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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지선 Apr 30. 2020

꿈이 이루어진 그다음 날

그림이 있는 수필

누구나 꿈을 이루려 노력한다. 요즈음은 대한민국 전체가 꿈을 이루기 위해 사는 나라 같다.


얼마 전인가 ‘꿈은 이루어집니다’라는 문구가 광화문의 대형빌딩 전면에 커다랗게 매달려 있었고, 대형버스 한 면 가득 ‘꿈은 이루어집니다’란 문구를 붙이고 거리를 누비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는 태어나 겨우 말을 알아들을 때부터 “너의 꿈이 무엇이니?”란 질문을 수도 없이 받는다. 밤에 꿈을 꾸어도 그것이 우리의 현실에서 이루려는 꿈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내려 애를 쓴다.


더욱이 대한민국은 지금 ‘오디션 천국’이 되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어린아이부터 나이 드신 노인들까지 모든 걸 바쳐 노력하는, 꿈을 이루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꿈이 이루어지면 그때부터 ‘불행 끝, 행복 시작’일까? 그토록 이루려는 그 꿈이 이루어지고 나서 행복이 끝까지 지속되는 걸까?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에겐 더 큰 공허와 나락으로 빠진 적이 많았다.


아마 누구라도 학생에게 가장 큰 이슈는 ‘대학 합격’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학생 시절 꿈은 부산의 지방 고교에서 서울의 대학 합격이었는데 꿈에도 그리던 합격 소식을 들으니 꽃가마 탄 듯이 우쭐해지며 내 앞에 꽃길이 고속도로처럼 나 있는 줄 알았다.


아! 드디어 사사건건 잔소리하시는 부모님과 선생님으로부터 해방되고 뭐든지 내 마음대로 하는 화려한 서울생활. ‘야, 신나는 여대생이다!’라고 쾌재를 불렀지만, 대학 입학을 며칠 앞두고 신발도 제대로 못 신고 서울 외갓집으로 쫓겨간 기억이 합격의 기쁨보다 더 크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동안 여고생의 단발머리는 고3 겨울방학 동안 자라 어깨까지 찰랑거렸는데, 이미 대학에 다니는 언니가 “너 서울 가려면 그 머리 너무 촌스러워”하며 권유하는 바람에 “이제 나도 대학생이니까”하며 어니를 따라나섰다. 언니의 “우리 동생 세련되게 해 주세요”라는 말 한마디에 나는 처음 간 광복동의 유명한 미장원에서 커다란 거울 앞에 앉아 미용사의 손에 맡겨졌다.


미용사는 “이래 키 크고 날씬한 아가씨는 숏컷을 하면 무지 세련되겠네” 라며 기나긴 몇 시간 동안 자르고, 감고, 말고, 뿌리고 하는 갖은 손질을 해댔다. 나 역시 잡지에서 본 세련되고 모던한 늘씬한 모델을 상상하며 처음 간  화려한 미용실에서  한껏 설레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눈을 뜬 순간 나는 어디 가고 웬  라면처럼 뽀글뽀글 짧은 볶은 머리를 한 처음 보는 여자가 거울에 비쳤다.


어색하고 이상했지만 온 미용실에서 이구동성으로 “아이고나  촌티 확 벗었뿐네”, “누가 보면 대학교 3학년인 줄 알겠다”라는 찬사를 듣고 나와 언니와 나는 집으로 왔다. 하지만 집에 들어간 순간 엄마의 너무나 놀란 표정. “이게 누구야? 우리 딸이 왜 이렇게 됐어?”, “그 이쁜 찰랑거리는 머리를 누가 이렇게 했어?”라며 엄마는 언니와 나를 번갈아 쳐다본 뒤 사태를 짐작하고 언니 머리를 확 잡아챘다. “니가 동생을 이렇게 했어?”, “그래 너 죽고 나 죽자.” "니 머리부터 자르자 "


나는 우리 엄마가 그렇게 화난 모습은 처음 보았다. 평소에 매는커녕 야단도 안 치시는 자상한 우리 엄마의 그렇게 화난 모습을…. 언니는 울면서 도망을 갔지만 결국 어머니에게 무지하게 맞았고, 곧이어 “너도 학교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우고 술집으로 가서 술이나 따라라”라는 호통이 터져 나왔다.


