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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자 Feb 21. 2018

그믐밤, 제페토는 없었다

하필이면 달도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가로등 없는 주택가 골목길에는 차들만 남아 잠들어 있었다. 그날은 유난하게도 밤의 기운이 거리를 짓눌러댔고, 길고양이의 발소리마저 먹어치운 적막이 거리를 지배했다. 나는 잘 아는 길을 잃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혹시라도 밤거리를 깨울까 걱정되어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고 괜스레 핸들을 잡은 손에만 힘이 들어갔다. 차는 골목길을 느릿하게 유영했다. 낮게 깔리는 전조등 불빛이 아스팔트의 진득한 질감을 반복해서 그렸다. 길은 마치 상어의 뱃속으로 이어지는 통로 같았지만 끝에 다다를 때까지 제페토 할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다. 그 대신 나는 골목길 모퉁이에서 폐기물 수거함을 헤집는 노인을 만났다.


그녀의 그림자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듯 전조등의 불빛을 빨아들였다. 그러나 주변의 어둠을 먹고 진하게 착색된 그림자는 전혀 빛나지 않았다. 낡은 누빔 옷과 회백색으로 얼룩진 운동화, 희끗한 머리카락은 더 이상 반짝일 수 없을 정도로 바랜 듯 보였다. 곁에는 동네 주민들이 버리고 간 폐품과 종이상자와 쓰레기봉투와 옷가지 같은 것이 수북했다. 나는 그것들 중 하나가 그녀의 소유일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폐품을 뒤적이던 손을 들어 천천히 전조등 불빛을 가렸다. 그리고 고요히, 아주 고요히, 일어섰다. 몸의 골격을 하나씩 추켜세우는 동작이 너무 섬세하여 마치 늙음을 연기하는 짙은 회색의 발레리나 같았다. 음악이 흐르지 않는 캄캄한 무대에서 자동차 조명을 스포트라이트 삼아 춤추는. 나는 감히 그녀의 무대를 지나칠 용기가 없었다.


짧은 공연은 고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검은색 모노드라마. 단막극의 주인공은 회색의 발레리나. 라르고 혹은 렌토로. 아주 느리게, 아니면 무겁게. 관객이 없는 무대에서 그녀는 거리낌 없이 춤을 추었다. 그녀가 폐지를 골라내 뭉툭한 손으로 고이 접는 동안 무대를 침범하는 이는 없었다. 나는 전조등 불빛에 그녀를 가두고 무대를 훔쳐보았다. 이윽고 공연의 막이 내리자 그녀는 종이상자가 켜켜이 쌓인 유모차를 밀어 천천히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무대의 결말은 아낌없이 완벽했다. 새 생명이 앉을 자리는 나무의 주검으로 채워져 있었다. 어둠의 끝에는 제페토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


유모차에 담긴 어떤 이의 삶은, 그믐에 기대어 종이를 그러모으는 것으로 결말을 맞이해야만 하는가. 그녀는 흩어지는 삶을 대신할 용도로 폐지를 주웠는가. 진정 담고자 했던 세상은 어디로 갔는가. 폐품이 대신 차지해버린 삶의 자리를 언제고 감당해야만 하는 건가. 그녀의 유모차는, 그녀에게 휴식인가 족쇄인가. 생의 끝자락에 다다른 자의 단막은 심오하였고 나는 어느 것도 추측할 수 없었다.


*


달이 뜨지 않은 밤이면 유모차를 밀던 왜소한 뒷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나는 잠시간 그녀를 그리다가, 괴로워하다가, 그믐을 핑계 삼아 제멋대로 그녀의 에필로그를 잇는다.

  날도 어두운데 밤늦게 어딜 다녀오셨어요.

  아이고, 동네 시끄럽다. 날이 하도 갑갑해서 잠깐 마실 다녀온 걸 가지고 유난 떨고 그러냐. 어여 들어가자.

  어머니, 힘드신데 자꾸 이런 거 주우러 다니지 마세요. 저 정말 속상해요.

  신경 쓰지 마라. 원래 사람이 일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더 아픈 법이다. 그깟 것 좀 한다고 몸이 닳는 것도 아니고. 느이 시아버지는?

  아버님은 벌써 주무세요. 오자마자 어머님 어디 가셨냐고 여쭤보셨어요.

  기껏 동네방네 찾으러 다녔더니만. 하이고 팔자도 좋네.

달이 뜨지 않은 밤. 그녀는 손주 과자 값이나 벌 겸, 날이 갑갑해서 바람이나 쐴 겸, 집에서 벌써 자고 있는 남편을 찾을 겸, 유모차를 끌고 나왔을 것이다. 며느리는 그녀를 걱정하고 손주는 과자를 사주는 할머니를 좋아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마음대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대가로 어제보다 한 뼘 즈음, 어쩌면 두 뼘 즈음 코가 길어졌을 것이다. 그날 그 밤, 역시 제페토는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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