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의 달인
그림이 있는 수필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이게 뭐하는 짓이야? ”라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째려보는 남편.
나도 너무나 황당하여 말을 못하고 밥솥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부리나케 된장찌개를 끓이고 김치를 썰고 아침상 준비를 했다. 마지막으로 밥을 퍼 담으려고 고 전기밥솥을 여니 밥이 생쌀이었다. 쌀을 씻어 안친 것까진 좋았는데 스위치를 켜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반찬만 있는 밥상을 어떻게 차릴 것인가? 나는 남편의 핏발선 핀잔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오로지 이 난국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하는 생각 뿐이었다. 요즈음 같으면 햇반이라도 데우겠지만 부터 20여년도 훨씬 전 그때는 ‘햇반’이 없는 시대였다.
급한 대로 얼른 냉장고를 열고 식빵을 프라이팬에 구우면서 오직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 “빨리 뭐라도 먹여서 일단 출근은 시켜야지.”
남편은 어려서부터 단 한 번도 아침밥을 거른 적이 없었단다. 그 어려운 일사후퇴, 피난시절에도 손자사랑이 지극한 할머니와 어머니 손에서 식구가 다 굶어도 큰아들 아침은 꼭 챙겼다.
학교 다닐 때도 항상 공부 잘하는 애지중지하는 큰아들의 아침식사야 말로 집안의 중대사였고, 거기다 아침에 눈만 뜨면 배가 고픈 좋은 식성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마누라가 멀쩡한 쌀을 두고 아침에 밥을 못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겠지. 잔뜩 찌푸린 볼 멘 표정으로 빵을 먹고 나가는 남편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엉거주춤 인사를 하려는데 마지막 일격이 날아온다.
“예술이 밥 먹여줘?
밥이나 제대로 잘해!” 라며 현관문을 꽝 닫고 사라진다.
나는 남편이 나가자마자 침을 한번 삼키고 크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지금부터 30분 전으로 시계를 돌렸다.
‘이 사건은 나중에 일어날 일이야. 저녁이든지 내일이든지 아니 없던 일이야 . 나는 지금 그림 그리러 가야 하니까….’ 일단 ‘cut! 편집’ 다음 장면으로 ‘let’s go!’
나는 서둘러 집안일을 마치고 가방을 싸서 화실로 갔다. 일어나지 않은 사건으로 기분이 나쁠 것도 없고 화를 내더라도 저녁에 내야지 지금은 그림만 생각하자, 나중에 두고 봐라. 나라고 할 말이 없겠는가!
‘365일 먹는 밥, 한 번 못할 수도 있는 거지 그걸 가지고 그렇게 독하게 말하나?’, ‘내가 이집 식모야 뭐야?’, ‘나도 우리 집에선 공주였어’, ‘해주는 밥도 겨우 먹었어’, ‘요즘 전시준비로 신경을 좀 쓰다 보니 깜빡 실수한 걸 가지고 그 야단이야!’ 할 말은 많지만 다 잘랐다.
내 생활방식 중의 하나가 ‘시간의 편집’이다. 영화를 찍는 감독들은 편의상 뒷장면을 먼저 찍기도 하고, 앞장면을 나중에 찍기도 하지 않는가? 나도 그 방식을 쓴다.
남보다 유달리 실수가 많고 건망증이 심하다보니 나 자신도 황당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 때마다 망연자실하여 넋 놓고 자책만 한다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무능인이 된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편집의 기술이다. 내 삶을 내 스스로 편집하는 거다.
잘라낸 필름에 새 필름을 붙이고 나는 그림 작업에 빠져들었다. 그림을 그리다보니 아침의 일은 다 잊어버렸다.
시간이란 참 좋은 것이다.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조그만 씨앗이 잎이 되고 줄기가 되고 아름다운 꽃도 피우고…. 그 뿐인가? 한여름 그 무성한 녹음도 시간이 흐르면 마른 낙엽이 되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내 철학이랄까, 나의 좌우명이랄까.
가장 중요한 것이 ‘지금 이 시간’이다.
신화의 꿈 ( 145m x 112)
돈은 빌려쓸 수가 있다. 나중에 벌어서 갚을 수도 있지만 시간을 누가 빌려준단 말인가!
돈을 빌려주는 은행은 있지만 시간을 빌려주는 은행은 없지 않은가? 많은 돈을 기부하는 자선 사업가라도 일초의 시간을 나누어주지도 않고 나누어줄 수도 없다.
