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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길 May 25. 2024

1.3 한국건축은 죽었다.

죽어가는 한국 건축, 건설과 토목이 아니다.

한국 건축은 왜 이렇게 패배감이 많이 들까?

분명히 과거보다 좋은 또는 멋진 건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고, 확실히 건물 수준이 아닌 건축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패배감이 만연하다. 간간이 여러 도전자들 또는 영향력 있는 이들에 의해서 나름대로 발버둥 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이런저런 실험과 시도들이 있었다.


2024년 확실히 2000년대 보다, 1990년대 보다, 1980년대 보다 그리고 그 이전보다 건축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되고 있긴 하다. 엘리트 중심의 건축에서 다소 보편화된 건축으로 이동하면서 대중에게 건축이 일상의 문화로 전달되는 초보단계인 듯 도 하다.


하지만 현역에 종사하는 이들을 보면 상당수가 패배감과 피해의식이 만연하다. 특히 십 년 이상 그 이상 하는 분들은 그렇다. 다 그렇지는 않다. 보면 경제적 상황에 처한 입장에 따라 다른 것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해 있던 치열하게 살던, 패배감에 살던 건축하는 이들의 이구동성은 "힘들다!"라는 점이다. 열혈 유튜브 건축사는 연일 통계와 자료를 가지고 건축사들의 열악한 환경을 중계하고 있다. 그의 노력이 놀랍고 사실 박수를 보내고 싶다.


뜨겁게 도전하고 열정으로 다가서는 건축사들이 십 년만 지나면 성향이 바뀌고, 태도가 바뀌고, 자세가 바뀐다. 누가 이들의 열정을 꺾고, 부정적 성향으로 만들고, 패배감에 상처 입게 만들까? 사람일까? 제도 일까? 아니면 개인의 문제일까? 개인의 문제라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 이들이 유사 경험과 감정을 토로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개인의 문제는 아니다. 제도와 환경이 문제가 맞다.


사실 건축은 건설이 아니고 토목도 아니다. 건축은 건축이며, 그 중심에는 설계라는 과정이 있다. 설계는 단순히 선으로 지어질 건물을 그리는 것이 아닌, 행위와 삶 그리고 미래에 대한 심각한 고민 끝에 표현되는 과정이다.


수많은 생각과 제도에 대한 이해, 기술에 대한 점검 등 고려하고 반영해야 할 내용이 엄청나다. 건물의 규모가 커질수록 각종 제도와 규제가 강할수록 설계는 복잡해지고 여러 사람의 전문가가 동원되어야 할 일이 된다. 그러나 대한민국 현실은 이들을 동원하기 힘들다. 비용을 대기 어렵다. 그 비용은 설계대가인데 사회적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열정과 패기로 뛰어든 건축사들은 소위 말해 "열정페이"에 당하면서 매력적인 성과물인 건축을 탄생시키지만, 이들의 열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적 좌절과 사회적 착취의 희생양이 되면서 소멸되어 간다. 그리고 다시 이런 과정을 겪지 않은 새로운 세대가 도전하고... 착취되고... 소멸되어 간다. 반딧불 유혹처럼 반짝이는 건축의 매력이 이들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를 간파하듯 일부 건축사들은 재빨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덩치를 키워 사회에 대응하는 조직을 만들려고 한다. 실제 그렇게 성공적으로 덩치를 키워나가고 있다. 그렇게 덩치를 키워도 대한민국의 건축설계산업은 여전히 착취의 대상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생존을 위해서 뱀파이어처럼 피갈이로 살아남고 있다. 아직 시장에 넘치는 아틀리에라 불리는 중소형 건축사사무소에서 훈련된 이들을 데려다 쓰다가 시장이 축소되고 바람이 불면 낙엽처럼 잘라버리거나 떨어뜨려 버린다. 아직은 수혈받을 아틀리에들이 많기 때문이다. 아틀리에 중소형 건축사사무소는 대표건축사의 몸을 불살라 생존하거나 미처 승천하지 못한 어린 미성숙 건축사후보들을 데려다 키우게 된다. 언제 이들이 자라서 징검다리로 건너뛰면서 사다리를 올라타 대형건축사사무소로 갈지 모른다. 그다음 시공하는 건설사, 그다음 시행사, 그리고 금융사까지... 도움닫기의 발판임을 숙명으로 알고 달리 선택하기 어려운 개업 건축사들은 매달리고 있다.


