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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사과 Sep 29. 2020

이중섭 미술관

과거를 고스란히, 소박하고 꾸밈없이 담은 서귀포

운전하다 문득 마주하는 한라산

1. 제주는 나에게 **다?


나중에 결혼하면 신혼여행은 제주로 갈거라고 했다. 한번도 가 보지 못했으므로. 대한민국 사는 사람이 제주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희한하게도 제주도는 늘 나를 비껴갔다. 학창시절에 유독 내가 수학여행을 가는 해엔 문제가 생겼다. IMF 였으므로, 혹은 유독 그 해에 학생수가 많아 전 학년이 비행기 한 대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제주도행은 좌초되었고 차선책으로 떠났던 곳은 매번 경주였다. 스무살, 20대 초반, 가족 여행으로 제주를 갈만한 기회가 생길때도 나는 학업등으로 해외에 나가 있었다거나.. 하는 뭐 이런저런 여러가지 이유로.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거 나중에 신혼여행때 가지 뭐. 하고 아껴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제주여행은 일부러 피하게 되는 무언가 이기도 했다. 사실 내가 신혼여행을 제주로 가고 싶다고 말했던 이십대 까지만 해도 제주가 이렇게까지 급 부상하는 어떤 힙함은 아니었다. 그래서 사실 화려한 신혼여행 보다 쉼에 의미를 두는 국내 여행을 하자는 소박한 의미로 "신혼여행은 제주"라는 모토를 지었던 것인데 내 나름대로 아껴두었던 제주에서의 쉼이 나름의 유행처럼 번지자 "남들 다 하는건 나는 안할래" 라는 모난 마음이 들어 반항적으로 제주를 멀리 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예를 들자면 자아를 찾고 싶은 사람들이 인도를 찾고 일상이 답답한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듯 여행에도 유행이라는것이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제주 여행이 마치 분위기 있지만 맛이 결여된 인스타그램 맛집처럼 간주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제주 말고 다른 여행지는 그럼 방문한적이 있던가...)


그렇게 쓸데 없는 고집을 가진 내가 무료하게 집에서 젊음의(그래도 아직은 젊다고 생각해 본다) 한 페이지를 낭비하던 무렵 정말 충동적으로 떠났다. 제주도로. 얼마나 급하게 떠났냐면 이틀 전 뽑힌 사랑니를 그리워하며 너도 나도 부피를 키우던 잇몸과 볼 근육이 내 얼굴을 엄마 찾는 둘리의 하관과 비슷한 형상으로 만들었고, 이로 말미암아 생긴 미열로 코로나를 의심당했지만. 어쨌든 떠났다. 제주로. (생각해보면 혼날만한 일이었던것도 같다)

 


촌스러운 내가 늘 제주행 신혼여행을 꿈꾸면서 하고 싶었던 것은 딱히 별 것은 없었는데, 그저 이중섭이 살던 곳 근처에 숙소를 잡고 아무 생각없이 prochain 남편과 보름 정도 제주인이 되어 살다 오고자 했던 것이었다. 보름 내내, 좋아하는 해산물로 밥을 지어 먹고 낮에는 서점에서 책을 사보거나 제주에 숨은 미술관을 다니며, 올레길도 걸으며 (언제적 올레 ㅋㅋㅋㅋ 그 이름하야 김삼순 세대) 말 그대로 휴양을 하고 싶었다. 그것이 이제는 제주 한달살이, 혹은 보름살이 라고 부르는 누구나 한번쯤은 해야 하는 트렌드 처럼 이미 여겨지게 되었지만. 그 뿐인가 이제 굳이 길게 쉬지 않아도 강제 휴가를 보내는 지금은 바야흐로 코로나 시대. 어쨌든 계획은 조금 많이 틀어졌지만 그렇게 제주와 나는 처음 만났다. 



2. 그리고 서귀포


서귀포는 제주시와 다른 매력이 있었다. 오래된것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일종의 묵직함이 있었는데 촌스러운 옛 도시와 같은 정감이 서렸다. 



묵었던 숙소에서 서귀포가 꽤 멀었으므로 여간하면 제시된 경로를 모두 따라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3. 이중섭


이중섭은 내 삶에서 지금까지 세 번 만났다. 스물한살인가 막연히 제주도행 신혼여행을 꿈꾸었던 것도 우연히 드라마에서 이중섭과 그의 가족에 대한 애틋한 일화를 듣고 관련한 책을 찾아 읽었기 때문이었고 (심지어 당시엔 미술에 관심도 없던 시절이었다), 작년이었나. 우연히 서울미술관에 작품 구경을 하러 갔다가 이중섭의 은지화를 마주하며 울컥한 마음이 들었던 때. 그리고 올해 여름 제주여행. 이렇게 세 번.


