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한 달 살아보려 합니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다만 언제부턴가 지금의 일상을 벗어나 조금 다른 일상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행도 많이 다녀봤다. 최근에는 여행하는 스타일이 바뀐 덕분에, 한 도시에 오래 머무르며 숙소를 중심으로 AirBnB의 홍보 카피처럼 로컬처럼 살아보는 여행을 해왔다. 하지만 여행만으로는 품고 있는 마음 속 갈증을 해갈하질 못했다. 여행이 주는 경험과 에너지와는 다른 경험과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조금 다른 일상을 살아 보기 위해 한 달 살기를 하기로 결심했다. 어디든 물리적 단절이 가능하고, 지금 일상의 터전인 서울이나 인천과는 다른 삶의 템포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떠난다"는 생각에 제일 먼저 떠오른 곳들은 다른 나라의 도시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인연이 있는 익숙한 도시들이 먼저 떠올랐다. 교환학생 생활을 했던 파리, 초등학생부터 꿈꿔온 뉴요커의 삶을 살 수 있는 뉴욕, 그나마 최근에 다녀온 베를린 등등.
그러다 기왕 떠나기로 마음 먹은 거, 처음 가보는 도시들도 가고 싶었다. 3년전부터 노래를 불렀던 포르투나, 다녀온 지인들이 모두 내가 좋아할거라고 추천했던 호주의 멜버른에서 생에 처음으로 남반구의 삶을 즐겨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외국에서 내가 그리는 한 달을 살기에는 생각보다 현실적인 허들이 높았다. 제일 큰 건 예산의 한계였고,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유때문에 후보들이 하나 둘 연기처럼 사라지는 중에 문득 한 곳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제주도.
섬이기에 물리적 단절이 가능했고, 시가지나 관광지를 피해 시골 마을에 머물면 지금과는 다른 템포의 일상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급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집으로 돌아올 수 있고, 가족이나 친구들이 언제든 놀러올 수 있는 완벽한 장소였다.
이렇게 제주도 행을 결정하고 나서도 세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1) 한 달 동안의 자유시간, 2) 머무를 집, 3) 어떠한 컨셉이나 테마의 일상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했다.
'한 달 동안의 자유 시간'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됐다. 2020년 3월, 한 달을 고스란히 새로운 일상에 쏟을 수 있게 됐다. 재직중인 회사에 5년 근속마다 2주 간의 Refresh 휴가 제도가 있다. 여기에 개인 연차를 2주 사용하면 최장 한 달 간의 휴가가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있다. 마침 2020년 1월이면 근속 5년을 채울 수 있었고 너무 오래 다닌것 같다, 올해 사용할 연차가 들어오는 3월이라면 한 달의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그렇게 20년 3월, 한 달 동안 떠나기로 결심했다, 최대한 빨리 떠나고 싶었기에.
머무를 집을 구하는 건 생각보다 무척 어려운 과제였다. 가끔 선의와 진심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있는데, 이번 한 달 살기에서는 집 문제가 그랬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겨우 해결했다.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 확보된 독립적인 공간이 필요했고, 요리, 빨래, 지인 방문 및 숙박이 가능해야 했다. 특히 마음에 들었던 대부분의 숙소들이 방문객에 대하여 매우 엄격한 규정을 두고 있었는데, 아마도 빈 방에 세를 놓을 수도 있는 위험을 철저하게 차단하기 위한 제도같았다. 그렇게 후보에 있던 집들이 하나 둘 씩 이런 저런 조건에 의해 필터링이 되어 사라져 갈 때 쯤 지인찬스를 통해 대안을 찾았다.
마침 지인이 제주도에 있는 빈집을 트렌디한, 누구나 살고 싶은 집으로 재생시키는 스타트업을 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 집들이 모두 내가 찾고 있던 집과 정확히 일치했다. 독립된 공간, 요리하기 좋은 부엌, 세탁기까지 모두 갖춰진 나만의 집이었다. 다행히 내가 원하는 일정으로 묵을 수 있었고, 이 곳을 예약하는 와중에도 법적 이슈 등으로 인해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렇게 지인의 도움으로 가장 큰 어려움도 해결했다.
한 달을 머무를 동안의 컨셉도 금방 정해졌다. 모조민박. JTBC의 <효리네 민박>에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목금토일, 4일 동안은 제주에 놀러오고 싶은 지인들에게 무료로 방을 빌려드리려고 했다. 숙박비 대신, 머무는 동안 같이 저녁식사를 한 번 하는 조건이었다. 메뉴는 밖에서 맛있는 걸 사와도 되고, 같이 요리를 해서 먹어도 되고, 내가 가고 싶었던 식당을 같이 가는 것도 가능했다. 일정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난 그들의 일정에 일체 관여하거나 참여하지 않는다. 원한다면 주변의 맛집이나 명소를 추천해주는 정도. 그리고 시간이 맞다면 평소에는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우리끼리만 공유하는 추억을 하나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렇게 민박집 주인처럼 한 달을 살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계획대로만 이루어지진 않는 법. 모조민박이라는 아이디어를 공개적으로 공표한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개인적인 이유로 정신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호스트 역할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무리하게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는건 나에게도, 지인들에게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전체적인 컨셉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그냥 살아보는 거로. tvN의 <삼시세끼>처럼, 영화 <리틀 포레스트>처럼. 그냥 집에 머물면서 해가 뜨면 일어나 아침을 먹고, 햇살을 만끽하고, 직접 차린 점심을 먹고, 오후를 즐기고, 푸짐한 저녁을 먹고, 차분히 하루를 마무리하며 잠이 드는 삶. 그런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거의 반 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지난 해 말에야 한 달이라는 시간, 살아갈 집, 살아갈 방향성이 모두 정해졌다. 그 고생을 해서 겨우겨우 '그냥 살아본다'는 테마를 정해놓고는, 그새를 못참고, 출발할 날이 다가올 수록 하고 싶은 일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러다 한 달 동안 하고 싶은 일이 열가지를 넘겼을 때 다시 한 번 지인찬스를 쓰기로 했다. 친구들의 투표로 열 가지 중 한 가지, 제주에 사는 한 달 동안 꼭 해야 하는 일이 한라산 등반하기 정해졌다. 열 가지 중에 나머지 아홉 가지는 안하고 오더라도, 한라산 만큼은 꼭 올라가고 오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와중에 매일 매일 조금은 다른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친구들로부터 31개의 질문을 받았다. 매일 하루에 하나 씩 친구들이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 고민해보고, 그 고민의 답을 글로 기록할 생각이다. 온전히 먹고 사는 것에 집중한 그 삶도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기로 했다. 이거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제서야 한 달 살기를 떠날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이렇게 거의 300일이 넘는 시간을 고민하며 한 달 살기를 준비했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살기 위해 이렇게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준비했다니 어처구니 없는 듯 하면서도, 이 정도면 됐다는 안도감이 든다.
그리고 드디어 한 달을 오롯이 과거와 다르게 살기 위해 제주도에 간다.
앞으로 약 한 달갈 연재할 글은 3월 한 달, 제주에 머물며 쓴 글을 비문과 오탈자를 수정하여 게시할 예정입니다.
게시글은 크게 두 분류로 나뉩니다. 매일을 기록한 일기와 친구들이 던진 31개의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