이런 모든 환경은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대한민국 건축설계 전 분야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전략과 개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이 외세에 의해 자력감을 상실한 이후 유일하게 땅 위로 솟아 올라오지 못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씨앗자체가 해방되고 나서야 뿌려졌으니 어쩔 수 없다만, 그 씨앗은 잘 못 뿌려서 화강석 물갈기 위에서 스며들지 못하는 뿌리로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일을 하면 할수록 대한민국에서 건축 설계로 자생하고 성장하기는 매우 어렵다. 생존율이 아마도 0.1%도 안될 듯하다. 그나마도 온갖 연줄과 가면을 쓰고 뛰어다녀야 그 안에서 조직을 키우고 성장시킬 수 있다. 30년 동안 설계비가 멈춰있는 업종. 그 안에 종사하는 이들 역시 무기력하긴 매일반이다. 한두 사람의 움직임으로 변화는 불가능하다. 전체가 움직여야 하는데... 생각이 너무 다르고 이해가 너무 다르고 입장이 너무 다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시장의 문지방을 넘는 이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무대책으로 국가가 양산하는 것이다.


이렇게 최악을 향해가는 건축설계산업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근원적인 불치병원인을 찾아봐야 한다.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것일까? 그 과거를 향해가면 끝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결정적 시점들은 있다.


1. 설계와 감리의 분리 서막을 알린 책임감리제도 제조 = 대한민국 건축에서 가장 잘못된, 왜곡된 행위가 감리에 대한 정의다. 대다수 국가가 공공의 시각에서 건축 행위를 감독한다. 안전과 다양한 성능에 대한 제도로 운영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런 공공이 운영해야 할 감독의 역할을 민간에게 떠 넘기는 대신 막강한 이들 민간을 통제하는 힘을 강화했다. 처벌의 규정 강화가 그것이다.

책임감리는 공공 건축을 진행하면서 발생하는 건설 관련 각종 사고에 대한 감독기능을 감리역할에 부여하는 것으로 만들어졌다. 원친적으로 공사 시에 설계와 시공의 일치성을 확인하는 보완과정이 되어야 하는 감리의 기능에 공공의 역할인 감독을 강화한 것이다.

설계와 시공을 유도할 감리에게 감독을 기능을 부여하면서 건축 설계자와 감리자를 분리시켰다. 그러면서 감리의 기능을 다양하게 구성하고 유형화하고 분류했다. "~감리"라는 다양한 번식가능한 단어를 만들면서 설계와 다른 행위로 구분하기를 30년이 되어 간다. 이제는 누구도 설계의 보완 관계라고 감리를 이해하지 않는다.


2. 감리 만능 처방전과 감리 완전 책임 부과 = 책임감리를 대표로 설계와 감리 행위를 분리시켰고, 점차 분리의 대상을 확장시켰다. 공공건축에서 감리를 설계와 떼어 놓더니, 중소규모 주거 건축에서 설계와 감리를 떼어 놓았다. 그렇게 수십 년 정부는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설계와 감리의 완전 분리를 법제화하려 하고 있다. 감리라는 단어는 건축에 대한 전공정 감리라는 의미로 확장시켜 버리면서 감리 만능 책임제도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모든 건설현장의 사건과 사고는 감리가 잘못 처방했기 때문이고, 감리만 때려잡으면 된다는 아주 단순하고 일차원적 사고로 제도를 몰아가고 있다. 감독기능을 공공이 분리시키면 간단한 일을 이렇게 혼란스럽고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3. 감리에 집착하는 배경은 결국 이해관계 = 설계와 감리를 이렇게 강력하게 분리하고 결별시키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간단하다. 건설사의 시공과정을 더 단순하게 만들고 책임을 분산시키기 위함이다. 이웃 일본을 비롯한 유럽이나 미국은 건설사의 시공과정에 발생하는 책임의 상당수는 시공하는 건설사가 부담하고 있다. 사회가 발달하고 커질수록 이런 책임양은 늘어난다. 이런 책임량의 분산을 위해서 대신 희생양이 필요한 것이며 그것이 바로 감리다. 문제는 감리가 쉽게 이런 책임의 부담을 온전히 가져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연스럽게 이익을 조금 나눠주면서 책임을 분담시키는 것이다. 사건사고가 나지 않으면 감리로서는 손해 볼 것 없는 장사다. 이런 이유로 감리전문이라는 업종과 분야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감리자의 자격을 퇴임한 공무원이나 공사직원들에게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직업창출을 일으키기도 했다.