시간이야말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성적이 좀 나쁘다고 야단치고 공부만 하라고 잔소리를 하고 싶지가 않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어린 시절에만 가질 수 있는 소중한 일들, 가끔은 해가 지도록 친구들과 밖에서 놀아도 보고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동화책, 만화책 삼매경에 빠져도 보고, 방학 땐 외갓집에 가서 할머니하고 보내는 달콤한 추억, 붉게 물든 저녁노을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해지는 줄도 모르고 가는 길도 잃어버리는 추억은 나이가 들어서 천만금을 준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지금도 어린 시절 읽은 동화책과 할머니에게 들은 옛날이야기를 다 기억하고 있고 그 이야기가 내 인생의 밑거름이 되었다. 엄마의 이런 생각 때문인지 우리 아이들의 학교성적은 앞에서보다 뒤에서가 더 빠르다. 숙제를 못해가는 날도 종종 있어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아도 나는 무사태평이었다. 항상 아이들에겐 “언젠가는 꼭 휼륭한 사람이 될거야. 공부를 잘한다고 다 휼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야”라며 오히려 성적이 안좋은 아이들을 안심시켰다.
그나마 성적은 안좋아도 엄마와 책읽기를 좋아하고 무엇보다 어리석도록 순수한 아이들이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성적이 나쁘다고 엄마와 아이를 너무 죄인 취급하기에 선생님에게 “공부 좀 못하는 것이 그렇게 야단칠 일입니까? 우리 아이는 다른 좋은 점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더니 “애보다 엄마가 더 문제”라며 핀잔만 듣고 학부형들에겐 아이와 나 모두 왕따였다. 선생님이 “그럼 대학을 안가겠다는 거냐”고 물었다. “왜 대학 가기 위해 공부만 해야 하는지?” 내가 오히려 묻고 싶었다. 다른 엄마와 비교를 한다면 나는 문제엄마인건 사실이고 나도 인정한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건은 아침에 아이들을 다 보냈다고 생각하고 나는 부엌에서 집안일 하면서 느긋이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아무도 없는 집에서 이상하게 인기척이 들리는 것이었다.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하여 아이들 방으로 가니 누나들은 학교에 가고 아들만 태평스럽게 자고 있는 것이었다.
아들을 깨우니 놀란 아들이 눈을 비비며 하는 말이 “엄마 오늘 중간고사 시험날인데” 하는게 아닌가? ‘이런 세상에.’ 하지만 이제 준비를 하고 간다고 시험을 잘 칠 수도 없고 하여 그날 하루 아들하고 놀았다. “성욱아 다음에 시험 잘보면 돼.” 아마 남들이 들으면 아들을 욕하겠는가? 엄마를 더 욕하겠지.
그런데 내 아이들이 나의 ‘편집의 기술’을 전수받았나 보다. 모두 학교시절은 책이나 읽고 방에서 빈둥대더니 늦게 “공부가 하고 싶다”며 부득부득 3수를 해서 원하는 대학에도 들어갔고, 오히려 “중·고등학교 때 너무 많이 놀았다”며 늦게까지 공부에 열을 올렸다. 그 결과 남들보다 좀 늦었지만 지금 모두 원하는 곳에서 직장생활을 잘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나의 ‘편집의 기술’은 나의 불행을 막아주었다. 어쩔 수 없이 생긴 나쁜 일들은 일단 자르고, 중요한 일을 하고 난 뒤에 생각하기로 했다. 어찌보면 나의 궤변일 수도 있지만 불행에 한탄만 하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에겐 지독한 건망증이 있다. 이 때문에 낭패를 겪은 일도 많다. 그러나 내 건망증도 이 나이가 되니 별 문제가 안되었다. 대부분 내 나이의 친구들도 거기서 거기였다.
유명한 영화감독도 많은 실패한 영화의 감독이 아니라 단 한편의 성공한 영화의 감독으로 평생 불리어진다. 그 유명한 김소월의 시집에서조차 ‘진달래’ 외엔 이름 없고 밋밋한 詩들도 들어있다고 한다. 누가 아는가! 언젠간 나도 괜찮은 영화 한 편 찍을런지….
중요한 사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도 ‘cut!’와 ‘let’s go!’를 번갈아 외치며 내 인생을 편집하는 기쁨에 항상 새롭고 항상 설레이며, 내 인생을 절망보다는 행복 쪽으로 힘차게 몰아가고 있다.
이글은 <독서신문>에 게제한 글을 수정한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