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과거, 사라진 현실 들, 그 시절의 고뇌
건축계의 대표적 인물 김중업, 김수근의 경우만 해도 상당수 건축이 존재하지 않는다. 60년대 건축된 제주대학 본관의 경우는 프랑스에서도 주목했던 유기적 형태의 거친 부르탈리즘 성향을 보여주는 획기적 건축이었다. 구조적 안정성을 운운하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김중업이나 김수근은 유명세 덕분에 회자되지만 매스컴에 등장하지 않았던 건축사들은 이제 누구도 아는 이가 없다.
이하 모둠 원고 사진의 출처: :
https://kiramonthly.com/page/Back-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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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매력적인 제주대학 본관은 1950-60년대 전 세계 낙관주의적 미래로 희망이 가득한 시절의 표현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전후복구와 우주개발로 시작된 시절 에어로디자인과 기계적 기하학은 엄청난 속도로 확장되고 퍼져나갔다. 아이러니한 점은 두 흐름의 미적 형태주의는 곡선과 직선으로 충돌함에도 콘크리트라는 조소적 소재로 인해 공존이 가능했다. 더구나 이 시기 유행은 덩어리 진 거친 볼륨감의 부루탈리즘이 미학적 조형성을 장악해 버렸다.
제주대학은 당시나 지금까지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 유선형 디자인으로 표현된 아주 극히 드문 건축이었다. 이런 건축적 가치를 일거에 철거해 버린 바바리안 같은 행정가들의
판단력이 놀랍기만 하다.
(* 김중업의 유선형 후학 중 차운기라는 불운의 건축가가 있었는데 너무 빨리 돌아가셨다.)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세계건축계를 휩쓴 건축사조중 포스트모더니즘과 디컨스트럭션의 개념이 수입되어 한국 건축학도를 비롯한 현업계는 트렌드를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우연히 찾은 60년대 말 김순련의 주택에서 보이는 구성주의적 구성은 디컨스트럭션의 원초적 원형을 보는 듯한 조형미를 보여주었다.
이 시기 발표된 노영진 건축사의 주택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의 구조는 프랭크 개리의 은유화된 과장된 기둥과 다름없는 트리형태를 보여준다. 기능과 경제적 절제미가 강조되던 시절, 이런 표현은 당시 세간의 평가로부터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낯설고 거침 구조적 표현으로 치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오늘의 시각은 다르다. 이 주택이 지금까지 나아있다면 방문해서 보고 싶지만 어디에도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그런가 하면 매스의 기하학적 구성으로 과감한 디자인의 흐름도 있다. 기하의 원형인 삼각지붕을 극대화한 형태로 디자인한 권오현의 주택. 형태의 과감성과 평면을 보면 이런 주택이 지금까지 남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호진의 단순한 부르탈 적 형태도 있다. 박스의 단순함을 극대화한 조형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동안 분절과 다양한 조형의 언어를 편집한 형태가 다수였다 최근 2010년대 중반 이후 젊은 건축사들 작품에서 미니멀한 부르탈리즘 언어가 리바이벌되고 있다. 이런 류의 건축이 많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전무하진 않았다. 이호진의 거친 사각 박스들의 조합으로 구성된 주택은 흥미롭다.
다소 익숙해 보이는 벽돌집은 70년 즈음의 주택설계로 낯선 실내공간을 보여주고 있다. 외장재인 벽돌은 실내에 적용하다니. 좌식과 온돌문화인 우리나라에서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디자인이다. 80년대는 이런 이유로 벽돌마감 위에 한지를 붙이거나 했었다.
유규성의 주택은 더 기하학적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ㅈ붕의 수평을 분절하는 수직요소는 조형적이면서 섬세한 콘크리트 루버를 구성했다. 획일적 균등성이 아닌 리드리컬한 배열은 이 주택이 쉽게 디자인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사실 이주택 사진을 보고서 감탄이 나왔다. 프레임을 구성해서 담과 주택의 면을 입체적으로 구성했다. 이를 맞추기 위해 튀어나온 처마는 수평루버로 구성해서 빛을 조절토록 했다. 비례 역시 탁월해서 기하학적 매력이 충분하다. 대문을 건축의 일부로 구성한 디자인엔 시선이 머물 수밖에 없다.
만약 이 주택이 50년 세월을 넘기며 존재하고 있다면 가히 기념비적일 듯하다. 이 시대 건축사들의 생존한 작품을 찾아 보존운동이라도 하면 좋겠다. 남산 힐튼보존 보다 이런 작품 찾기 토론을 어느 건축사나 조직도 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