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사유재산일까, 공공의 자산일까
건축은 동네의 ‘공기’가 된다 – 나의 삶과 연결된 환경
사람들은 건축을 ‘남의 집’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짓든, 어떤 모양이든, 그것은 그 집 주인의 선택이고 책임이며,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긴다.
“자기 땅에 지은 건데 왜 신경 써야 하지?”
이런 반응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익숙하다.
사실 건축은 분명한 사유재산이다.
법적으로도 그것은 한 개인의 소유이며, 건축주의 투자와 선택, 그리고 책임 아래 지어진 결과물이다.
건축은 도시의 얼굴이다
건축은 단지 기능을 위한 구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도시라는 무대에서 끊임없이 형성과 변형을 반복하며, 집단적 기억과 감정을 담아내는 일종의 ‘언어’다. 도시의 정체성은 수많은 개별 건축물의 축적과 그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파리의 전경을 떠올리면 에펠탑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의 고만고만한 석조 건물들이 반복되는 스카이라인, 광장 주변의 건물들의 리듬, 파사드의 패턴과 색감이 함께 떠오른다. 서울을 상상할 때도 마찬가지다. 경복궁의 지붕선과 주변의 한옥, 고층 건물들이 혼재된 풍경, 산과 도시가 맞닿는 경계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다.
이처럼 건축은 시각적인 층위에서 도시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중요한 점은, 이런 도시의 얼굴이 비단 건축가나 개발자의 손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그 속에서 기억과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도시의 이미지가 형성된다. 북촌의 한옥이 관광 명소가 된 이유는 단순히 전통 가옥이 많아서가 아니다. 그곳을 걷는 시민들의 발자취와 시선, 주민들의 일상, 방문객의 감탄과 기록이 모여 하나의 장소성과 풍경을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건축은 개인이 소유할 수 있어도, 도시의 얼굴은 결코 사적일 수 없다. 그것은 모두가 보고, 느끼고, 기억하는 ‘공공의 이미지’다. 우리가 특정 건축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권리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그것이 나의 삶의 배경이자 감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사적 행위가 공공의 삶에 미치는 영향
건축은 기본적으로 토지라는 자원 위에 이루어지는 창조 행위다. 하지만 토지는 고정된 물리적 장소인 동시에 사회적 자원이며, 대기, 일조, 조망, 통행과 같은 요소들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사실은, 건축은 그 자체로 ‘환경을 재편하는 권력’이라는 점이다. 어느 곳에 얼마만큼의 규모로, 어떤 방식으로 건축이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인접 지역의 빛과 공기, 사람의 동선, 안전, 심지어 부동산 가격까지 영향을 받는다.
일조권 침해는 대표적인 사례다. 서울처럼 고밀도로 개발된 도시에서는 조금만 높거나 배치가 바뀐 건물이라도 주변의 일조 조건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햇볕은 단지 쾌적함의 문제가 아니라, 건강, 에너지 소비, 정서적 안정과 직결되는 요소다. 더불어 조망권 역시 마찬가지다. 바다나 산, 하천, 도심의 풍경을 조망할 수 있던 권리가 새로운 건축으로 가로막히는 경우, 그것은 누군가의 권리를 사적으로 침해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건축은 '나만의 공간'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공동의 환경'을 함께 조정하는 일이다. 도시계획과 건축심의 제도가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개발과 건축은 사회 전체의 질서를 염두에 두고 진행되어야 하며, 이는 결국 민주주의와도 연결된다.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을 동반하지 않는 건축은 결국 도시 전체의 파편화와 불균형을 야기한다.
건축은 관계의 구조다
공간은 인간의 행동을 규정짓는다. 이는 건축의 사회적 기능을 말할 때 가장 중요한 원리 중 하나다. 공간의 구성과 형태, 배치, 접근 방식, 내부 동선은 사람들이 어떻게 만나고, 서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를 실질적으로 이끈다. 이는 단순히 건축 계획의 기술적 문제를 넘어, 건축이 사회적 구조와 관계를 어떻게 반영하거나 재구성하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공원에 인접한 커뮤니티센터와 주민들의 접근로가 열려 있다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오고 가며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반면 고급 주택단지의 경우, 외부로부터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하는 구조로 설계된다. 이는 특정 커뮤니티의 폐쇄성과 배타성을 건축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이며, 실제로 공간은 사회적 위계를 반영하고 증폭시키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건축은 물리적 장벽만이 아니라 심리적 거리도 만든다. 개방된 마당이 있는 공간에서는 타인의 존재를 쉽게 인지할 수 있으며, 자연스럽게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반대로 높고 불투명한 담장이 둘러진 공간은 타인을 차단하고, 개인을 고립시킨다. 이런 구조적 조건은 사회적 고립, 외로움, 불안감과도 연결된다. 요양시설, 아파트 단지, 학교, 교도소 등은 구조를 통해 사회적 질서를 암묵적으로 교육하고 강화한다.
그러므로 건축은 ‘사회적 윤리’를 담아야 한다. 공간의 배치는 곧 사람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건축은 공공의 삶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야 하며, 이를 위한 감시와 참여는 필수적이다.
기억을 담은 장소로서의 건축
모든 장소에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단지 건축가나 소유자의 것이 아니라, 그 장소를 이용하고, 머물고, 떠나갔던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감정의 궤적이다. 이런 장소들은 우리가 ‘집단 기억’을 구성하는 방식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건축은 그 기억을 담는 물리적 그릇이며, 우리가 스스로를 누구라고 정의할 수 있게 해주는 배경이다.
