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부분 건물은 법과 부동산이 디자인방향을 정한다.
언제부턴가 한국의 도시 풍경은 하나의 패턴으로 귀결되었다. 구도심의 오래된 골목길이든, 신도시의 잘게 나뉜 블록이든, 전국 어디를 가도 만나는 상가건물의 풍경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택지개발지구에서 분할된 정형의 대지 위에 건축주는 법이 허용한 최대 면적을 한 치의 틈 없이 채운다. 코너 필지라면 그 가각마저도 건물의 곡면으로 포장되고, 도로에 면한 모든 입면은 크고 평평한 수평창—속칭 '빵빵이창'—으로 덮인다. 특히 수평창은 르꼬르뷔지에의 건축 5원칙중 수평창이론에 가장 부합하는 실천일 수도 있다. 과장하면 사보이주택의 수평창을 확대 재생산한 한국의 선택? 물론 다른 요소들은 필요 없다. 선택과 집중의 전략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위하기 보다는 실제는 끔찍하다. 한치의 여지도 없이 주어진 땅의 모양 그대로 집어 올린 모양이라니....대지의 모든 밀도를 건물로 치환한 이 형식은 건축이라기 보다는 건물덩어리다.
이런 건물을 디자인 하는 것은 더 이상 설계라기보다는 면적 계산이며, 더 이상 건축이라기보다는 자산화 전략이다. 오해하지 마시길... 비난이 아닌 현실 진단이다. 그리고 모든것을 건축이라 우기는 건 좀 그렇다. 솔직해지자. 적어도 건물과 건축은 구분하며 살자.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이 전부 요리는 아니지 않는가? 그러니 건물을 건축이라 우기지는 말자. 건물이면 어떻고 건축이면 어떤가? 목표가 돈이면 건물을 짓는 것이고, 목표가 좀 더 우아하게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뭔가 지적으로 있어보이려면 건축을 짓는 것이다. 전자는 돈 벌자는 것이고 후자는 돈 쓰자는 것이니 너무 상처받지 말기를... 아무튼 건물로 채워진 우리나라 도시들. 아쉬움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나 양해해주길...
자... 이야기 다시 본론..
우리가 사는 도시는 이제 건축이 사라진 시대, 건축 없는 건축의 풍경을 품고 있다.
이 건축은 법을 철저히 따르되, 법을 삶의 질서가 아니라 수익의 도구로 활용한다. 건축주에게 법은 경계선이며, 동시에 게임의 룰이다. 이 룰 안에서 최대한의 연면적, 최대한의 임대 공간, 최대한의 분할 가능한 점포 수를 확보하는 것이 성공의 정의다. 그 어떤 미적 기준이나 맥락적 고려도 이 계산 앞에서는 후순위로 밀려난다. 남향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간판이 얼마나 잘 보이느냐이며, 코너에 위치한 파사드는 도시와의 관계보다는 병원, 약국, 학원의 광고판이 차지한다. 이는 건축이 경제논리에 포섭된 결과이며, 한국 도시 전역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구조적 습관이다.
왜 이런 건축이 전국 어디서나 똑같이 나타나는가? 답은 명확하다. 이는 택지개발의 결과이자, 법과 시장이 건축을 기획하는 방식의 반영이다. 한국의 신도시는 대부분 공공기관에 의해 설계되고 분양되며, 그 대지는 정형의 직사각형이다. 이 정형의 대지는 개발자에게 ‘최적화된 수치’를 제공한다. 설계는 창의적 해석이 아니라, 주어진 틀 안에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는 엔지니어링이다. 각 층은 동일한 평면으로 복제되고, 입면은 균질한 유리로 도배되며, 동선은 최대 임대면적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설계된다. 법은 이 게임의 최소한의 룰일 뿐, 그 너머의 해석이나 공간적 상상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풍경은 한국 도시의 ‘가치관’을 보여준다. 건축은 인간과 장소를 잇는 매개라기보다는, 땅값을 수익으로 전환하는 수단이며, 그 수단은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한 한 저렴하게,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작동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건축가(사)는 배제되거나, 최소한의 법적 문서 작업자로 전락한다. 설계는 창조가 아니라 순응이고, 건물은 장소가 아니라 상품이다. 1층은 프랜차이즈 커피숍, 2층은 병원, 3층은 학원, 4층은 공실—이 전형적인 패턴은 도시의 성격을 상실시킨다. 어떤 지역에서도 이 상가건물은 동일한 표정을 지으며, 도시는 정체성 없는 복사본이 된다. 건축가(사)를 위한 변명을 하자면 이런 사회에 대항하고 저항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그들의 수요에 비해서 건축가들은 차고 넘친다. 아무나 집짓는 것이 아닌데 왜 이리 건축가들을 많이 양산하는지 모르겠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신선놀음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그들의 경제적 요구에 철저하게 맞출 수 밖에 없다.
솔직히 말하면 그들의 자산이기 때문에 이를 낭비하는 것도 미안한 일이고, 그들의 자산을 좀 더 계획적으로 알뜰하게, 더 나아가서 자산증식을 위해 도와줘야 하는 것이 이땅의 전문가들이 지켜야할 윤리이며 책무이다. 우리사회는 이를 강요하고 있고, 건축가들 역시 사회의 일원이니 마땅히 이런 강요는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다. 어쩔 것이냐! 이런 환경을 만든 것도 당신들이니...
