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
존재로서의 건축가: 창작 표현을 넘어 정체성으로
우리는 건축을 보며 “멋지다”, “기능적이다”, “이상하다”는 평가를 하지만, 정작 “누가 디자인했는가?”라는 질문은 자주 묻지 않는다. 사실은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은 하긴 한다. 이 질문은 만드는 작업자, 시공자의 몫이고 이런 건축을 누가 생각하고 디자인했는지에 대한 생각까지 못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건축가의 이름이 쉽게 지워진다. 대부분의 도시 건축은 설계자의 존재를 비가시화하고, 건축가는 수많은 법과 제도, 시행사의 요구, 대중의 기대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익명의 전문가로 기능한다.
하지만 문화와 예술로서의 건축, 사유로서의 공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단순한 기술이나 기능이 아니라, 그 공간을 구상하고 실현한 ‘건축가 개인의 정체성’이다. 여기서 정체성이란 단지 이름이나 스타일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태도, 인간에 대한 감수성, 공간에 대한 신념을 의미한다. 이 글은 단순히 ‘오리지널리티’라는 미학적 범주를 넘어서, 건축가 개인의 정체성 확보가 왜 철학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중요한가를 천착한다.
건축가는 공간을 통해 존재를 사유하는 주체
건축은 단순히 벽과 지붕을 올리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감각적·사회적 구조물이다. 건축은 삶의 양식을 규정하고 감각의 프레임을 형성한다. 이런 공간을 계획하고 구성하는 건축가는 결국, 존재를 구성하는 실천자이며, 존재론적 세계에 대한 태도를 드러내는 사유의 주체다.
따라서 건축가는 단순한 기능 제공자가 아니라, 자기만의 존재 해석을 공간이라는 언어로 드러내는 ‘철학적 개별자’이다. 건축가의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이 시대가 존재 방식의 다양성이나 감각의 차이, 공간적 실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건축가의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존중되지 않는다는 것은, 철학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곧 ‘표준화된 삶’만을 허용하는 위험한 세계다. 표준화된 삶의 위험성은 물질적인 것만 강조될 뿐이다.
집값과 이에 따른 증명, 어느 동네 사느냐와 어느 동에 사느냐, 어느 평형에 사느냐라는 질문 자체가 바로 이에 대한 증거다. 21세기 한국사회의 삭막함과 야만성은 이런 환경이 만들어낸 결과일 수도 있다. 표준화된 삶에서 차별화라는 것이 결국 돈밖에 없는 것이다.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건축, 동네, 도시는 만들어지는 것 또한 표준화된 제도와 법규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건축가의 주관적 해석과 대안 제시는 말 그대로 받아들여지기 힘든 개인의 경험일 뿐이다.
한국건축의 많은 현실은 이를 방증한다. 창작은 실현 가능성, 법적 허용성, 시공 비용, 공공성, 수익성 등의 복합 조건에 의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은 평균화된 형태, 무비판적 조형,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설계자다. 이는 철학적 빈곤이다. 건축가 개인의 정체성을 지우는 행위는 곧 존재에 대한 다원적 해석 가능성을 지우는 행위이며, 이는 공간을 ‘살게 하는’ 힘을 무력화한다.
정체성 없는 건축 창작은 권력 없는 언어
건축은 공공 공간을 구성하고, 도시를 형성하며, 개인의 삶을 결정짓는다. 이는 곧 건축이 정치적 행위라는 뜻이다. 그러나 건축이 정치적이려면, 그것은 단지 행정적 구조물이나 공공성이 강조된 설계로는 충분치 않다. 정치적이라는 것은, 사회 구조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 배제된 감각을 드러내며, 소외된 존재의 삶을 공간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건축가의 정체성에서 나온다. 자기만의 경험과 태도, 시대 인식과 세계관을 가진 건축가만이 기존의 권력 구조와 공간 질서를 비판하고, 새로운 공간 질서를 제안할 수 있다. 즉, 건축가의 정체성은 공간의 정치성 그 자체다.
하지만 한국건축에서 건축가는 종종 정치적 중립성과 무색무취한 기능성을 강요받는다. 공공건축은 형평성과 효율성의 이름으로 개별 건축가의 시도와 질문을 억제하고, 사적 개발은 수익 논리에 따라 창작을 도구화한다. 이 구조 속에서 건축가는 의사결정자로서의 권력을 갖지 못한 채, 타인의 명령을 구현하는 실무자로 남는다. 사실 이제는 너무나 이런 환경에 익숙하게 길들여져 있어서 건축가(사)들의 발언과 생각의 출발 자체가 독립적이고 자아주체성이 약하기도 하다.
