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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조 May 06. 2023

속초에서 쓰는 속초 이야기.

속초 가는 길에 생각해 보니, 문득 추억이 많더라고.

 지인으로부터 속초에 놀러 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속초에서 워케이션 중인데, 감사히도, 소파에서 하루 재워줄 수 있단다. 백수 라이프의 장점 중 하나는 이런 갑작스러운 제안을 흔쾌히 승낙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마침 강원도로 별을 한 번 보러 가고 싶었는데 이동거리가 심리적 허들이었는데, 친구를 만나러 갔다 오는 길에 별까지 보고 오면 일석이조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제안을 받자마자 승낙을 하고 다음 날 아침 속초로 향했다.


  그리고 속초에 도착해 친구를 기다리며 카페에 앉아 있다 보니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속초엔 추억이 참 많았다.

  첫 나 홀로 여행지가 속초였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계절이었던 건 기억이 나는데, 07년인지 08년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갑자기 혼자 겨울 바다가 보고 싶었다. 답답한 일이 있었나 보다. 그렇게 인천터미널에서 속초터미널로 가는 버스에 올랐고, 어느 펜션 1층을 빌렸다. 펜션 주인 내외분께서 당황하셨던 게 기억난다. 남자가, 그것도 대학생이 홀로 방문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단다.

  무엇이든 첫 경험은 미화되기 때문일까,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잔상들이 있다.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던 날이었다. 드라마 <가을동화> 촬영지라는 아바이 마을 주차장 옆 해수욕장에서 비바람과 싸우다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가장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갔다. 상호는 기억나질 않지만, 거기서 먹었던 아바이 순댓국, 오징어순대, 가자미식해는 또렷하게 기억난다. 손에 꼽을 만큼 맛있는 한 끼 식사였다. 
  갯배도 탔다. 뚜벅이였기에 갯배가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이었다. 그때는 동전을 내고 직접 줄을 끌어당겨야 했다. 배에 찬 사람들이 차례차례 줄을 당겼다. 갯배를 타고 넘어가 먹었던 육개장 사발면(<가을동화>의 그 가게, 그 컵라면 맞다)과 포카리 스웨트도 기억에 남는다. 밥 먹은 지 얼마 안 된 시간이었는데 라면 배는 따로 있는 것처럼 잘 들어가더라. 
  그리고 아버지 회사 동료분께서 노상에서 사주신 숭어회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회도 회였지만, 따듯한 흰쌀밥에 숭어회 얹고, 깻잎 잘라 넣고, 비빔장 뿌리고, 참기름 둘러서 비벼 먹었던 그 회덮밥이 내 평생 먹은 회덮밥 중 제일 맛있었다.

  한적한 겨울 바다도, 저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설악산도 참 좋았다. 수산시장도 좋았고, 전통시장도 좋았다. 펜션 주인 내외분의 컴퓨터 문제를 고쳐드리고 받았던 고기도 참 맛있었다. 유명한 관광지를 찾아다닌 것도 아니고, 다녀온 곳의 지명이나 명칭도 잘 모르고 돌아다녔지만, 생에 첫 나 홀로 여행은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난 속초마을 출신 트레이너다. 포켓몬스터 세계관에서 주인공인 지우가 첫 여정을 떠나는 곳이 '태초마을'이다. 그래서 그 시절 우리에게 속초는 '속초마을'이었다. 'Pokemon Go(이하 포켓몬 고)'가 출시되자마자 전 세계를 휩쓸었다. 하지만 한국은 Google map 이슈로 인해 플레이가 불가했다. 그러다 몇몇 유저들이 게임개발사의 국가설정 방식의 맹점을 찾아내 '속초'에서는 포켓몬 고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걸 발견해 냈다. 이 소식이 퍼지자 사람들이 속초로 향했고, 그 소식이 뉴스에 나올 정도로 열풍이 불었다.

  나 역시 그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속초마을로 떠날 포켓몬 트레이너들을 모았고, 금요일 밤 퇴근 후 서울역에 모여 차를 렌트한 후 속초로 향했다. 광란의 질주 끝에 속초 엑스포타워 주차장에 도착했고, 포켓몬 고를 실행했다. 그리고 첫 포켓몬이 튀어나왔을 때의 희열이란. 다른 포켓몬 게임이라면 잡지도 않았을 슬리퍼만 주야장천 나타나도 행복했었다.
  오전에 속초 해수욕장 주변에서 꼬부기인가 이상해 씨가 나타났을 때는 연예인이라도 나타난 것 같이 사람들이 한 곳으로 몰려들었다. 모두가 핸드폰만 쳐다보며 배회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원정 오신 부모님들을 위해 apk 파일을 다운로드하여 설치해 드리고 플레이 방법을 알려드렸던 때, 포켓몬 고가 실행되자마자 보고 즐거워하던 어린이의 표정도 아직 생생하다.

  렌터카 반납 일정 때문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제한 적이었기에 세 명의 트레이너들과 함께 한 숨도 자지 않고 속초에서 실컷 플레이를 즐겼다. 온통 정신이 포켓몬 고에 팔려 있었던 탓에 기념품으로 샀던 스타벅스 속초 텀블러를 매장에 그대로 두고 와 나중에 택배로 받아야 했고, 자동차 키를 차 안에 두고 문을 잠근 바람에 생돈을 날리기도 했다. 이게 전부 다 포켓몬 고에 미쳐있었기에, 속초 마을이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래서일까, 속초에 오면 마음이 편하다. 다른 도시처럼 방문 루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몇 번이고 재방문하는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 도시가 좋다. 양양이나 강릉에 들렀을 때도 여유가 있을 때면 속초를 들렀다 가곤 한다. 양양에서 워케이션을 할 때도, 친구들과 소노팰리체 델 피노에 쉬러 왔을 때도, 고성 서로재에서 파인 스테이를 즐기러 왔을 때에도 속초를 들렀다. 그저 속초에 와서 만석닭강정을 사기도 하고, 아바이순대를 먹기도 하고, 칠성조선소에서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문우림 서점에서 책을 사기도 하고, 청초호를 따라 산책을 떠나기도 한다. 그냥 이렇게 잠깐이라도 들렀다 가곤 한다.

  시간이 지나며, 속초도 많이, 그리고 계속 변하고 있다. 이제는 리조트도 생겼고, 유적지나 자연경관이 아닌 대관람차(속초아이..?)가 랜드마크를 대신하고, 골목골목 특색 있는 가게들이 생기고 있다. 나 역시 많이 변했다. 그에 맞춰 좋아하는 여행 스타일도 바뀌었다. 

  하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게 있다. 문득 겨울 바다가 보고 싶어지면, 혼자 여행이 떠나고 싶어지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은 속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번에 갑자기 찾아온 것처럼, 언제든 마치 바다로 떠났다 다시 강으로 돌아오는 연어처럼 본능적으로 다시 방문할 거다. 그렇게 조금씩 속초에 스토리를, 추억을 계속 쌓아 나가야겠다.


2023년 2월 16일, 속초 ARUNA 카페에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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