4. 감리자격에 대한 확대 = 감리의 시장을 확대한 만큼 수혜자를 늘려야 한다. 그 결과  감리의 종류를 엄청나게 늘리면서 특정 전문자격의 독점시장을 해체를 유도하기 사작했다. 다수의 비 건축사들이 이런 시장 확대를 반기게 되었다. 전기, 소방, 설비 등등의 자격뿐만 아니라 시공 기술사까지도 "~감리"의 역할을 떼어달라 주장하고 설득하고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들의 주장에 설득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대중이 이러니 정치권과 공무원은 당연히 동의하는 입장이다.


5. 문제는 적어도 "건축공사감리"는 절대 "건축 설계"와 대척점에 있거나 감시의 역할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치 설계를 감독하고 견제해야 할 역할로 감리를 정의하고 있다. 건축공사감리 역시 마찬가지다. 억지로 이간질시키는 제도아래 설계와 건축공사감리는 갈등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결과 설계와 감리는 상보적 관계가 아니라 대립적 관계로 전환되었다. 설계와 건축공사 감리는 반드시 한쌍의 커플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설계와 건축공사감리 분리로 인해 둘 다 공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시공과정의 협의와 협상을 통해 경험적 지식이 누적되면서 설계내용이 충실해지고 현실적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설계경험이 있어야 시공현장의 작업자들을 리드하거나 유도할 수 있다. 각각의 경험은 공존되고 공유되어야 하는 것이다.


6. 분리된 설계업역에 종사하는 건축사들은 이런 경험과 훈련의 기회를 상실해 버린다. 경험과 기회를 체득하지 못한 건축 설계는 부실해질 수밖에 없고, 독창성이 나타날 수도 없고, 창의력이 상실될 수밖에 없다.

배우지 못하고 자라지 못하는 건축설계 종사자들은 절대 독보적일 수 없다. 건축사보를 소비하고 유통시키는 대형 건축사사무소 역시 이런 소용돌이에 헤어 나오긴 어렵다. 몇몇 독창적 작은 작품을 발표하는 건축사는 분명히 늘어나겠지만 보편적으로 이들의 성과가 대중의 시야에 등장하기 어렵다. 성장이 불가능한 건축설계토양의 나라로 급속한 속도로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7. 이런 상황에서 공공건축은 빛 좋은 개살구며, 생산유통과정의 참견할 수 있는 권력자들만 늘어나게 된다. 심사위원의 권력은 막강해지고 있는데 문제는 이들 심사위원 또는 심의 자문위원들의 상당수가 시장과 실무를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대중매체에 건축이 등장한다 해도, 단상에 오르는 것은 각종 인센티브를 받은 저명한 해외 건축가들이다.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뛰어난 창의력을 가진 건축사들의 작품은 상품으로 취급되어 노출이 불가한 상황이다. 수십 년째 건물을 시공한 건설사대표는 건물의 개막식에 참석하지만, 건축을 고민하고 상상하고 실현토록 주도한 건축사는 누구도 찾지 않고 불러주지 않는다. 1980년대에도 그랬고, 1990년대에도 그랬다. 그리고 2024년 여전히 지금도 건물을 지은 건설사 관계자를 호명하지만 그 건축을 고민하고 창조한 건축사는 부르지 않는다. 2024년 대한민국에서 건축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8. 아이러니한 바보의 목소리 = 정말 알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시치미 떼고 그러는지 알 수 없지만, 정치권이나 행정부나 언론 모두 대한민국 건축도 세계적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무슨 무슨 지원이라 해서 후원자와 지지자의 이름에 올리려 애를 쓰고 있다. 현업의 건축사들은 이런 사회의 확성기에 위선감을 느낀다. 생존의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명예도 인정해주지 않으면서...

  "도대체 뭐 하자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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