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3일 화요일

by 모조

세 번째 날, 닭 울음소리에 잠에서 깼다. 내일 친구가 놀러 올 예정이라 한동한 혼자 있을 일이 없을 듯한 데다 어제 돈을 너무 많이 썼으니 종일 집에 있기로 마음먹었다.


일찍 일어나서 어제 사온 버터와 식빵으로 발뮤다 토스터 첫 토스트 개시! 오늘의 토스트는 '버터 토스트'. 제일 간단한 토스트지만 또 이게 맛있기가 은근 어렵다. 일단 빵에 칼집을 조금 내고, 버터를 스프레드 한 다음에 토스터에 넣으려고 했는데, 냉장고에서 갓 꺼낸 버터라 펴 바르는 건 포기했다. 주방을 다 뒤져도 스프레드 나이프도 없는터라 숟가락으로 눌러 바르다간 빵이 다 망가질 것 같아서. 시내 나갈 일이 생기면 스프레드 나이프도 하나 준비해야겠다. 토스터에서 빵이 익어 가는 동안, 발뮤다 더 팟으로 커피를 내리고, 하나 남은 계란으로 달걀 프라이도 했다. 버터 향과 커피 향이 집안 가득 퍼지니 기분이 좋아진다. 동네 베이커리 카페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건 뭐 토스터가 알아서 다 하네. 편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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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 드 뿌띠푸르의 감자식빵에 이즈니 버터(좌) 시리얼, 바나나, 방울토마토, 버터토스터, 달걀프라이까지, 내가 꿈꾸던 조식 완성.


든든하게 아침을 챙겨 먹고 특별한 일정이 없으니 아침 산책을 위해 조금 이른 시간에 오름으로 향했다. 분명히 같은 오름인데, 아침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일단 새소리가 정말 많이 들렸고, 풀내음도 훨씬 짙었다. 구름이 많이 낀 와중에도 아침 햇살은 강렬하고 따듯했다. 일부러 조금 빠르게 걸어 보기도 하고, 반대방향으로 걸어보기도 했는데,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두 바퀴 돌고 내려와 어제 찾은 인증샷(?) 포토스팟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아침 산책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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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오전의 어도오름.


아침산책을 하고 오니 바람이 조금 잦아들었다. 집에 있는 모든 문과 창문을 다 열고 환기를 좀 시켰다. 폴딩도어를 다 열었더니 펼쳐지는 풍경이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스피커에서는 콜드플레이 노래가 흘러나오고, 시원한 바람이 바람길을 따라 지난다. 아직은 엉성한 나뭇가지들 덕분에 푸르른 하늘이 더 잘 보였고, 푸르게 피어난 이름 모를 식물과 돌길이 어우러진 마당이 아름다워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 차리고 청소기를 돌리려고 보니 콜드플레이 노래가 다 끝나 새소리만 들려온다. 햇살 좋은 날이면, 거실에서 마당을 바라보며 멍 때리는 나날이 계속될 것만 같다. 이렇게 집에서 온전히 보내는 첫 오전이 이렇게 금세 지나갔다.

20200303_110858.jpg 마당에서 바라본 정원의 풍경


점심시간에 맞춰 배달시킨 계란이 도착했다. 어제 해둔 밥과 밑반찬에 계란말이를 해서 점심을 차려먹었다. 넓은 동그라미 팬에 예쁘게 계란말이를 하기가 쉽질 않아서 고생한 거에 비해 비주얼이 별로다. 일부러 당근도 아주 조그마한 사각형으로 잘 잘라 넣었는데... 내가 기대한 비주얼이 아니었다. 그래도 맛있었으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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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도 했겠다, 짐 정리도 어느 정도 됐겠다, 아침에 또 마당 보면서 집에 정도 듬뿍 들었겠다, 이때다 싶어 한 달 동안 살아갈 집을 카메라에 담기로 결심했다. 혼자 있을 때 해야 하는 일 중 하나기에, 후다닥 설거지하고 여기저기 다니며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참 괜찮은 집이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집에 오기 전에 사진으로 봤을 때도 멋진 공간이라고 생각했고, 눈으로 둘러볼 때도 매력적이었지만, 카메라 렌즈 프레임을 통해 둘러보니 여기저기 더 매력적인 곳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눈에 담기는 모든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을 수 없지만, 정해진 프레임 안에 담아내는 것만의 아름다움이 또 있다. 이렇게 사진으로만 기억할 수 있는 매력이 있기에, 마음에 드는 공간에 머물면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천천히 오랜 시간 이곳저곳 구석구석을 카메라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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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다 찍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첫날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집에 조금씩 내 물건과 흔적이 살포시 얹어져 있는 걸 확인한 덕분이다. 이제 조금 더 "내 집" 같다.


결국 3월 중에 인천 집에 다녀와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에 벌어질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갑작스럽고 이르게 잡히니 당황스럽다. 집에 있었으면 금방 했을 소통도 유선으로 오고 가다 보니 매끄럽지 않고, 비슷한 이슈로 여러 번 같은 통화를 하려다 보니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올라와 까칠해지기도 했다. 그럴 필요 없는 건데,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한테 성을 냈다. 그러지 않았어도 되는 건데, 결국 이렇게 나중에 다시 그 일로 스트레스 받을 거면서 왜 그랬을까. 그냥 그 순간의 감정에 충실했다고 생각하고, 다음번엔 이러지 말기로 다짐해본다. 근데 비행기 값이 진짜 저렴하구나, 이건 뭐 부산 왕복 기차표값보다 저렴한 거 같네.


저기압일 때는 고기 앞으로 가라는 말을 실천하고자 급하게 마트에 들러 돼지고기를 사 왔다. 구워 먹으면 냄새도 많이 나고 기름 청소하기 힘드니까 수육을 해 먹을 생각으로 갔는데, 삼겹살이 너무 비싸다. 어제 지출이 너무 큰 탓에 있는 부위 중에 가장 저렴한 앞다리살을 샀다. 된장 풀고, 커피 갈아 넣고, 파랑 양파 듬성듬성 썰어 넣고, 후추도 좀 넣고 푹 삶았다. 고기가 익어가는 동안 새송이버섯도 버터에 살짝 굽고, 느끼함을 잡아줄 깻잎김치까지 차려놓고 나니 훌륭한 한 끼가 완성됐다. 삼겹살이었으면 더 맛있었겠지만, 가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한 판이었다. (그래도 다음엔 삼겹살로 해야겠다. 앞다리살은 찌개에 넣어 먹는 게 맞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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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겹살이었으면 더 맛있어 보이거나 더 맛있었을 수 있는데, 앞다리살도 충분했다.


지금 이 시간까지 필라테스 학원에서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수업 들으러 가긴 글렀나 보다. 되면 된다, 안되면 안 된다 알려주면 참 좋을 텐데, 이런 식의 커뮤니케이션은 참 별로다. 빨리 알려줬으면 대안이라도 생각해 봤을 텐데, 괜히 한 달만 머물 거라는 얘기를 꺼냈나 싶기도 하다. 이렇게 된 거, 이동시간까지 세 시간을 어떻게 더 의미 있게 쓸지 고민해 봐야겠다. 아니면 그냥 그 세 시간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이 곳에서 온전히 더 쉬어도 좋지 않을까. 그러려고 온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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