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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지선 Feb 06. 2020

나는 수상후보자

이른 아침 산책길에서 아름다운 장끼가 바로 내 곁을 지나 강으로 날아갔다.


 인기척에 깜짝 놀라  걸음 종종이다 강으로 날아오르는 장끼. 화려한 줄무늬의 깃털을 펼치며  빠진 몸매로  위를 일시에 솟아오르는 모습에 “!” 하는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시골에 살기에 아침마다  우는 소리에 잠이  때도 있고, 논두렁 사이로 날아오르는 꿩의 모습은 자주  왔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것은 처음 이었다


아마 오늘 새벽은 안개가 심해서 장끼도 나를 못 본 모양이다. 그때 나는 늘 다니는 강가의 산책길에서 내가 읽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 책장을 덮으며 일어나는 중이었다. 책 내용의 감동과 함께 ‘아! 아름답다’는 감정이 온 몸을 휘감았다.


새 중에서도 장끼의 모습은 언제 봐도 마치 물감으로 그린 그림 같다. 그 선명하고 화려한 색깔들이 한적하고 소박한 시골풍경과 대조를 이루며 나를 색다른 세계로 이끈다.


그 순간 오늘 새벽 일어나기 힘든 몸과 마음을 달래가며 이곳으로 걸어 나온 나 자신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거 봐. 일찍 일어나길 잘 했지’하고 나에게 칭찬의 말을 건넸다.


아침에 일어나기가 몹시 힘든 나는 ‘바보들은 결심만 한다 글귀를 수도 없이 되뇌며 이불을 박차고 나온 나에게 칭찬을 해주었다.   시간 가량의 산책으로 몸과 마음이 상쾌해진 나는 나에게 () 주기로 했다.  집에 가서 ‘맛있는 토마토 주스를 갈아 줄께’, ‘그게 오늘 일찍 일어나 산책을  상이야하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시절, 잘하는 것이 별로 없었다. 다만 특별히 좋아한 것이 있다면 방에서 뒹굴며 동화책을 읽거나, 부산이 고향인 나는 여름 방학 내내 피부가 흑인처럼 새까맣게 되도록 수영하면서 바다에서 놀았다. 푸른 파도에 몸을 누이고 하늘을 바라보며 하루종일 둥둥 떠서 구름을 보며 듣는 “~하는  귓전에 들리는  물결소리와 바람소리를 듣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기억에 10 초순까지도 해운대 바다에서 수영하다 경찰아저씨에게 잡혔던 기억들.  노래나 미술대회는 마지막 결선에서 몸이 아프거나 해서 실패한 기억밖에 나지가 않는다. 입학시험도 합격의 기억보다 실패의 기억이  많았고, 공부나 운동이나 그림이나 이렇다    상이나 칭찬을 받아보지 못했다.   느리기도 하지만  운도 없다고해야 할까   뒷북을 친다고나 할까?


남들이  알아듣는 것도  한참을 지나야 “!” 하고 깨닫기 시작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간혹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서 “외국에서 살다 왔는냐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는데, 아마 그건 말도 느리거니와 눈치가 빠르고 민첩한 한국 사람과 무언가 달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듣는 칭찬이라면 ‘순발력은 떨어지나 그나마 지구력이 있다 얘기였다.   한번 마음을 먹으면 자포자기하지 않고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하려 하고,  누가 뭐라해도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켜나가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여러 사람이 가는 길도 ‘그게 아니야 멀더라도  혼자라도  길로 가야 하는 거잖아하면서 혼자서 걸어가는  외로움. 그래서 나는 단번에 지름길로 가지 못하고 길을 잃고 헤매기가 일쑤였다.  잘못 들어선 길에서의 황당함, 그리고 잦은 실수에 대한 자책. 하지만 나는  자리에서 다시 길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하고, 새로운 길을 만들기도 하고, 왜 그 길로 가야만 하는지 천천히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생각하면서 다시 출발점부터 걸었다. 황당한 방황, 자책과 소외감의 길목에서 나를 일으켜 세우는 방법으로 생각한 것이 내가 나에게 칭찬과 상을 주기로 한 것이었다.