서울 세운상가는 산업화 시대의 전형적인 산물이었다. 낡고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수차례 철거 위기에 놓였지만, 시민들과 건축가들의 연대는 이곳이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기억의 장소’임을 사회적으로 환기시켰다. 결국 세운상가는 재생의 길을 걷게 되었고, 새로운 기술자들과 창업자들의 거점이 되었다. 이는 건축이 단지 형태나 기능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정서와 가치를 담는 매개체임을 보여준다.
철거된 학교 운동장, 사라진 동네 슈퍼, 없어진 정류장 등은 하나의 건축물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의 리듬과 공동체의 상호작용 방식이 사라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건축의 보존은 곧 ‘기억의 보존’이며, 이는 문화유산의 개념을 넘어 일상적 정체성을 지키는 행위다.
공간 참여의 권리
우리는 종종 환경권을 자연환경의 보호로만 이해하곤 한다. 하지만 헌법 제35조가 명시한 “쾌적한 환경에서의 생활권”은 도시환경, 즉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과 건축환경도 포함한다. 이는 시민이 단순히 수동적인 공간 사용자에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공간 형성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는 뜻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시민이 도시의 구성에 영향을 미치는 제도적 장치를 갖추어야 함을 전제한다. 서울시의 도시건축 공동체 워크숍, 도시재생 시민협의체 같은 실험적 모델은 도시와 건축에 대한 시민의 참여권을 제도화하려는 시도다. 이러한 공론장은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함께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는 자리이며, 건축이 더 이상 엘리트만의 영역이 아님을 보여준다.
건축과 도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관통한다. 그렇기에 그 형성과 변화의 과정에 시민이 개입하고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건축이 공공성을 지닐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며, 민주사회에서의 공간 정의다. 우리가 도시의 공간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말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왜 우리는 타인의 건축에 아름다움을 요구하는가
우리는 살아가며 셀 수 없이 많은 건축을 마주친다. 그중 대부분은 내가 소유하지 않은 타인의 건물이다. 하지만 그 건축이 미학적으로 조화롭지 못하거나, 환경을 해치거나, 삶의 리듬을 깨뜨릴 때 우리는 거부감과 불편을 느낀다. 반대로 어떤 도시의 거리에서는 전혀 내 것이 아닌 건축들을 바라보며 위로받고, 영감을 얻으며, 오래 머물고 싶은 감정을 느낀다. 왜 우리는 타인의 건축에조차 아름다움을 요구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단순한 심미적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의 철학적·윤리적 의미와 관계된다. 어떤 철학자는 인간이 ‘세계 안에 있음(being-in-the-world)’을 강조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단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함께 만든 공동의 세계라고 말한다. 건축은 이 공동 세계의 가장 구체적인 물리적 표현이다. 이 세계가 조화롭고 질서 있게 구성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존엄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반면, 혼란스럽고 위협적인 공간은 인간의 존재 자체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마누엘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미는 “목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승인을 요구하는 감정”이라 했다. 즉, 내가 소유하지 않은 공간, 내가 직접 살지 않는 집이라 해도, 그것이 무질서하거나 배타적이면 우리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이는 우리가 도시라는 공동의 장에서 타자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윤리적 직감이다. 결국 도시의 건축은 개인의 선택이면서 동시에 공공의 미학적, 사회적 책임을 수반하는 행위다.
많은 유럽의 도시들이 ‘아름다움을 요구받는 건축’을 기반으로 성장해왔다. 파리, 바르셀로나, 프라이부르크, 암스테르담 등은 건축을 도시의 공공 자산으로 보며, 개별 건물의 외형, 높이, 재료, 질감을 엄격하게 조율한다. 이 조율은 단지 심미적 통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민 누구나 삶의 질서와 존중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사회적 약속이다.
반면 한국의 도시들은 오랫동안 속도와 효율, 시장 논리 중심의 개발 패턴 속에서 건축을 ‘투자와 수익의 대상’으로 축소시켜 왔다. 이는 도시의 공공성과 미학적 질서를 약화시켰고, 시민의 일상적 삶을 불균형하고 파편적인 공간으로 흩어놓았다. 건축은 남의 것이 되었고, 도시는 ‘내가 만든 곳’이 아니라 ‘누군가가 만든 곳에 내가 얹혀 사는 공간’이 되었다.
이제 한국의 도시도 질문해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가 아니라, “어디에서 살아야 할까?”라고.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건축이 다시 공공성의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 건축은 더 이상 개발자의 권한에만 맡겨질 수 없으며, 시민, 전문가, 공공이 함께 윤리적 감각과 미학적 기준을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법과 제도는 건축의 질을 ‘최소기준’이 아닌 ‘공동체적 가치’로 바라보아야 하며,
디자인 리뷰, 건축가의 공공적 역할, 시민의 공간 참여는 도시계획의 전면으로 나아가야 한다.
기억을 보존하는 건축, 관계를 유도하는 공간, 일상의 존엄을 지지하는 구조는 앞으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도시의 핵심 자산이다.
건축은 나의 것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나의 삶에 영향을 준다면
나는 그것을 아름답기를, 정직하기를, 따뜻하기를 요구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곧 도시를 함께 만들어가는 시민의 권리이자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