책자에 따르면 피난을 다니던 이중섭 가족에게 당시 이 마을의 반장이었던 송태주와 김순복 부부가 1.4평 정도의 작은 방을 내 주었고 없는 살림에도 간혹 먹거리를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이런 감사함으로 인해 이중섭은 주인인 송태주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이중섭이 서귀포에서 그린 초상화는 단 3점인데 그 중 하나가 집주인, 나머지는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이웃 주민 세 사람의 초상화라고 한다. 아직도 그 주인댁 자손이 실제로 살고 있다는 것도 신선한 것 중 하나였다. ) 피난민 배급과 반장 부부가 나누어 주는 음식으로 연명을 하던 가족은 끼니를 때우기 위해 밭에서 채소를 캐오거나 바닷가에서 게를 잡아 반찬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이중섭은 '게"(제주도 말로 "깅이"라고 한다) 에게 미안하여 그림에 게를 자주 등장 시켰고 이중섭 미술관도 게 모양이라고 한다... (싱기)


제주도식 정원은 너무 아름답다 정원 중앙에 이중섭상이 있다.
그가 살았던 1.4평의 방.

어릴 때 집이 어려워 방 하나에서 엄마 아빠와 함께 셋이 살았던 적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때 까지는 그 집에서 살았었는데 당시만 해도 가정방문 이라는 것이 있었던 시기라 담임 선생님께서 가정 방문을 와서 방 안을 두리번 거렸던게 언뜻 언뜻 기억이 난다. 엄마는 곧 죽어도 그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늘 말하지만 내 기억 속 어릴적 행복한 기억은 꼭 그 집에서 였다. (이렇게 추억은 다르게 적히죠 feat 이소라) 철 없던 나는 당시 늘 행복했다. 좁은 집에서 엄마와 아빠와 꼭 붙어 자던 것도 (엄마 아빠는 얼마나 귀찮았을까) 엄마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설탕묻은 꽈배기를 몰래 먹던 것도. 착한 어린이는 일찍 자는거라는 부모님 말씀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실눈을 뜨고 부모님 주무실 때까지 함께 드라마를 본것도. 내게는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마 그래서 였던 것 같다. 스무살 초반에 이중섭의 책을 읽고 그가 좋아졌던 것이. 내 어릴 적 좁은 집에서 서로 부둥켜 안고 마음을 부비던 가족에의 애착이 이중섭에게도 느껴져서. 1.4평은 생각보다 정말 좁았지만 (14평이 아니라 1.4평이다) 나는 왜인지 그 집에서 함께한 가족이 안쓰럽다기보다 따뜻했고 그래서 후에 홀로 남겨져 가족을 애타게 그리워 했을 이중섭이 아팠다. 


코로나로 인해 예약 후 입장을 해야 해서 온라인으로 예약을 하고 30분 정도 정원 구경을 하다가 올라갔다.


4. 이중섭 미술관


아 여기 섬이지. 하고 잊고 있다 문득 문득 깨닫는다. 강이나 호수는 좋아하는데 바다는 무섭다던 내가 조금 변했나 싶기도 하다. 멀리 바다가 보이니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1층에서는 이중섭 미술관의 연보에 이어 그의 친구, 그의 그림의 주제 (닭, 게, 소 그리고 가족) 등 순서에 따라 알기 쉽게 전시가 되어 있었다. 개별 해설사도 있지만 기회가 된다면 나도 언젠가 이중섭을 해설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생각했다. 