세상에서, 남에게서 받을 수가 없다면 내가 주겠다고….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학교생활 내내 늦게 일어나 지각을 밥 먹듯 했고, 그러니 성적도 좋을 리 없고, 남들은 다 타보는 그 흔한 상 한번 받아보질 못했다. 건강도 겨우겨우 학교를 다닐 정도였고, 감기만 걸려도 결석을 했다.


아이들이 기다리는 봄, 가을 소풍조차 걷는 것이 힘들어서 즐겁지만은 않았다. 수학여행 때도 나는 설악산에 가서 흔들바위까지도 가지 않고 방에서 짐을 지켰던 기억이 있다. 무척 약골이어서 학교 다니는 일조차 그렇게 버거울 수가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건강한 모습을 본 주위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지금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나에겐 정말 힘든 일이다.


특히나 전교생을 모아 놓고 아침에 하는 운동장 조회 시간은 나에겐 무척 고역이었다. 힘겹게 서서 교장 선생님 말씀이 언제 끝이 나나 하는 생각 뿐….


앞에 불려나가 우등상이나 개근상을 받는 친구들을 우두커니 바라보면서 ‘저 애는 참 이상하다. 어떻게 하루도 안 빠지고 학교를 제 시간에 올 수가 있지? 시험을 저렇게 잘 볼 수가 있지?’ 이런 생각을 할 정도였다.


자책과 소외감의 길목에서 생각해낸 것이 내가 나에게 칭찬과 상을 주기로 한 것이었다. 늘 주류에 끼지 못한 아웃사이더의 자구책이라고 해야할 지, 내가 스스로 채점관이 되어 나에게 상을 주는 것이다.


착한 행동을 한 것이나 나쁜 일을 한 것도 남은 알 수가 없지만 나 자신은 정확히 알 수가 있지 않은가? 남이 보기엔 대단한 일도 아닌 사소한 일일지라도 나에겐 정말 힘든 일들을 무사히 끝냈을 때나 모두가 외면하는 왕따를 이겨내고 그 길을 고수했다든지 남을 위한 작은 배려와 봉사의 행동에 스스로를 격려하며 나는 나에게 상을 주었다.


수고했어, 힘들었지?’, ‘그래도  참아냈어라며 정도에 따라 커피    때도 있고, 좋은   권일 때도 있고, ‘오늘 하루는 모든 일에서 벗어나 즐겁게 놀아도 하고 휴가도 준다.


나는 나에게 상을 받을 때가  어느 순간보다 무척 기쁘다.  눈물이  정도로 기쁘다.  상은 진실로 공정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을  속인다 해도  자신만큼은 속일  없지 않은가?


TV 나  라디오에서 수상자들이 “ 노력하라고 주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래 맞다!’   하라고 주는 상이다. 나를 버리지 않고 지켜준 것이 감사해서 주는 상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주는 상외에 ‘신이 주시는 선물’ 5월이 한창이다. 온갖 꽃들이 앞다투어 피고 있다. 또한 파릇파릇한 신록의 잎새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연 역시 아름답고 화려한 부상(副賞)으로 나의 인생을 격려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꽃잎들이 5월의 미풍에 꽃비되어 내릴 때 가만히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 ‘앞으로도 너에게 줄 크고 작은 최고의 상들이 준비되어 있단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가 아닌, 순수하게 노력하고 땀 흘린 댓가로 주는…. 너는 나의 유일한 수상(受賞) 후보자란다.’


어릴 때부터 남보다 허약하고, 똑똑하지 못하고, 늘 실수와 실패 속에 상 받는 사람을 구경만 하던 내가 그래도 오늘날 예술가로, 사회인으로 낙오되지 않고 이렇게 서 있기까지는 나에게 받은 크고 작은 상이 큰 힘이 됐다고 생각한다.


이제 숲길을 혼자 걸으며 길을 헤멘다 해도 나는 그렇게 두렵거나 외롭지 않다. 치열하고 각박하게 경쟁하지 않아도 항상 열심히 노력하면 상을 받을 수 있는, 나는 나의 ‘수상 후보자’이기 때문이다.


이글은 <독서신문>에 게제한 글을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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