정체성이 없는 창작은 권력이 없는 언어다. 역설적이게 정체성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지만, 정체성을 확보할 기회나 환경이 부재한 것도 한국의 건축가(사)들에겐 회피할 핑계가 된다. 사실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나 결과는 험난하고 고단하고 피곤한 일이다. 자기의 권리를 조금 내려 놓는 순간 편리한 무빙워크에 올라탈 수 있기 때문이다. 질문의 대답이 단순하면 그 순간으로 끝나지만, 대답이 길어지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는 피곤함이라고나 할까? 무엇보다 이런 정체성 확보를 위한 노력이 시작될 경우 그 건축가에게는 실현의 기회가 거의 대부분 사라져 버린다. 그러니 어느 건축가가 이를 나서서 방어하고 정체성을 가지려 할까?
한국 건축환경의 비극이다.
건축가의 정체성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공간을 비정치화하고, 도시를 감정 없는 표면으로 만들며, 인간의 삶에서 고유한 차이를 박탈하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건축가 개인의 정체성을 사회가 제도적으로, 문화적으로 보장하고 장려하는 것은 곧 공간의 민주성을 회복하는 일이자, 정치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표준화된 공간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정체성
현대 도시 공간은 점점 더 표준화되고 있다. 대형 개발 사업은 유사한 유형의 아파트, 오피스, 상가를 반복하며, 공공건축은 예산과 규정에 의해 획일화된다. 이 속에서 건축가의 역할은 줄어들고, 설계는 규제 대응형 서비스가 되어버린다. 특히 한국은 그 전형을 보여준다. 실제적인 건축결정 선택권이 건축가에게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과 표준화와 생산성, 단기적 수익성이 중심이 된다.
이러한 표준화는 단순한 미적 문제를 넘어서, 사회적 상상력의 빈곤을 드러낸다. 모든 도시가 똑같고, 모든 공간이 효율만 추구할 때, 인간은 공간에 의해 질문받을 기회를 잃는다. 공간은 더 이상 삶을 환기하지 않고, 감정을 흔들지 않으며, 사유를 자극하지 않는다.
때문에 건축가의 정체성은 이 표준화된 세계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출발점이 된다.
특정 건축가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인간을 공간 속에서 배치하며, 시대를 감각화한다면, 그는 단순히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통한 사회 비평의 언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건축은 사회적 대화의 장을 열며, 감각의 해방을 유도하고, 기존 제도의 한계를 실험적으로 넘어서게 한다. 정체성을 가진 건축가는 곧 사회적 상상력을 촉발하는 행위자이며, 공간은 그 상상력이 제도와 충돌하며 생산하는 물리적 담론장이다.
무엇보다 건축 창작의 고유성은 존재의 윤리
건축가의 창작은 단지 독특한 조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존중하는 윤리적 실천이다. 인간은 모두 다르고, 시대마다 삶의 방식은 다르며, 공간에 대한 감각 역시 정형화될 수 없다. 그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행위가 예술로서의 건축이다.
이 예술은 기능과 분리되지 않으며, 오히려 기능 안에서 미적 질문을 지속할 때 실현된다. 빛, 재료, 감정, 동선, 기억과 같은 요소들이 단순히 구성 요소가 아니라, 존재의 층위를 형성하는 감각의 언어가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작품’이라 부를 수 있다.
건축가의 정체성은 바로 이 미학적 실천의 일관성과 깊이를 가능하게 한다. 그는 외형을 반복하지 않고, 매번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공간을 통해 자기의 삶과 시대를 증언한다. 이것은 창작이 아니라 삶의 태도이자, 존재에 대한 책임감이다.
건축은 본질적으로 누군가의 세계관이 구현된 물리적 언어이다. 그 세계관을 구축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은, 곧 그 공간이 무사유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건축가 개인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공간을 언어로 삼을 수 없고, 도시를 텍스트로 읽을 수 없으며, 건축을 존재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다.
지금 한국건축이 당면한 과제는 단지 기능적 성과를 넘어서, 건축가의 존재가 사회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조건을 복원하는 일이다. 이는 창작의 자유를 회복하는 일이며, 공간을 통한 사회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일이자, 건축이 다시 철학적이고 정치적이며 미학적인 예술이 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