아무튼 다시 본론
건축이 도시의 얼굴이라면, 우리는 지금 무표정한 도시를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간판으로 가득 찬 입면은 말 많지만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아무런 기억도 남기지 못하고, 머무는 사람에게도 공간적 위로를 제공하지 않는다. 오직 ‘수익률’이라는 숫자가 공간을 점유하고, 인간은 그 안에서 부유한다. 창문은 보지 않기 위해 존재하고, 벽면은 광고를 붙이기 위해 존재하며, 건물은 서 있지만 어떤 관계도 맺지 않는다.
이런 건축은 '결핍'이 아닌 '과잉'의 문제다. 너무 많은 면적, 너무 많은 정보, 너무 많은 욕망이 응축된 결과다. 그러나 그 과잉 속에서 정작 사라진 것은 공간의 본질이다. 빛과 그림자, 흐름과 리듬, 연결과 단절, 비움과 채움—건축이 본래 다뤘던 언어들이 이 건물들 속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건물들은 오직 평면도와 임대수익 분석표 속에만 존재한다. 사람의 몸이 느끼는 감각, 주변 풍경과의 대화, 하루의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그림자—이 모든 건축적 서사는 지워지고, 대신 ‘층당 임대가’라는 수치만이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의 한국 도시들을 채우는 다양한 건축/건물들은 자유롭지는 않다. 굳이 건축의 안간힘을 보자면 법과 부동산이 허용하는 모든 조건을 채우고 표피적인 장식과 재료의 현상으로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큰 건물이던 작은 건물이던 공히 나타나는 안간힘이다. 대표적으로 길거리의 작은 건물들이 4층부터 일정 사선으로 사다리꼴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여실히 알 수 있다. 수평띠로 모서리가 잘라진 덩어리 건물이 택지개발의 유형이라면 동네 주택가에 네모난 상자위에 3,4층 이상부터 사다리꼴 모양으로 올라가는 건물은 기존도시의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공통점은 모두가 수익성 극대화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물론, 상업성과 효율성은 도시에서 무시할 수 없는 가치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전부가 되어버렸을 때 나타난다. 법은 최소한의 기준이어야지, 유일한 기준이어서는 안 된다. 건축은 법의 범위 안에서 가능성을 탐구하는 예술이지, 법의 테두리만을 채우는 기술이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이 상가건축은 ‘가능한 한 많은 공간을 짜내는’ 데만 몰두한 결과이며, 그것은 결국 도시 전체의 피로감을 증식시킨다. 도시는 점점 더 무표정해지고, 거리의 경험은 피로하고, 장소의 고유함은 사라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건축을 꿈꿔야 할까. 그것은 법과 시장의 논리를 따르되, 그 너머를 사유하는 건축이다. 면적을 포기하더라도 여백을 확보하고, 빛이 들어오는 창을 만들고, 길과 대화하는 입면을 계획해야 한다. 건축이 ‘삶의 배경’이 아닌 ‘삶의 형식’이 되려면, 계산보다 상상, 수익보다 감각이 우선되어야 한다. 우리는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장소를 만들고, 공간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품어야 한다.
그런데 정말 웃기는 것은 이런 지독한 현실이 오히려 가치를 인정 받게 한다. 세계도시중에 홍콩 만큼 황당한 도시가 없다. 인간, 환경, 이런 것은 개나줘버리고 철저하게 돈버는 숫자로 집행되고 가능한 도시가 홍콩이었다. 그 결과 인도는 두사람이 간신히 걸어가는 통로면 되었고, 창문은 최소한의 환기와 채광이 되면 충분했다. 한평의 땅은 경제적 기술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올리는 도시가 된 것이다. 말 그대로 닭장을 칸칸이 쌓아올린 도시가 되었고, 뉴욕의 마천루와 달리 홍콩은 덩어리채 올라갔다. 더 황당한 것은 이런 젓가락통같은 도시를 만든 주범은 바로 홍콩행정당국이었다. 홍콩전체를 소유하고 돈이 필요하면 잘라서 팔아먹다 보니, 이들에게 이익을 남겨주기 위해 허용가능한 모든 것을 인정했고 그 결과 초 고밀도! 슈퍼 울트라! 밀집도 도시가 탄생한 것이다.
정말 아이러니는 이런 환경에서 사람들은 숨쉴틈을 원했고, 기업가들은 이를 눈치채고, 비싼 땅을 비워서 공간을 만들어주기 시작했다. 재미난 것은 숨막히는 도시에서 이런 열린 공간은 엄청난 사람들을 모이게 해서 숫자의 틈에 여지가 없는 개발보다 실 매출이 더 발생하게 된 것이다. 결국 돈이 돈의 힘으로 공간을 열게 해준 것이고 이것이 결국 낭비같아 보이는 가치의 "현실적 가치"를 입증해주었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우리는 도시와 건축의 희망을 보게 된다.
건축의 진짜 가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물리적 면적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존재하는가에서 비롯된다. 한 평 더 넓은 공간보다, 한 사람이 더 오래 머물고 싶은 공간이 진정한 가치다. 우리는 이제 그 점을 되묻고, 건축의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왜 이 건축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지 않는 건축은, 결국 아무 의미 없는 덩어리에 불과하다.
도시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선, 모든 틈을 채운 건축이 아니라, 일부러 남긴 여백 속에 사람의 자리를 마련한 건축. 건물의 외피보다 그 안에서 흐르는 관계와 경험을 우선한 건축. 법을 위반하지 않되, 법의 본래 취지를 넘어서는 창의적 해석을 시도한 건축. 그리고 무엇보다, 삶을 계산하지 않고, 감각하려는 건축. 그때서야 도시는 단순한 부동산의 집합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