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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호 Jul 22. 2022

안개

안개[안ː개]  

명사 지표면 가까이에 아주 작은 물방울이 부옇게 떠 있는 현상.


마음이 복잡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퇴사 후 세 달이 되어가는 시점.

내 커리어는 어떻게 되는 건지, 아이를 낳을건지 말건지

낳는다면 언제가 나을지

다시 회사를 다녀서 일을 시작하는게 맞는 건지,

새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해보는게 나은지,

그렇다면 내가 새롭게 하고 싶은게 도대체 뭔데?



모든 게 불명확했고, 내가 뭘 고민하는 건지, 왜 고민하는 건지,

도대체 답을 내릴 수나 있는지


그런 것들이 나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무의미하게 틀어놓은 TV와 인스타그램 화면에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이 나왔고


나는 그들을 보면서 또 조급해지는 마음과 끝도없는 이미지, 영상의 연속에

중독되어서 머릿 속이 뿌얘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 의미도 없이 걱정과 고민 그리고 자괴감으로 보내는 시간인 것 같았다.


이런 나를 포장하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지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내가 도대체 뭘 원하는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허둥대며 지낼 뿐이었다.


시간이 되면 요가를 가야했다.


요가를 가는 것만이 거의 유일하게 내게 주어진 해야만 하는 일정 중 하나이니까.


그런데 오늘따라 두통이 지속되었다.

요가복을 입고 요가매트를 챙겨서 조금 일찍 밖으로 나오니,

공기가 맑았다.


비가 내린 뒤라 여름의 열기가 많이 식어있었고,

전혀 꿉꿉하지 않고 어딘지 상쾌하고 신선한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맑은 공기에도 불구하고 머리는 아팠다.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니

요가 바지를 세탁할 때 전에 샴푸가 쏟아져 있던 다른 세탁물과 함께 빨아서

지끈거릴만큼 향기가 고약하게 나는 것이었다.


코는 금방 피로해져서 향이 나는 듯 마는 듯 났으나,

머리는 냄새가 있다는 것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 아파왔다.


이 옷을 입고 도저히 요가를 갈 힘이 나지 않았다.

머리가 아프니 요가매트도 천근만근 무겁게만 느껴졌다.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 

옥수수를 산다는 걸 목표로 삼고 

옷을 갈아입고 길을 나섰다.


걷다보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아서,

생각이 정리될 것 같아서

요가를 갈까, 걸을까 고민하는 작은 것조차 오래 붙들고 있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를 자꾸 옥죄는 버릇을 버리고

하고 싶은대로 걷기로 한 것이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해가 늦게 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가디건의 성긴 옷 구멍 사이로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고,

나를 향해 부는 바람인데도 앞으로 나갈 힘을 주었다.


중간이 못 되게 왔을 때

발이 아파왔고,

그냥 몸을 돌려 차를 타고 가서 사올까 했는데

너무 운동 부족인 것 같아 그냥 걸어갔다.


옥수수를 사고 나오니 점점 어둑해지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엔

평소보다 시원해진 덕분인지,

물이 공기중에 응결되어 안개를 만들고 있었다.

아주 엷게 흰 안개가 덮여진 길 건너 가로수를 보는 일은 제법 재밌었다.

흥미로웠다. 어둑하게 거무스름해진 나무의 머리끝 부분과

가로등 불 빛이 닿아 초록으로 빛이나는 나무 아랫 부분을

안개가 묶어주는 듯 했다.


그 빛의 경계와 강도가 안개 덕분에 약해졌고,

부드러워졌고,

더 어두워졌다.


나무의 어두운 곳을 보고 나도 모를 희열을 느끼는 것이

이상했지만, 즐거웠다.

금요일 퇴근길이라, 학생이고 어른이고 모두 바빴다.

지친 몸을 어디론가 끌고가 쉬어야 되겠단 일념 뿐인 발걸음이 빨랐다.

나는 달랐다.

