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시골 마을에 한 달 동안 살러 갑니다.
공항으로 가는 길, 제일 먼저 SNS 계정들을 비활성화했다.
페이스북은 (원래 피드 이름처럼) 뉴스를 보는 곳으로 바뀐지 오래고, 인스타그램은 뉴욕 여행 사진 정리조차 끝나지 않아 할 일(?)이 남아있었지만 이번 한 달 살기에 있어서 온라인 세상과의 단절은 매우 중요한 계획 중 하나였다. SNS를 비활성화 하고 나니 지금 당장은 할 게 너무 없다. 그말인 즉슨, 그걸 지운 덕분에 쓸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늘어났다는 뜻이겠지. 이렇게 한 달 살기를 시작하자마자 매우 큰 일 하나를 해냈다. 장하다.
공항에서는 계획이 조금 꼬였다. 국제선 타는 것마냥 일찍 도착했는데, 당연히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라운지에서 퇴짜를 맞았다. 직원분께서 라운지 쿠폰 유효기간이 만료됐다고 친절하게 안내해줬다. 작년 3월에 받은 쿠폰이었던 터라 2020년 2월까지 써야했다. 작년 내내 PP를 쓰다 보니 묵혀놓고 있었는데 하루 차이로 못 쓰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 동안 무조건 싼 비행기표를 찾아 다녔던게 잠깐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앞으로는 마일리지를 꼭 한 곳에 몰아넣어야겠다.
오랜만에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제주로 향했다. 항상 구역내 제일 뒷자리 통로 자석을 애용했던 터라 별게 다 새롭다. 언제나 그렇듯 제주까지 날아가는 시간은 정말 짧다. 비행기 뜨고 나서 정말 잠시 후에 기장님이 "Cabin crew, prepare for landing."이라고 방송하시는 느낌이다. 착륙 준비 안내 방송을 듣고 창문을 통해 제주도를 바라봤다. 제주도에 사는 지인들로부터 오늘 날씨가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흐린 날의 제주를 보니 아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한 달이나 있을거지만 첫 날은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날이 좋았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
고맙게도 교환학생 때 만났던 동생이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다. 짐도 많고 비도 오고 해서 택시 타고 갈래도 불편할 것 같았는데, 덕분에 무척이나 편하게 집으로 향했다. 두 손 가득 짐을 바리바리 들고 문 앞에서 비밀번호 못 풀어서 잠깐 버벅거리기도 하고, 겨우겨우 대문 열고 들어가 양옥집을 지나 드디어 한옥집 도착!! 역시 돈은 써야 제 맛이다. 꽤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구한 만큼 기대도 컸는데, 첫인상부터 기대를 넘어섰다. 이런 곳에서 한 달을 지낼 수 있다니, 벌써부터 행복하다.
간단히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조금 늦은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원래 가려던 식당들 대신 근처에 있는 보리밥 집으로 갔는데, 마침 보쌈고기도 있는 정식 메뉴가 있어 그걸로 주문했다. 제주에 왔으니 1일 1돼지고기 정도는 할 생각이었으니까. 잠시 후 준비된 밥상이 차러졌는데 이게 이렇게 한상 가득 차려지는 밥상일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래도 아침도 못 먹은 터라 다 비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째튼 제주에서의 첫 식사부터 아주 훌륭했다.
식사 후, 관광지에 있는 유명한 카페 대신 집으로 가던 길에 발견했던 동네 카페로 향했다. 개인 사무실 겸 카페로 쓰이는 공간이었는데, 한 달 살기를 하면서 종종 방문할 아지트 같은 공간을 찾은 느낌이었다. 사장님도 우리가 신기했는지(?) 마들렌도 서비스로 주셨다. 옛날 얘기, 한 달 살기를 하러 온 이유 등등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 받다 보니 시간이 금새 흘렀다.
친구는 카페를 나와 집까지 바래다 준 뒤 자주 놀러오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집을(으로) 떠났다. 진짜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친구가 떠난 뒤, 바리바리 싸들고 온 짐정리를 시작했다. 불특정 다수를 위한 집에서 나만을 위한 집으로 바꾸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한 달 살기를 위해 꾸며진 집이 아니다 보니 한 달 치 짐을 수납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일단 옷은 캐리어에 넣어두고 내일 수납함을 좀 사야 할 것 같다. 다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주방용품이나 식자재들은 준비할 것들이 꽤 있었다. 그래도 옷을 제외한 물품들이 하나 둘 자기 자리를 찾았고, 공간 별로 어떠한 용도로 사용할 것인지를 정했다. 마지막으로 짐을 정리하면서 찾은 필요한 물품들을 정리했다. 내일 시내에 나가서 다 사와야 할 것들이다. 냉장고도 주방도, 방도 내 머리속에 그려지는 것처럼 빨리 채워졌으면 좋겠다.
짐정리까지 마치고 나니 어느 새 저녁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였다. 집 앞 하나로 마트의 영업이 끝나기 전에 장을 보러 서둘러 떠났다. 하지만 하나로마트의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카카오맵에는 분명 5시 30분까지 영업한다고 되어 있었는데... 매장 앞에 있는 안내판에는 15시까지 영업한다고 되어 있다. 일요일이라 오후 3시까지만 하나 보다. 그래도 다행히 하나로마트 맞은 편에 자그마한 점빵 - ‘점빵’은 ‘점방’(店房) 또는 ‘전방’(廛房)을 소리나는 대로 읽으며 탄생한 단어. 점방과 전방 모두 '물건을 파는 가게'라는 뜻. 출처 : 국립국어원 -이 하나 있었다. 내일 시내에 나가 장을 볼 생각으로 일단 급하게 떼울 수 있는 식사거리(즉석밥, 조미김, 스팸)를 샀다. 결국 거창하게 차려먹을 생각이었던 제주에서의 첫 식사는, 계획과 달리, 점빵에서 급하게 공수한즉석밥과 스팸, 김과 함께 냉장고에 남아 있던 계란으로 후라이까지 하니 저녁 만찬으로 충분했다. 인스턴트인듯 인스턴트가 아닌 집밥.
스피커 사오길 참 잘했다. 커피 드리퍼로 커피를 내려 마시며, 애플 뮤직이 추천해주는 '편안한 재즈' 플레이 리스트를 틀어 놓고 있으니 낙원이 따로 없다. 매일매일 이렇게 지낼 생각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제주에서의 첫 번째 날. 다들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얘기했지만 사실 그냥 도망치는 거였다. 무책임하게 달 정도 내려놓고 오는거다. 이 한 달의 방황, 혹은 일탈이 앞으로 1년, 10년, 더 나아가 인생에서 작은 변곡점이 되어 주면 좋겠다. 뭐, 반드시 의미있는 변곡점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냥 오늘처럼 그냥 일상적인 나날들을 보낼 수 있는 한 달이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