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돌파도, 회피도 어렵다면 축소시켜버리자.
시련이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시련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시련 (試練)
1. 겪기 어려운 단련이나 고비
2. 의지나 사람됨을 시험하여 봄
쉬이 흘려보내지 못하고 이겨내지 못하는 무엇이기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는 의미가 녹아있는 듯하다.
다소 슬프면서도 흥미로운 사실은 이 '시련'이라는 단어의 해석이 굉장히 주관적이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 순간 자신만의 시련을 맞닥뜨리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개개인마다 이런 순간들에 대처하는 방식이 다르다. 스트레스 상황 아래서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비된다는 생물학적 구조는 동일하지만, 누군가는 정면돌파를 선택하고 누군가는 있는 힘껏 도망친다.
누군가는 실눈을 뜨고 그 상황을 곁눈질로 바라보는가 하면, 다른 이는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 라며 의연히 흘려보내기도 한다. 정답은 없다.
물론 위기나 시련이 닥치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버겁고 괴롭다. 하지만 결국 그 앞에 무너지는 것도, 에라 모르겠다 하며 뻗었다 어느 순간 딛고 일어서는 것도 본인의 선택이라 생각한다.
지난 삶을 돌아보며 나에게 찾아온 가장 큰 굴곡은 네 가지 정도로, 나름대로 타격이 컸던 그 굴곡들을 넘고 건너 현재에도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나는 마음 편히 회피하는 것도, (생물학적 나이에 걸맞게) 의연히 흘려보내는 것에도 젬병이다.
대신 크고 작은 시련이 닥칠 때마다 그것을 하나의 에피소드로, 하나의 이야깃거리로 축소시키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 같다. 회피와 다른 점은 상황을 똑바로 직시하되 그 상황이 나에게 미치고 있거나 미치게 될 것 같은 영향을 최소한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너는 밥이 넘어가니?'라고 매몰차게 나를 꾸짖을 내 안의 비판가를 속일 수 있어야 하는 일이기에, 꽤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중 하나는 '그냥. 그랬다고. 뭐 어때.'라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끄집어 올리는 일인데, 가끔 힘들 때 가족이나 기대고 싶은 사람에게 힘든 상황을 이야기하며 그 끝에 저런 말을 실제로 내뱉는 것도 도움이 된다.
듣는 이의 심적 부담도 경감시켜줄 뿐만 아니라 자기 최면의 효과도 아주 톡톡하다.
가끔 시간이 흘러 그 당시에 자기 최면을 걸며 일상에 집중하느라 정작 힘든 순간과 아픔에 대한 고찰이 부족했다는 것을 느끼기도 하고, 때아닌 후폭풍을 맞기도 하지만 나는 아마 앞으로도 이런 태도로 속고 속이며(?) 살아갈 듯하다. 나와 주변의 안위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나름의 최선이기도 하고, 방황과 회복기를 줄이며 다음 도전을 이어나가기에도 충분히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타고난 자존감, 자라온 환경, 인간관계 등을 이유로 스스로가 별 것 아닌 일에도 크게 흔들리거나 가끔 아예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고민이 많다면 나처럼 본인을 조금은 속일 필요가 있다.
개인에 따라 나의 상황이 직접 겪은 것처럼 생생히 와닿을 수도, 뭐 저런 걸 갖고 징징대나 싶을 수도 있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나의 글을 읽으며 재미나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 그 이상의 보상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글이라는 매개채로 마음을 비워내는 행위 자체가 주는 의미도 크다.
하나하나의 일들을 풀어가기전 나 스스로와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분명하게 얘기하고 싶은 건
어두운 터널, 미로, 동굴 그 어디에 갇히던 반드시 현재의 위치에서 발을 떼어 움직여야만 그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왼발을 먼저 떼든 오른발을 먼저 떼든, 앞구르기를 해서 가든지 아무래도 좋다.
그리고 나(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움직일 것이다.
그냥. 그렇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