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둘째를 씻기는 그녀는 삼십대 중반이었다. 씻기 싫다고 앙탈 부리는 작은아이를 억지로 끌고 와 옆에 앉혀 놓고, 미리 솥에 끓여 놓은 뜨거운 물을 찬물과 섞어 온도를 맞췄다. 빨간 대야에 담긴 물을 휘휘 저으며 찬물을 조금씩 더하는 동안, 뜨거우니 아직 들어가지 말라고 아이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줬다. 일전엔 아이가 멋모르고 뜨거운 물에 발을 담가서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그때 그녀는 아이를 들쳐 메고 오백 미터는 떨어진 소아과를 향해 허둥지둥 뛰었다. 아이가 목청껏 울어서 속이 쓰렸다. 언젠가는 보일러가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 그녀에게는 미지근한 물이 나오는 샤워기가 절실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러듯 그녀는 풀빵과 동네 슈퍼에서 파는 작은 카스텔라를 좋아했다. 베이커리에서 만든 롤 케이크나 카스텔라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것을 처음 맛보게 된 십여 년 후의 일이다. 물론 그녀가 사는 작은 동네에도 양과자를 파는 제과점이 있었다. 특별한 날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제과점에서 파는 팥빙수를 먹으러 갔다. 아마 두어 번 정도였지만. 한여름에도 제과점은 은행처럼 선선했다. 우유와 팥만 올려 주는 시장 빙수와 달리 제과점의 팥빙수에는 알록달록한 젤리와 연유, 후르츠 칵테일이 듬뿍 올려져 있었다.
아이들이 간식을 먹고 싶다고 졸라대면 그녀는 할 수 없이 시장으로 향했다. 낡은 시장 건물 일 층의 떡볶이 집은 환갑이 한참 지난 할머니가 동네 장사를 하는 곳으로, 떡볶이뿐 아니라 각종 건어물과 팥빙수도 함께 팔았다. 그 집은 정방형의 공간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평범한 가게 중 하나였다. 가게의 상호가 희고 길쭉한 플라스틱 판에 대충 적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건물 안의 상호는 모두 그런 식으로 적혀 있었다. 누런 장판을 덮은 긴 테이블에 앉으면 할머니는 쑥색 접시에 떡볶이를 가득 담아 줬다. 깔끔한 성격의 그녀는 할머니가 설거지를 깨끗하게 하는지 걱정이었다.
떡볶이 집의 위생이 별로라는 이유로 그녀는 그곳을 내켜하지 않았다. 한 번은 할머니네서 산 당면에서 바퀴벌레가 나온 일도 있었다. 그녀가 봉투를 열자 바퀴벌레 여러 마리가 쏟아지듯 나와 곳곳으로 도망갔다. 그녀는 기겁하여 할머니에게 찾아가 따졌지만 할머니는 그런 그녀를 나 몰라라 했다. 고작 그깟 일로 떼를 쓰냐며 태연하게 굴었다. 그녀에게는 엄청난 충격이 할머니에겐 그깟 일이었다. 그러나 아이들 때문에라도 그녀는 종종 떡볶이 집을 찾았다. 근방의 떡볶이 집이라고는 위생이 별로인 그 집이 유일했고, 동전 하나로 두 아이가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곳도 그 집이 유일했다. 다행히 할머니는 그녀의 어린 아이들을 많이 예뻐했다. 큰애가 둘째의 손을 잡고 떡볶이를 먹으러 가면 할머니는 접시가 넘칠 정도로 떡볶이를 담아 줬다. 그녀의 두 아이는 백 원이던 떡볶이 가격이 삼백 원, 오백 원이 될 때까지 할머니네서 떡볶이를 사 먹었다.
그녀는 지긋지긋한 서울을 하루 빨리 떠나고 싶었다. 마침 노태우 정부는 집값 안정화를 위해 신도시 개발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서울에 인근한 분당과 일산에 수십만 가구를 조성하여 집값 폭등을 막으려는 계획이었다. 그녀와 남편은 작은 아파트를 분양 받으려고 꾸준히 청약 저축을 넣었다. 매회 빠짐없이 분양 신청을 했지만 신도시에 아파트를 사려는 사람은 너무 많았다. 남편은 신문에 난 아파트 분양 기사를 꼼꼼히 스크랩했다. 노트의 두께가 서너 배가 되고 분양 공고가 십 회에 이르러서야 그들은 일산의 작은 아파트를 분양 받을 수 있었다. 열 병합 발전소가 있어서 연탄을 때지 않아도 따뜻한 물이 나오는 집이었다. 갚아야 할 융자가 수십 년 치 쌓여 있었지만 그녀의 남편은 비교적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집을 사랑했다. 더 이상 이사를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커다란 소파도 거실에 가져다 놓았다. 단칸방에서 자던 아이들에게 방이 생겼고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기도 생겼다. 이제야 아이들에게 부모의 도리를 다한 것 같았다. 작은 아파트는, 그녀와 남편에게는 아이들이 클 때까지 살아도 될 만큼 커다란 집이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남편의 일 때문에 그녀의 가족은 집을 떠나야 했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사는 것은 더 힘들어졌다. 삶은 그녀의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몇 번의 크고 작은 부침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때마다 그녀는 나이를 먹었고, 조금씩 희미해졌다. 그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줄어들고 누군가의 엄마로 기억되는 일이 잦아졌다. 아직 그녀의 삶을 다 산 것도 아니었는데, 그녀는 엄마가 되었다.
이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는 묵은 짐을 정리하다 아이들의 유치원 시절이 담긴 비디오테이프와 플레이어를 발견했다. 오래된 비디오테이프에는 유성 매직으로 아이들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녀는 아이를 졸라 비디오를 틀었다. 낡은 플레이어가 요즘 시대의 TV와 연결된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조악하게 편집된 비디오에는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담겨 있었지만, 아이들 말고도 젊은 시절의 그녀가 있었다. 포켓에 청색 무늬가 덧대진 주황색 체크남방과 청바지를 입은 그녀는 늘 같은 차림이었다. 그녀의 아이는 계절마다 유치원복을 갈아입고 선생님은 매번 유행하는 스타일의 옷을 입었지만 그녀의 옷은 변하지 않았다. 비디오 속의 그녀는 영원히 늙지 않겠지만, 그 시절 그녀는 비디오 밖에서도 시간의 흐름을 모르고 살았다. 아이가 봄 소풍을 가면 한 벌뿐인 주황색 체크남방을 잘 다려 입고, 여름이면 체크 남방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하면서.
지나가버린 추억이라며 그녀는 웃었다. 웃음 뒤로 세월이 따라왔다. 세월 뒤로 가난이 따라왔다. 가난 뒤로, 다시 나이를 먹지 않는 세월이 따라왔다. 그녀는 비디오가 참 재밌다며 아이들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