나만 다르다고 느낄 때 느껴지는 이상한 쾌감이 있었다.


나만 이 풍경을 온전히 느끼고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아무것도 아닌 풍경이 완전히 새롭고 대단한 작품처럼 보인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알고 있다는 게 비밀을 혼자 들은 아이처럼 은밀하고 즐거웠다.


전에 한 드라마에서 안개는 예보가 어려운 기상변화라고 했던게 스쳐지나갔다.

안개가 나오는 시점이나, 장소, 끝나는 시점을 예측하기가 까다롭고 안개가 얼마나 짙을 지도 예상이

어렵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지금 내가 보는 이 안개 낀 풍경이 얼마나 귀하고 드문 아름다운 장면이란 말인가


왜 그걸 모르지.

나만 느끼는 걸까?

모든 빛이 희뿌옇게 안개 속에 번지는,

그래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차분해지는 고요한 적막이 떠오르는 어두워진 이 풍경을

즐기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것,

그런 여유를 갖고 있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사실이 좋았다.


그리고 이상하게 마음이 또렷해졌다.

용기가 생기고

걱정하고 고민하던 것들이 깨끗이 정리됐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남들이 말하는 내가 어떤 것일지에 자꾸 휘둘리지 말고,

쉬기로 했으니 온전히 쉰다.

쉬기로 한 기간이니 미래걱정, 일걱정 그만하고 그냥 쉬자.


그리고 애는 낳자.

제왕절개로 낳자. 자연분만은 나를 돌아봤을 때 불가능한 범주인데

자꾸 고집할 필요 없다. 

왜 안 될 것을 붙잡고 고민하고 있었던 거야.

그냥 제왕절개하는 게 나에게 맞는 건데..



하고 싶은 게 뭔지 그딴 것 그냥 생각 말고 아무생각 없이 편하게 쉬면서

애기를 가지고 낳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어차피 지금 뭘 시작해도 애기라는 키워드는 내 맘속에 계속 자리잡아있을 것을

뻔히 안다.

일이든, 회사든, 새로운 무엇이든

지금 내게 자꾸 말을 거는 것은 아기이다.


그니까 그냥 맘 놓고 행복하게 쉬다가

애기 낳고 키우자.


그러면서 그 때 길을 찾든지 하자.

어려워 말자


뿌연 안개가 준 이상한 용기는 나도 이유를 알 수 없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내 자신에게

자신감이 생겨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남들이 정해놓은 그 나이면 계속 일 해야돼

나는 뭘 해야만 해 이루어야만 해 쉬면 안돼 라는 것에 나도 갇혀서 그러기 싫은데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앞, 뒤, 옆 아무것도 못 보고 발만 보고 걷다가,

안개깔린 멋진 풍경 속에서 그렇게 걷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내가 그러고 있었구나

싶기도 해서

이제야 정신이 들었다.


나는 그런 멋진 풍경, 그런 시간 속에 있다.

근데 왜 어지러워하며 고민하다 시간을 축내고 단 한 번 뿐일 이 멋진 안개를 놓치는가?


꼭 무얼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어서 퇴사를 결정한 것인데,


왜 나는 또 나 스스로 강박 속에 넣어서 

이 소중한 시간을 또 고민으로 허비하고 있는가?


그리고 결심했다.

나에게 감동을 준 안개를 보며,

나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 것들로부터 실망하지말자고.

이제 부터 나의 인생 결심중 하나이다.


나에게 감동을 준 것으로부터만 기쁨도, 실망도 느끼자.

그 외의 것에 실망하고 괴로워말자.

무의미한 것들로부터 상처 받지 말자.


언제나 느낀다.

걷는 것만큼 내 생각을 정리해주는 좋은 방법은 없다.

걷고 나면 해결되어있다.


그리고 오늘 처음 안개와 사랑에 빠졌다.

위험하고 어둡고 음습한 그 분위기가 주는 은밀한 풍광은

언제나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감동적인 순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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