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생각을 하려고 먹는다
옥수수를 사랑하지만, 옥수수가 건강에 나쁘다는 사실 때문에 더 애틋해져 버린 나는 뻥튀기 차량을 만난 차에 충동적으로 강냉이 튀밥을 샀다. 강냉이 튀밥은 어릴 때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간식이다. 어린 나는 쌀 튀밥을 더 좋아했지만 할머니가 한 손에 두어 개씩 집어 드시던 강냉이 튀밥이 훨씬 친근하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기호나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 나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 나는 혈당 수치를 걱정하느라 쌀 튀밥을 멀리하는 어른이 되었지만 그래도 탄수화물의 유혹에 지는 날은 꼭꼭 싸매 놓은 강냉이 튀밥의 봉지를 열곤 한다. 거대하게 부풀려진 옥수수 한 알을 입에 넣고 씹으면 나는 멍해진다. 먹으면서 하는 생각이라고는 '옥수수 한 알이 이렇게 커질 수 있다니' 같은 시시한 생각뿐이다. 우리가 식간에 주전부리를 찾는 이유는 잠시라도 시시한 생각을 하기 위해서 인지도 모른다. 시시한 것을 시시한 기분으로 시시하게 먹으면서 한껏 시시해지기. 아무리 맛 좋은 것이라도 간식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을 즐기는 시시한 시간은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시시함조차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만큼 주어지지는 않는다.
3천 원 짜리 강냉이 튀밥 한 봉지를 비우고 나서 길을 나설 때마다 주변에 뻥튀기 차량이 있는지를 살폈다. 대단한 노력을 하지는 않았지만 운명적이고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던 나는 매번 과하게 실망하곤 했다. 실망이 쌓이다 보니 강냉이 튀밥이 없으면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도가 없는 것처럼 나는 그것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어느 과자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고집으로 다른 간식은 쳐다보지도 않고 오직 강냉이 튀밥을 씹는 상상을 하며 시시한 시간을 흉내 내어 보기도 했다.
바삭, 하고 입안에서 알갱이가 부스러지면 일부는 혀끝에 녹고 옥수수의 껍데기는 여러 차례 씹히며 은은한 단맛을 낸다. 어릴 때는 거친 껍데기가 싫었다. 다소 인위적으로 느껴지는 단맛도 꺼려졌다. 그보다는 무난한 쌀 튀밥에 손이 갔다. 지금은 강냉이 튀밥의 묘미를 안다. 기름으로 튀긴 팝콘을 씹는 것보다 한층 가볍고 개운하며 알갱이의 덩어리가 커서 허무하지 않다. 팝콘은 한 줌씩 입안에 욱여넣어야 직성이 풀리지만 강냉이 튀밥은 한 알씩 집어 먹어도 만족스럽다. 귓속이 다 시끄럽도록 와그작 와그작 강냉이를 씹으면 불안한 생각들이 모두 숨을 죽인다. 그 어떤 생각도 그 소리보다 시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강냉이 타령을 했는지, 다정한 동거인이 당근 마켓 어플에 뻥튀기 아저씨의 동선을 묻기도 했다. '야, 월요일이래!'라는 주어 없는 말을 듣고서 나는 은근히 설레기 시작했다. '월요일이면... 월요일이면! 강냉이 튀밥을! 먹을 수 있어!'
월요일 저녁, 나는 일을 마치자마자 튀밥 트럭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해가 저물고 있어 주변이 어두웠다. 튀밥을 가득 실어왔을 트럭 앞 진열대가 조금 휑한 느낌이었다. 내 조바심은 곧 현실이 됐다.
'어째, 강냉이는 다 떨어졌는데.'
아저씨의 한 마디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지만 그간의 애탄 기다림을 이대로 헛되이 만들 수는 없었다. 꿋꿋하게 밀보리 튀밥과 미니 센베를 골라 양팔에 안았다. 강냉이가 이렇게 인기가 많을 줄은 몰랐다. 무엇을 좋아하게 되기 전에는 미처 떠올리지 못한다. 그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느덧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월요일이 왔다. 그날따라 할 일이 많았다. 동거인과 나는 각자 책상 앞에 앉아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대화도 없이 모니터를 들여다보느라 바빴다. 그러던 어느 순간 동거인이 "나갔다 올게!" 힘찬 한 마디를 남기고 집을 나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왔다.
설마... hoxy...?
앉은자리를 떨치고 나가 보니 품 안 가득 강냉이 튀밥 두 봉을 안은 동거인이 상기된 얼굴로 운동화를 벗고 있었다. 맞아, 오늘은 월요일이야. 뻥튀기 트럭이 오는 날이지! 우리 같은 집순이들은 웬만해서는 먹이 때문에 일하다 말고 집을 뛰쳐나가지 않는다. 그런 정성은 아무 때나 발동하는 것이 아니다. 저번처럼 재고가 떨어져 못 살까 봐 헐레벌떡 다녀온 모양이었다. 그래, 너도 강냉이 튀밥의 참맛을 깨닫고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구나. 이건 정말 사랑이라고 밖에 설명이 안 돼.
각자의 뻥튀기를 침범하지 않기로 결의한 참에, 동거인이 내 봉지에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야말로 웃음이 뻥 터지는 씩씩하고 다정한 얼굴이다. 봉지를 바로 뜯지 않고 구수하게 풍기는 강냉이 냄새를 들이마셨다. 혀끝에 은은한 단맛이 퍼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