사계는 어느 화가에게나 좋은 주제가 된다. 왼쪽이 이중섭이 그린 사계
이중섭의 은지화

- 은지화


그림을 그릴 종이가 없어 담배곽이나 껌종이에 송곳 등으로 그리기 시작했다는 그의 은지화는 일종의 선각화 (은지에 날카로운 것으로 홈이 생기도록 그린 후 담뱃진이나 물감으로 문지른 후 마르기 전 닦아내면 파인 부분에만 선이 입혀짐)로 이제는 뉴욕의 모마에도 전시 될 만큼 세계적인 작품이다. 당시 대구미 문화원 책임자였던 맥타카트가 이중섭 개인 전시회에서 3점의 은지화를 구입해 모마에 기증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마애불의 선각화와 금속공예의 은입사, 고려 청자의 상감기법 등과 닮은 한국의 전통적 기법과 6.25 전쟁 당시 담배곽에 그린 그림이며 작가가 어려웠던 당시 일상의 소재였던 아이들, 게, 물고기 등을 주제로 하여 그렸다는 상황적 스토리등으로 인해 크게 평가받는 이중섭 그 자체를 대변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 그림 편지


김환기의 그림 편지 못지 않게 즐겁고 아픈 그림이었다. 마음을 낱낱이 적은 글들은 그의 머릿속에 담겨있던 그림들과 더불어 마치 하나의 작품으로 자리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고리(이중섭 자신)는 만족해서 마음속으로 혼자 싱글벙글 웃고 있다오. 사람들은 아고리가 제 아내만을 생각하고 있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아고리는 당신과 같은 사랑스런 애처와 오직 하나로 일치해서 서로 사랑하고, 둘이 한 덩어리가 되어 참 인간이 되고, 차례차례로 훌륭한 일 (참으로 새로운 표현과 계속해서 대작을 제작하는 것)을 하는 것이 염원이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소중한 애처를, 진심으로 모든걸 바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결코 훌륭한 일을 할 수 없소. 독신으로 제작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고리는 그런 타입의 화공은 아니오. 자신을 올바르게 보고 있소. 예술은 무한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에 충만함으로써 비로소 마음이 맑아지는 것이오. 
이중섭이 자신의 아내인 마사코(이남덕)에게 보낸 편지 중


가슴이 먹먹해서 한참동안 쳐다봤던 전보


"Leechungsop died sixth created today I express deep regret "
이중섭이 6일에 죽었고 오늘 화장했다. 깊은 유감을 표한다. 


그는 늘 가족을 그리워 했다. 그의 아들들인 태현과 태성이 세네살일 적 1평이 조금 넘는 그 방 안에서 네 식구가 얽히고 섥혀 살을 부딪치며 살았던 그 날을 회상하며 늘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워 하고 또 그리워하며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시인 구상과 같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여러 다방에 작품을 전시하긴 했지만 살아 평생 가난은 늘 그를 따라다녔다. 결국 영양실조와 간염, 조현병등을 차례로 앓다가 서대문 적십자 병원에서 1956년 사망하였으나 무연고자로 취급되어 사흘간 시체실에 방치되었다고 한다. 가까스로 병원을 찾아온 친구 김이석에 의해 사망 사실이 확인 되었고 아내인 남덕에게 전보를 보냈다. 



+ 이중섭 미술관 신년 기획전 "자화상, 나를 찾다"


자화상이란 용어는 라틴어 protrahere 에 어원을 두고 있다. 이 말은 원래 '끄집어 내다. 발견하다. 밝히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발전하여 오늘날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뜻이 된것이다. 그러므로 자아라는 의미의 self와 partray가 합하여 이루어진 자화상은 간단하게 '자기를 끄집어내다, 밝히다' 라는 뜻이 된다.
 
전시기획 글 중 발췌


가장 좋았던 작품 안소희, 왼쪽부터  9pm, 어느 집 풍경, 생각하는 시간



큰 전시관이 아니었고 이렇다 할만할 특색있는 방식의 화려한 큐레이팅도 아니었다. 다만 이중섭 미술관의 연보를 보여주고, 진솔하게 이중섭의 삶과 그의 그림의 주제를 알려주는데 충실한 담백한 미술관에서 읽었던 그의 일생과 그가 그린 그림들이 머릿속에서 떠돌아 여운을 간직하려 박물관 주면을 빙빙 돌아 산책했다.


이중섭 미술관 위로 낮달이 떠 있었다. 


골목길 사소한 곳곳에 프린트 되어 있는 이중섭의 그림이 마냥 반가워 자꾸 찾아내어 보고 또 보고 했다기엔 아쉬울 것 같다. 그의 경쾌한 필체의 그림은 간혹 아프게 가슴을 두드리는 무언가로 다가왔다. 더운 날이었지만 바람은 선선했다. 문득 들리는 풍경 소리에 눈 앞에 아른거리는 이중섭의 게가, 그의 아이들이, 또 드센 닭이 나를 그 시절 이중섭이게 했다.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이중섭, 소의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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