엄마가 나를 빗자루로 내려치려는 순간 누군가의 손에 잡혀 입은 옷 그대로 부산역으로 데려가 기차를 타고 서울 외갓집으로 피신했다.


이쁘게 단장한 자장스런 숙녀티 나는 딸을 앞세우고 자랑스럽게 서울의 대학 입학식에 나들이하시려던 우리 엄마와 나의 꿈은 그 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옷도 신발도 입은 그대로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야간열차를 타고 피신인지, 상경인지? 아무튼 짧은 볶은 머리를 하고 쓸쓸한 입학식을 한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아마 그 머리스타일은 그 당시 영화나 TV에서 화류계 여자의 머리스타일이었나 보다.


꿈을 이루었다고 좋아한 며칠 뒤부터 서울 먼 변두리의  외갓집에서 청파동까지  한 시간 반이나 걸리는 힘든 버스통학. 꿈의 대학 합격보다도 오히려 엄마 곁에서 온갖 응석을 부리며 공부하던 고3이 너무나 그리웠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꿈….


동화책에서는 ‘공주와 왕자가 만나 결혼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더라’라고 하면 그게 최고의 해피 엔딩이다.


계모 밑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신데렐라도 파티에 두고 온 유리구두를 찾는 왕자를 만나 행복하게 품에 안긴다. 공주들은 특별한 재능이 있다거나 왕자를 찾아 지구를 헤맨 것도 아니다.


단지 예쁘고 마음씨 착한 공주였을 뿐이고 왕자가 찾아왔을 뿐이다. 나도 꽃을 든 왕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왕자는 아니지만 꽃을 들고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신랑을 만나 동화 속 장면처럼 화려한 결혼을 했다. 이제는 친정에 사는 것보다 대학교 다니는 것보다 더 행복하고 화려한 일만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다.


꿈에 부푼 신혼 준비, 화려한 옷들, 예쁜 물건들을 사고 친구들과 온 동네 사람의 부러움을 받으며 하얀 드레스에 공주처럼 한 결혼식!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축복과 부러움 속의 화려한 결혼식과 피로연이 끝나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조그만 시골 동네에 시멘트가 벗겨져 흙이 보이는 부엌에서 엎드려서 연탄가스 맡으며 밥하는 부엌데기가 되어있었다.


결혼 준비로 산 화려한 옷들은 입을 일이 없이 장롱 속에 깊이 들어가고 일하기 편한 동네 아주머니들이 입는 고무줄 몸빼가 필요했다.


어느 날 시골 부엌에서 연탄불을 꺼뜨리고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아, 내가 그린 결혼의 꿈은 이게 아니야. 이런 시골 부엌에서 밥이나 하는, 이런 것이 아니야.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 되어 남편과 함께 멋진 연주회를 감상하는 나의 꿈은 어디 간 거야?’하고 되뇌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크고 작은 꿈을 이루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옛날처럼 그 꿈이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즐긴다.


꿈이 이루어진다고 내가 다른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꿈이 이루어져도 나의 일상은 나의 몸에서 떨어지지가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상이라면 그 사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기로 했다.


눈이 오는 날에는 창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따뜻한 차 한 잔을 곁들이고,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며 추억에 젖는 행복. 가끔은 별이 보석같이 박혀있는 추운 겨울 하늘을 바라보며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찾는 행복. 짧은 시(詩) 한 편의 감동으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기쁨의 행복..


꿈을 이루기 위해 소중하고 사소한 기쁨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중에 스치는 일상의 조그만 기쁨들이야말로 내 인생을 별처럼  빛나게 하는  놓칠 수 없는 소중한 나의  행복이라고 가슴 깊이 깨닫는다



이 글은 <독서신문>에 게재한 글을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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