아직 오지 않은 죽음”이라 말한 것 처럼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어가고 시간 앞에서 무력하다. 무력함은 대게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고야가 말하고 싶었던 건 시간 앞에서 무력한 인간의 두려움, 불안이지 않을까?


이때 인간과 무관하여 객관적이고 절대적이며 한방향으로만 흘러가는 시간을 옛 사람들은 크로노스의 시간이라 불렀다. 크로노스 시간은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한계를 안겨준다.


그리스 신화에는 개념을 의인화한 신들이 많다. 시간의 신은 또 있다.


‘나’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 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지만, ‘나’를 발견했을 때는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의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나’를 붙잡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며, ‘나’의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다. 왼손에 저울이 있는 것은 일의 옳고 그름을 정확히 판단하라는 것이며, 오른손에 칼이 주어진 것은 칼날로 자르듯이 빠른 결단을 내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설명하는 '나'는 기회의 신인 카이로스다. 기회는 ‘어떠한 일을 하는 데 적절한 시기나 때’를 말한다. 하지만 한번 지나가면 붙잡지 못하고, 빨리 지나가 버리는 카이로스의 시간도 인간한테 우호적이지 않다. 이 시간 앞에서 인간은 여전히 수동적이고 무력하다.

이쯤되면 시간에 관한 존재론적 질문, 시간이란 무엇인지 묻게 된다. 기존의 시간을 의심하게 된다.

우주에 인간이 아니 생물이 멸종했어도 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시간은 관념(idea)에 불과한 거 아닐까?


키이라 나이틀리가 엘리자벳 역을 했던 영화 '오만과 편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다아시가 무도회장에서 처음 엘리자벳을 보았던 순간이다. 둘 사이 잠깐의 눈 맞춤이 그 후 둘의 생각을 흔들고 시간을 바꿔놓았다. 이 짧은 순간은 두 사람에겐 결정적 ‘사건’이다. '사건의 철학(이정우)'에 의하면,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사건’, 다른 말로 시뮬라크르이다.


시뮬라크르(프랑스어 simulacre, 영어: simulacrum)는 가상, 거짓 그림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시뮬라크룸에서 유래한 말로, 시늉, 흉내, 모의 등의 뜻을 지닌다(출처: 위키 백과). 플라톤 전통 사유에서 생겼다 없어지는 변화하는 현상은 부정되었고, 잠깐 생겼다가 없어지는 시뮬라크르는 이데아를 모방한 복사본, 가짜라는 의미를 가졌다. 하지만 현대 사유에서 발생했다 없어지는 변화하는 현상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어 시뮬라크르는 모방한 거지만 원본에 얽매이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더 진짜라는 뜻으로 쓰인다. 프랑스 학자인 장 보드리야르가 새롭게 조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엘리자벳과 다아시에게 눈맞춤은 둘 사이엔 유일무이한 사건, 시뮬라크르였다. 사건을 통해 두 사람은 다른 시간을 살게 된다.


절대적이고 완벽한 시간을 낯설게 보고 시간을 새롭게 본 사람 중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있다.

내 삶 전체에 걸쳐 끝없이 사유한 것은 다름 아닌 ‘사건’이었다.

그는 사건은 잠깐 생겼다 없어지지만 ‘의미’를 만들기 때문에 사건으로 그 전과 다른 시간이 창조된다고 보았다. 삶에서 만나는 결정적 사건으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시간을 살수 있다 말한다. 들뢰즈가 말한 시간은 한방향으로 흐르는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크로노스 시간도 아니고, 아주 짧은 순간 지나쳐버리는 카이로스의 시간도 아닌 사건으로 창조되는 시간, 아이온(Aion)의 시간이다. 아이온의 시간은 영원히 반복되는 시간으로 우리에게 지속되는 것은 사건이 남긴 의미다. 들뢰즈는 말한다.

'사건'을 만나 의미가 되는 자기의 시간을 살아라.


우리 생각은 관성이 있어 습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지 않게 보는 게 필요하다. 그 중 하나가 시간이다. 요즈음 너무 바빠 시간이 없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몰입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등 우린 시간을 늘 중심에 두고 말한다.


내가 지금 어떤 때를 지나가는지 안다는 건 자기의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이 알 수 있는 것 아닐까? 자기의 시간을 산다는 건 일상에서 만나는 사건을 지나치지 않고 그 의미를 길어 올려 새롭게 시간을 창조하며 살아간다는 의미라 생각한다. 이럴때야 비로소 우린 시간에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나마.


철학에는 다양한 철학어들이 있지만 너무 어렵고 복잡해 읽어 내는 것 조차 쉽지 않아 포기하곤 했다. 그런데 가만히 철학어의 뿌리를 찾아보면 일상어에서 시작되는 것들이 많다. 철학적 논쟁의 주제인 존재와 무, 우연과 필연, 하나와 여럿, 부분과 전체, 무한과 유한, 시간과 공간 등은 사실 우리 일상 대화 속 곳곳에 숨어 있는 개념들이다. 일상 대화나 이야기, 그림책 등을 소재로 철학적 대화를 시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철학이 아니라 철학함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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